빌드 날짜: 2026-08-29
이 문서를 읽는 방법
이 문서는 철학을 혼자 읽어 학사 과정 수준까지 도달하도록 정리한 자습서다. 인식론·형이상학·심리철학·언어철학·윤리학·정치철학의 주요 문제를 다루고, 각 문제에서 무엇이 정해졌고 무엇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지를 구분해 적는다.
이 과목의 목표는 입장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 아니다. 어떤 주장이 어떤 이유로 서 있는지 재구성할 수 있고, 그것을 무너뜨리려면 무엇을 보여야 하는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에는 답이 없다"는 말에 대해
이 문서를 여는 사람 대부분이 이 생각을 갖고 온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리고 그 반반을 가르는 것이 이 문서가 하는 일의 절반이다.
이 문서는 서술을 세 등급으로 나눠 적는다. 3장이 이 구분을 독자에게 소개하고, 그 뒤로는 계속 쓴다.
| 등급 | 어떻게 적는가 | 보기 |
|---|---|---|
| 정설 | 그냥 서술한다. 따로 표시하지 않는다 | 게티어 사례가 앎의 세 조건 분석을 무너뜨린다 (5장) |
| 다수설·소수설 | 다수설을 먼저 쓰고, 소수설과 그 근거를 반드시 잇는다 | 물리주의가 다수설이고 속성 이원론이 주요 소수설이다 (14장) |
| 미결 | 입장들을 나란히 놓는다. 이 문서가 고르지 않는다 | 결과주의·의무론·덕 윤리 (18장) |
미결이라고 적힌 자리에서 이 문서가 답을 주지 않는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다. 답이 정해진 척하는 것이 독자에게 더 나쁘기 때문이다. 대신 각 입장이 무엇을 설명하려고 그렇게 말하는지, 그 대가로 무엇을 포기하는지를 적는다. 그것을 알면 스스로 고를 수 있고, 고르지 않기로 하는 것도 하나의 답이 된다.
반대로 정설이라고 적힌 것은 실제로 다툼이 거의 없다. 철학에서도 무너진 논증은 무너진 것으로 남는다.
무엇을 알고 있어야 하는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철학 배경 지식을 가정하지 않고, 중학교 수학 이상을 쓰지 않는다.
- 논증·타당·건전·반례 — 3장이 표 하나로 되짚는다. 그 표가 이 문서 전체에서 쓰는 전부다
- 확률 — 8장의 베이즈 갱신 한 곳에서만 쓴다. 식 한 줄과 뜻만 주고 확률 문서로 보낸다
- 철학사 — 3장의 시대 지도 한 장이 전부다. 인물은 처음 나오는 자리에서 한 줄로 자리를 잡아 준다
논리 기호가 몇 개 나오지만 계산하라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문장의 짜임을 짧게 적는 속기라고 보면 된다.
다른 문서와의 분업
이 사이트의 논리학 문서가 형식 논리 전체를 다룬다. 그것을 여기서 다시 가르치지 않는다.
| 그 문서가 하는 것 | 이 문서가 하는 것 |
|---|---|
| 타당성·건전성·반례를 정의한다 | 그 정의를 쓴다. 3장이 표 하나로 되짚는다 |
| 형식적 오류 둘 — 후건 긍정과 전건 부정 | 비형식 오류 일곱 — 그 문서가 ‘다루지 않는다’ 고 적고 넘긴 것 |
| 명제·술어논리의 문법과 증명 체계를 세운다 | 쓰지 않는다 |
| 양상논리를 형식 체계로 세운다 — 접근관계, S4, S5 | 가능세계를 형이상학의 도구로 쓴다. 그것이 실제로 있는지를 묻는다 (11장) |
| 확정기술을 술어논리로 형식화한다 | 왜 그 분석인가, 무엇을 해결하는가, 누가 반대하는가 (16장) |
두 문서는 3~4장에서 맞물린다. 논리학 문서 3장이 "형식으로 잡히지 않는 나쁜 논증"을 이름만 대고 넘겼는데, 이 문서 4장이 그것을 받는다. 어느 쪽을 먼저 읽어도 된다.
이 문서가 지키려는 약속
- 합의되지 않은 것을 합의된 척 적지 않는다. 위의 세 등급이 그 장치다.
- 반대 견해는 가장 강한 형태로 적는다. 반박하기 쉬운 형태로 요약해 놓고 무너뜨리는 것은 독자를 속이는 것이다.
- 비율을 숫자로 적지 않는다. "철학자의 몇 %가 무엇을 지지한다"는 문장은 설문 하나에 기대는데, 그 표본과 문항을 여기서 재현할 수 없다. 무게는 말로 적는다.
- 사고실험은 줄거리만 소개하지 않는다. 무엇을 묻는 장치인지, 왜 그 판단이 나오는지, 그 판단이 무엇을 지지하는지까지 적는다.
- 확실하지 않은 연도·저작·인용은 적지 않는다. 추측이면 추측이라고 적는다.
- 각 장은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표로 닫는다.
이 문서의 짜임
열여덟 개 장이 여섯 덩어리로 묶인다. 어느 덩어리를 읽고 있는지 알면 각 장이 왜 거기 있는지가 보인다.
| 부 | 장 | 무엇을 하는가 |
|---|---|---|
| 1부 도구 | 3~4 | 철학이 무슨 작업인지 보이고, 논증을 다루는 기술을 익힌다 |
| 2부 앎 | 5~9 |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회의주의와 귀납과 과학으로 넓힌다 |
| 3부 세계 | 10~11 | 무엇이 있는가. 인과·법칙·양상 |
| 4부 사람 | 12~13 | 자유의지와 인격 동일성. 3부의 문제가 사람에게 오면 어떻게 되는가 |
| 5부 마음과 말 | 14~16 | 마음의 존재론, 의식, 그리고 말이 무언가를 가리키는 방식 |
| 6부 해야 할 일 | 17~20 | 도덕 판단의 지위, 규범 이론 셋, 사례, 그리고 정의와 국가 |
2부가 가장 길고 이 문서의 기술적 중심이다. 5장이 분석을 세우고 반례가 무너뜨리는 방식을 보이는데, 같은 모양이 11장(인과)과 13장(인격 동일성)에서 되풀이된다. 그 반복을 알아채면 뒤가 훨씬 빨리 읽힌다.
6부는 앞을 다 읽지 않아도 읽힌다. 다만 17장은 3장의 세 등급을, 18~19장은 3장의 사고실험과 반성적 평형을 쓴다.
권장 순서와 장별 난이도
| 장 | 주제 | 난이도 | 예상 시간 | 앞에 필요한 장 |
|---|---|---|---|---|
| 3 | 철학은 무엇을 하는 일인가 | ★ | 3시간 | - |
| 4 | 논증을 다루는 기술 | ★★ | 4시간 | 3 |
| 5 |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 ★★ | 4시간 | 3, 4 |
| 6 | 정당화의 구조 | ★★★ | 4시간 | 5 |
| 7 | 회의주의 | ★★★ | 4시간 | 5, 6 |
| 8 | 귀납은 정당한가 | ★★★ | 5시간 | 4, 7 |
| 9 | 과학철학 | ★★★ | 5시간 | 8 |
| 10 | 무엇이 있는가 | ★★★ | 5시간 | 3, 5, 8, 9 |
| 11 | 인과·법칙·양상 | ★★★★ | 6시간 | 8, 10 |
| 12 | 자유의지와 결정론 | ★★★ | 5시간 | 11 |
| 13 | 나는 왜 같은 사람인가 | ★★★ | 4시간 | 10, 12 |
| 14 | 마음과 몸 | ★★★ | 5시간 | 10, 11 |
| 15 | 의식·지향성·기계의 마음 | ★★★★ | 5시간 | 11, 14 |
| 16 | 말은 어떻게 무언가를 가리키는가 | ★★★★ | 6시간 | 10, 11 |
| 17 | 도덕 판단은 무엇을 하는 말인가 | ★★★ | 4시간 | 3, 11, 13 |
| 18 |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세 이론 | ★★★ | 5시간 | 17 |
| 19 | 이론을 사례에 대어 보기 | ★★★ | 4시간 | 3, 12, 14, 15, 18 |
| 20 | 정의와 국가 | ★★★ | 5시간 | 12, 18 |
총 83시간 남짓이다. 하루 2시간이면 여섯 주 정도의 분량이다.
가장 걸리는 곳을 미리 알려 둔다. 11장의 필연·우연 × 선험·후험 교차표와 16장의 고정지시어다. 둘은 사실 같은 문제의 두 얼굴이고, 16장을 읽고 11장으로 돌아오면 풀린다. 급하면 11장의 그 절은 표만 보고 넘어가도 된다.
6부(17~20장)만 읽어도 된다. 윤리학과 정치철학이 목적이라면 3장을 읽고 곧장 17장으로 가도 막히지 않는다. 다만 11장의 '수반', 12장의 '도덕적 운', 그리고 19장 마지막 절에서 15장의 기계 마음 논의를 그때그때 되짚게 된다.
이 문서의 표기 규약
수식은 거의 없다. 자주 나오는 것이 아래이고, 모두 논리학 문서와 같은 표기다. 여기 없는 기호가 한두 곳에서 쓰이면 그 자리에서 뜻을 밝힌다.
| 대상 | 표기 | 어디서 쓰는가 |
|---|---|---|
| 논리식 메타변수 | 3~4장 이후. 문장이 들어갈 자리 | |
| 원자 명제 | 7장 이후. 문장 하나 | |
| 술어 | 8장 이후. | |
| 연결자 | 3장 이후 | |
| 한정사 | 10장. 존재론적 개입 | |
| 양상 | 11장 이후 | |
| 반사실 조건문 | 11장. ‘A 였다면 C 였을 것이다’ | |
| 확률 | 8~9장. | |
| 논증 형식 | 3~4장 이후. 가로선 위가 전제 |
논증을 풀어 적을 때는 전제를 (P1), (P2) …, 중간 결론을 (C1), 최종 결론을 (C) 로 적는다. 4장이 이 표기를 세운다. 어떤 입장을 소개할 때 "이 입장은 (P2) 를 부인한다"처럼 적는 것이 이 문서의 방식이다. 입장의 이름보다 어느 전제를 끊는가가 더 많은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용어는 한국어를 먼저 쓰고 괄호에 영어를 병기한다. 문서 전체에서 처음 한 번만이다. 사람 이름도 같다. 번역이 갈리는 용어가 많은 과목이라 이 문서는 하나로 고정했다. 다른 책에서 다른 말을 만나거든 같은 것을 가리키는지 의심해 보는 편이 좋다.
참고문서
아래는 이 문서를 쓰면서 확인한 것들이다. 이 문서는 어느 자료도 옮기거나 번역하지 않았다. 읽고 새로 썼고, 원전은 링크로 가리킨다.
자유 이용 교재
- Rebus Community, Introduction to Philosophy 시리즈 — 심리철학·윤리학·논리학·종교철학·인식론·미학 여섯 권. Ethics 권에서 CC BY 4.0 을 확인했다(나머지 권은 권별로 확인이 필요하다). CC BY 는 개작까지 허용한다. 분야별로 한 권씩이라 이 문서의 각 부에 대응한다
- OpenStax, Introduction to Philosophy (2022) — 개론 13장. CC BY-NC-SA 4.0. 세계 여러 전통을 함께 다루는 점이 이 문서가 못 한 부분을 메운다
백과와 짧은 글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항목마다 전문가가 쓰고 갱신한다. 이 문서의 어느 절이든 더 깊이 들어가려면 첫 목적지다. 저자가 저작권을 갖고 있어 옮길 수는 없다
-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 SEP 보다 입문자에게 친절한 항목이 많다
- 1000-Word Philosophy — 한 주제를 1,000단어로. 처음 감을 잡는 데 좋다
유료 교재
- Thomas Nagel, What Does It All Mean? — 100쪽 남짓의 입문서. 이 문서 5·7·12·13·14·17장의 물음을 압축해 담고 있다
- Robert Audi, Epistemology — 5~7장의 정본 교과서
- Loux & Crisp, Metaphysics: A Contemporary Introduction — 10·11장
- Jaegwon Kim, Philosophy of Mind — 14·15장의 정본
강의
철학은 무엇을 하는 일인가
철학 책을 펴면 곧바로 물음이 쏟아진다.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제의 나와 왜 같은 사람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대개 같은 반응이 따라온다. 그런 것에 무슨 답이 있겠는가.
이 장은 그 반응을 정면으로 다룬다. 결론부터 말하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철학의 물음 가운데 실제로 정해지지 않은 것이 있다. 그러나 정해진 것도 있고, 무엇이 정해졌고 무엇이 정해지지 않았는지 자체는 대체로 정해져 있다. 이 문서는 그 셋을 구분해서 적는다. 그 구분을 소개하는 것이 이 장의 일 가운데 하나다.
이 장에서 답할 질문은 넷이다.
- 어떤 물음이 철학의 물음이 되는가. 관찰하면 되는 물음과 무엇이 다른가.
- 답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은 어디까지 맞는가.
- 철학자는 실제로 무슨 작업을 하는가. 개념 분석·사고실험·반성적 평형이란 무엇인가.
- 그 작업이 기대는 '직관'은 믿을 만한 것인가.
앞 장에서 가져오는 것은 없다. 이 장이 문서의 실질적인 출발점이다. 철학 배경 지식도, 논리학 문서를 읽었다는 것도 가정하지 않는다. 논리학에서 빌려 오는 것은 아래 '논증이라는 공통 화폐' 절의 표 하나뿐이고, 그 표가 이 문서 전체에서 쓰는 전부다.
이 장은 다른 장보다 추상적이다. 여기서 세우는 도구가 무엇에 쓰이는지는 5장부터 실제 문제에 대어 보면서 드러난다. 지금 다 와닿지 않아도 뒤로 갈 수 있게 써 두었고, 뒤에서 도구 이름이 나오면 이 장으로 돌아오면 된다.
어떤 물음이 철학의 물음이 되는가
물음을 세 번 걸러 보자. 걸러지지 않고 남는 것이 철학의 물음이다.
첫째, 관찰하거나 재면 정해지는가. "물이 몇 도에서 끓는가"는 재면 된다. 재는 방법을 두고 다툼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 다툼도 결국 재는 방법에 대한 다툼이다. 이런 물음은 과학의 몫이다.
둘째, 계산하거나 증명하면 정해지는가. "소수가 무한히 많은가"는 증명이 있다. 관찰은 필요 없다. 이런 물음은 수학과 논리의 몫이다.
셋째, 낱말의 뜻을 정하기로 약속하면 물음이 사라지는가. "버섯은 야채인가"는 야채를 어떻게 부르기로 할지 정하면 끝난다. 정하기 전까지 다투는 것은 말싸움이고, 정하고 나면 다툴 것이 남지 않는다.
셋 다 아닌 물음이 있다. "그가 진짜로 아는 것인가", "그렇게 해도 되는가", "그 관찰이 왜 그 이론을 지지하는가". 이런 물음에는 잴 것이 없고, 증명할 공리도 없고, 낱말 뜻을 정한다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낱말 뜻을 정하는 일 자체가 다툼거리이기 때문이다.
이 갈래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 물리학도 심리학도 언어학도 철학에서 갈라져 나갔다. 어떤 물음에 대해 재는 방법이 마련되면 그 물음은 경험적 물음이 되어 떠난다. 남는 것은 아직 재는 방법이 없는 물음과 무엇을 재야 하는지를 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실제 물음은 대개 섞여 있다. "사형이 범죄를 줄이는가"는 경험적 물음이고 "줄인다면 사형이 정당한가"는 철학적 물음이다. 섞인 물음을 갈라 놓지 않으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물음에 대고 서로 다른 증거를 내밀면서 끝없이 이야기하게 된다. 물음을 가르는 것 자체가 철학이 하는 일의 큰 부분이다.
정해진 것과 정해지지 않은 것 — 이 문서가 쓰는 세 등급
이제 첫머리의 반응으로 돌아간다. "철학은 답이 없다"는 말은 어디까지 맞는가.
갈라서 보아야 한다. 철학의 주장은 합의의 정도에 따라 정설·다수설과 소수설·미결 셋으로 나뉘고, 셋은 성격이 다르다. 이 문서는 셋을 다르게 적는다.
| 등급 | 무슨 뜻인가 | 이 문서가 쓰는 방식 |
|---|---|---|
| 정설 | 사실상 다툼이 없다 | 그냥 서술한다. 아무 표시도 붙이지 않는다 |
| 다수설·소수설 | 갈리지만 무게가 다르다 | 다수설을 먼저 쓰고, 소수설과 그 근거를 반드시 잇는다 |
| 미결 | 어느 쪽도 우세하지 않다 | 입장들을 나란히 놓는다. 저자가 고르지 않는다 |
예를 들어 5장에서 볼 게티어(Edmund Gettier, 1927–2021)의 반례가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면 앎이다"를 무너뜨린다는 것은 정설이다. 그 반례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미결이다. 하나의 주제 안에서도 등급이 갈린다.
세 등급을 구분하면 "답이 없다"는 말이 왜 거친 말인지 보인다. 미결인 사안에서도 정해진 것이 많다. 어떤 입장들이 살아 있는지, 각 입장이 무엇을 설명하려고 그렇게 말하는지, 그 대가로 무엇을 포기하는지, 어떤 반론이 결정적이고 어떤 반론이 이미 답을 받았는지 — 이것들은 정해져 있고 배울 수 있다. 미결인 것은 마지막 한 걸음이다.
이 문서가 지키는 규칙을 세 가지 미리 적어 둔다.
- 비율을 숫자로 적지 않는다. "철학자의 몇 퍼센트가" 같은 문장은 설문 하나에 기대는데, 그 표본과 문항을 이 문서 안에서 확인할 방법이 없다. 무게는 말로 적는다.
- 반대 견해는 가장 강한 형태로 적는다. 그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이 읽고 "내 입장이 맞게 적혔다"고 할 문장이어야 한다.
- 미결을 결론인 척하지 않는다. "따라서 X 이다"와 "나는 X 쪽이 낫다고 본다"는 다른 문장이다.
셋째 규칙은 읽는 쪽에도 해당한다. 미결인 사안에서 어느 쪽이 옳은지를 이 문서에서 찾으려 하면 찾지 못한다. 대신 어느 쪽을 택하면 무엇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찾을 수 있고, 그것이 실제로 필요한 정보다.
논증이라는 공통 화폐 — 되짚기 한 표
철학이 물음에 답하는 방법은 하나다. 논증을 내놓고 서로 검사한다. 권위도, 다수결도, 인상도 아니다. 그러니 논증에 대한 최소한의 낱말이 필요하다.
이 낱말들은 논리학 문서 3장이 정의한다. 여기서 다시 정의하지 않는다. 아래 표가 이 문서 전체에서 쓰는 전부이고, 더 필요하면 그 문서로 가면 된다.
| 낱말 | 뜻 | 이 문서에서 하는 일 |
|---|---|---|
| 논증 | 결론 하나와 그것을 받아들일 이유로 내놓은 전제들의 묶음 | 거의 모든 절이 논증 하나를 다룬다 |
| 타당하다 | 전제를 모두 참으로 만들면서 결론을 거짓으로 만드는 상황이 없다 | 전제가 실제로 참인지와 무관하다 |
| 부당하다 | 그런 상황이 있다 | 결론이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다 |
| 건전하다 | 타당하고, 게다가 전제가 실제로 모두 참이다 | 실제로 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
| 반례 | 전제를 모두 참으로 만들면서 결론을 거짓으로 만드는 상황 | 하나만 내놓으면 부당함이 확립된다 |
| 연역 / 귀납 | 결론을 보증한다고 주장하는 논증 / 그럴듯하게 만든다고만 주장하는 논증 | 철학은 둘 다 쓴다. 잣대가 다르다 |
표에서 가장 걸리는 곳을 짚어 둔다. 타당하다는 것은 전제가 참이라는 뜻이 아니다. "모든 물고기에 날개가 있다. 고등어는 물고기다. 그러므로 고등어에 날개가 있다"는 타당하다. 전제가 거짓이지만 전제를 참으로 만드는 상황을 상상하면 결론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일상어의 '타당하다'와 다른 뜻이라는 것만 붙잡고 가면 된다.
논증의 짜임을 적는 표기도 논리학 문서와 맞춘다. 문장이 들어갈 자리는
는 "
마지막 줄의 연역과 귀납은 뒤에서 계속 쓴다. 철학의 논증은 연역만이 아니다. 8장의 귀납 문제와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이 모두 귀납 쪽이고, 거기에는 타당·부당 대신 강하다·약하다는 잣대를 쓴다. 귀납 논증에 타당·부당을 들이대면 언제나 부당하다는 답만 나오므로 판정이 되지 않는다.
개념 분석 — 낱말을 조건으로 펴 본다
철학이 물음에 달려드는 첫째 방법은 개념 분석(conceptual analysis)이다. "X 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X 이다"가 성립할 조건을 대는 것으로 답하는 방식이다. 고대 그리스의 대화편에 기록된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70?–399)의 물음이 이 꼴이었고, 그 물음의 모양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조건을 댈 때 두 방향을 갈라야 한다.
- 필요조건 — 그것 없이는 X 일 수 없는 조건. X 이면 반드시 그 조건을 만족한다.
- 충분조건 — 그것만 있으면 X 인 조건. 그 조건을 만족하면 반드시 X 다.
분석이 노리는 것은 두 방향이 다 성립하는 필요충분조건이다. 그것이 나오면 "X 이다"와 "조건을 만족한다"가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말이 된다. 조건문으로 옮겨 적는 방법은 논리학 문서 4장이 다룬다.
분석은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분석안을 내놓으면 누군가 반례를 찾고, 반례가 나오면 고치고, 고친 것에 또 반례가 나온다. 이 되풀이가 철학 논문의 표준적인 모양이다.
여기서 반례가 앞 절의 낱말과 조금 다르게 쓰인다는 데 주의하자. 논증의 반례는 전제를 참으로 만들면서 결론을 거짓으로 만드는 상황이었다. 분석의 반례는 조건은 갖췄는데 X 가 아닌 경우, 또는 X 인데 조건을 못 갖춘 경우다. 하는 일은 같다. 주장이 남김없이 성립한다는 말을 무너뜨리는 사례 하나를 내놓는 것이다.
개념 분석은 그 자체로 논쟁거리다
이 방법이 잘 먹히는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세 가지 의심이 있다.
첫째, 분석이 성공한 사례가 드물다. 오래 버틴 분석안이 거의 없다. 5장에서 볼 앎에 대한 분석이 대표적인 예다. 둘째, 낱말의 뜻과 세상에 대한 사실이 깔끔하게 갈리지 않는다. 콰인(W. V. O. Quine, 1908–2000)이 이 구분 자체를 문제 삼은 뒤로, 분석이 "낱말의 뜻만 밝히는 일"이라는 자기 설명이 흔들렸다. 셋째, 일상 개념이 애초에 조건 목록으로 되어 있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조건을 찾지 못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개념의 생김새를 잘못 본 것이다.
그렇다고 이 방법이 버려진 것은 아니다. 분석안을 세우고 반례를 대는 작업은 어디서 의견이 갈리는지를 정확히 드러낸다. 최종 정의를 내지 못해도 그 성과는 남는다. 이 문서에서도 분석안이 무너지는 장면을 여러 번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무너지면서 무엇이 밝혀졌는지를 함께 적는다.
사고실험 — 상상 속에서 하는 실험
둘째 방법은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이다. 실제로 해 볼 수 없는 상황을 설정해 놓고, 그 상황에서 어떻게 판단하게 되는지를 보는 것이다.
사고실험은 이야기가 아니라 논증의 부품이다. 상황에서 곧바로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상황을 읽은 사람에게서 판단이 나오고, 그 판단이 전제가 되어 논증이 굴러간다. 이 순서를 놓치면 사고실험은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
잘된 사고실험 하나를 보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보다 빨리 떨어진다는 견해를 무너뜨린 논증이다.
무거운 것이 빨리 떨어진다고 하자. 무거운 돌과 가벼운 돌을 끈으로 묶어 함께 떨어뜨리면 어떻게 되는가. 가벼운 돌은 느리게 떨어지려 하므로 무거운 돌을 붙잡아 늦출 것이다. 그러면 묶은 것은 무거운 돌 하나보다 느리게 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묶어 놓으면 전체는 더 무거워졌으므로 무거운 돌 하나보다 빠르게 떨어져야 한다. 같은 가정에서 반대되는 두 결론이 나온다. 그러니 가정이 틀렸다.
이 논증이 잘된 이유는 셋이다. 첫째, 실제 실험이 필요 없다. 가정 안에서 모순이 나오기 때문이다. 둘째, 판단을 요구하는 지점이 분명하다. "묶으면 전체가 더 무겁다"와 "느린 것이 빠른 것을 늦춘다" 둘만 받아들이면 된다. 셋째, 무엇을 무너뜨리는지가 정확하다. 무거운 것이 빨리 떨어진다는 주장 하나만 겨눈다.
철학의 사고실험도 같은 모양이다. 5장의 게티어 사례, 7장의 통 속의 뇌, 13장의 분열 사례, 15장의 중국어 방, 19장의 트롤리가 모두 이 구조다. 뒤에서 그것들을 만날 때마다 상황·판단·그 판단이 지지하는 주장 셋을 갈라 보면 논쟁이 어디서 벌어지는지 보인다.
사고실험이 실패하는 방식도 정해져 있다. 상황이 실은 불가능하거나, 판단이 사람마다 갈리거나, 판단이 나온 이유가 그 주장과 상관없거나. 셋 다 실제로 자주 일어난다.
직관과 반성적 평형
앞 절에서 사고실험이 '판단'을 끌어낸다고 했다. 그 판단을 철학에서는 직관(intuition)이라 부른다. 신비한 능력이 아니다. 어떤 경우를 놓고 논증도 관찰도 거치지 않은 채 그냥 그렇게 보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일 뿐이다.
직관을 증거로 쓰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직관이 개념의 쓰임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달리 출발할 데가 없기 때문이다. 앎이 무엇인지 재는 기계가 없으므로, 어떤 경우를 앎이라 부르고 어떤 경우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직관과 원리가 부딪치면 어느 쪽을 고치는가. 답은 둘 다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방식에 반성적 평형(reflective equilibrium)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롤스(John Rawls, 1921–2002)이고, 같은 발상을 앞서 논리 규칙에 대해 말한 사람은 굿맨(Nelson Goodman, 1906–1998)이다. 굿맨의 지적은 이랬다. 우리는 추론 규칙을 가지고 개별 추론을 판정하지만, 규칙이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추론을 허용하면 규칙 쪽을 고친다. 양쪽이 서로를 고친다.
이 방식에 대한 흔한 오해 둘을 미리 막아 둔다.
첫째, 반성적 평형은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가 아니다. 고칠 때는 이유를 대야 한다. 판단을 버리려면 그 판단이 왜 믿을 만하지 않은지를, 원리를 버리려면 그 원리가 어디서 또 어긋나는지를 대야 한다. 이유 없이 고치면 그것은 균형을 맞춘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결론에 맞춰 놓은 것이다.
둘째, 균형에 이르렀다고 참인 것은 아니다. 잘 맞물린 믿음 묶음이 통째로 틀릴 수 있다. 그래서 배경 이론이 들어온다. 그 판단이 어디서 왔는지 — 예를 들어 그것이 특정 문화에서만 나오는 판단인지 — 를 알게 되면 판단의 무게가 달라진다.
직관은 어디까지 증거인가
여기가 이 장에서 가장 흔들리는 자리다. 직관을 증거로 쓰는 데 대한 의심이 여럿 있고, 그 의심들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제기되는 의심은 대체로 이렇다. 같은 사례를 놓고 사람마다 다른 판단이 나오는 일이 있다. 물음을 어떤 순서로 놓는지, 어떤 표현으로 꾸미는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는 일도 있다. 그리고 훈련받은 철학자의 직관이 훈련받지 않은 사람의 직관보다 나은지도 분명하지 않다. 직관을 실제로 조사하는 실험철학(experimental philosophy)이라는 흐름이 이런 물음들을 다뤄 왔다. 조사 결과 가운데 어떤 것은 다시 확인되었고 어떤 것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그 결과들이 철학의 방법에 무엇을 뜻하는지는 지금도 다투어진다.
이 문서가 택하는 태도는 이렇다. 직관은 증거이되 힘을 잃을 수 있는 증거다. 어떤 판단이 특정 표현에서만 나온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 판단의 무게는 줄어든다. 여러 사람에게서 한결같이 나오고 표현을 바꿔도 흔들리지 않으면 무게가 는다. 이것은 증거 일반을 다루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뒤의 장에서 사고실험을 만날 때 이 자리를 기억해 두면 좋다. 어떤 논쟁은 사실이 아니라 어느 직관에 더 무게를 줄 것인가에서 갈린다. 그런 논쟁은 새 사실이 나온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시대와 지역 — 이 문서가 서 있는 자리
이 문서는 철학사를 다루지 않는다. 문제와 논증을 다루고, 인물은 그 논증을 내놓은 사람으로만 나온다. 그래도 방향 감각은 있어야 하므로 지도를 한 장 둔다. 이 그림 하나가 이 문서가 주는 유일한 시대 감각이다.
그림에 적힌 이름 대부분은 뒤의 장에서 처음 제대로 소개된다. 여기서는 자리만 잡아 둔다. 외울 것은 없고, 굵은 흐름 셋만 눈에 담아 두면 충분하다.
- 고대 그리스에서 물음의 모양이 정해졌다. "X 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보편자와 개별자의 구별, 논증을 형식으로 다루는 발상이 여기서 나왔다.
- 근대에 지식의 뿌리를 두고 두 흐름이 갈렸다. 이성에 두는 쪽과 경험에 두는 쪽이다. 5~8장의 인식론 논쟁이 이 갈림의 후손이다.
- 20세기에 논증을 다루는 방식이 다시 정비되었다. 이 문서 본문의 대부분이 여기서 나온 논증들이다.
그리고 이 지도의 한계를 밝혀 둔다.
첫째, 이 지도는 서양 철학만 담고 있다. 이 문서가 다루는 논쟁과 어휘가 그 전통에서 나왔기 때문이고, 그 전통이 더 낫기 때문이 아니다. 동아시아 철학의 유가·도가·불교 전통과 인도 철학은 앎·자아·인과·규범에 대해 오랜 논의를 독자적으로 쌓아 왔다. 그중에는 이 문서의 물음과 정면으로 겹치는 것도 있고, 물음의 모양 자체가 다른 것도 있다. 이 문서는 그것을 다루지 않는다. 제대로 다루려면 별도의 문서 하나가 필요하고, 어설프게 한 절로 요약하면 없는 것보다 나쁘다. 21장에서 갈 길을 안내한다.
둘째, 서양 철학 안에서도 이 문서는 20세기 분석철학 쪽에 치우쳐 있다. 현상학과 그 이후의 흐름은 지도에 자리만 표시하고 본문에서 다루지 않는다. 미학·종교철학·철학사 자체도 다루지 않는다.
셋째, 지도의 선은 시간 순서일 뿐 영향 관계가 아니다. 실제 계보는 훨씬 얽혀 있고, 뒤 시대가 앞 시대를 건너뛰어 되살리는 일도 잦다.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 용어·표기 | 뜻 |
|---|---|
| 철학적 물음 | 관찰·증명·낱말 약속 셋 가운데 어느 것으로도 결판나지 않는 물음 |
| 정설 | 사실상 다툼이 없는 주장. 표시 없이 그냥 서술한다 |
| 다수설 / 소수설 | 갈리되 무게가 다른 경우. 다수설 뒤에 소수설과 그 근거를 반드시 잇는다 |
| 미결 | 어느 쪽도 우세하지 않은 경우. 입장들을 나란히 놓고 저자가 고르지 않는다 |
| 타당 / 부당 | 전제를 모두 참으로 만들면서 결론을 거짓으로 만드는 상황이 없다 / 있다 |
| 건전 | 타당하고 전제가 실제로 모두 참이다. 그러면 결론은 반드시 참이다 |
| 반례 | 그 상황 하나. 논증에 대해서도, 개념 분석안에 대해서도 같은 일을 한다 |
| 연역 / 귀납 | 결론을 보증한다고 주장하는 논증 / 그럴듯하게 만든다고만 주장하는 논증 |
| 문장이 들어갈 자리를 가리키는 메타변수. 논리학 문서와 같은 표기다 | |
| 논증 형식을 적는 모양. 가로선 위가 전제, 아래가 결론 | |
| 개념 분석(conceptual analysis) | ‘X 란 무엇인가’ 에 X 가 성립할 조건을 대어 답하는 방식 |
| 필요조건 / 충분조건 | 그것 없이는 X 일 수 없는 조건 / 그것만 있으면 X 인 조건 |
| 필요충분조건 | 두 방향이 다 성립하는 조건. 개념 분석이 노리는 것 |
|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 | 상황을 설정해 판단을 끌어내고 그 판단을 전제로 삼는 장치 |
| 직관(intuition) | 논증도 관찰도 거치지 않고 어떤 경우에 대해 그냥 드는 판단 |
| 반성적 평형(reflective equilibrium) | 개별 판단과 일반 원리를 서로 고쳐 가며 맞추는 방식. 어느 쪽도 최종 심판이 아니다 |
| 실험철학(experimental philosophy) | 직관이 실제로 어떻게 갈리는지를 조사하는 흐름 |
| 사람 | 이 문서에서의 자리 |
|---|---|
| 소크라테스 (기원전 470?–399) | ‘X 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의 모양을 세웠다 |
| 갈릴레오 갈릴레이 (1564–1642) | 이 장의 사고실험 예. 낙하에 대한 견해를 상상만으로 무너뜨렸다 |
| 콰인 (1908–2000) | 낱말의 뜻과 세상에 대한 사실의 구분을 문제 삼았다. 10장에서 다시 나온다 |
| 굿맨 (1906–1998) | 규칙과 개별 판단이 서로를 고친다는 발상. 8장에서 다시 나온다 |
| 롤스 (1921–2002) | 그 발상에 반성적 평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20장의 주역이다 |
| 게티어 (1927–2021) | 5장에서 다룰 반례를 내놓았다 |
다음 장은 이 장이 세운 도구 가운데 하나를 실제로 쓸 수 있게 만든다. 논증으로 한다고 했는데, 남의 글에서 논증을 어떻게 꺼내는가. 꺼낸 논증을 어떤 순서로 검사하는가. 그리고 "그건 오류다"라는 말은 언제 판정이고 언제 그냥 딱지 붙이기인가.
이 장의 출처
아래는 이 장을 쓰면서 확인한 자료다. 이 문서는 어느 것도 옮기지 않았다.
- SEP — Analysis (개념 분석의 역사와 그 곤란)
- SEP — Thought Experiments
- SEP — Reflective Equilibrium
- SEP — Experimental Philosophy
논증을 다루는 기술
3장은 철학이 논증으로 굴러간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 글에는 논증이 번호를 달고 나오지 않는다. 문단 안에 섞여 있고, 중요한 전제일수록 말해지지 않은 채 깔려 있다. 이 장은 그 상태의 글에서 논증을 꺼내고 검사하는 기술을 다룬다.
이 장에서 답할 질문은 넷이다.
- 산문 한 문단을 어떻게 번호 붙인 전제와 결론으로 옮기는가.
- 글쓴이가 말하지 않은 전제를 어떻게 찾고, 무엇을 채워 넣어도 되는가.
- 남의 논증을 어느 정도로 강하게 읽어 주어야 하는가.
- "그건 오류다"라는 말은 언제 판정이고 언제 딱지 붙이기인가.
3장에서 가져오는 것은 셋이다. 타당·건전·반례의 뜻, 연역과 귀납의 구별, 그리고 논증 형식을 적는 표기
이 장의 마지막 절은 비형식 오류를 다룬다. 논리학 문서 3장이 일곱 개의 이름만 적어 두고 "형식으로 잡히지 않기 때문에 다루지 않는다"고 하며 넘긴 것들이다. 여기서 그 빚을 갚는데, 이름을 외우는 절로 만들지는 않는다. 각각에 대해 무엇이 깨지는가보다 언제는 깨지지 않는가에 더 많은 자리를 준다. 일곱 가운데 몇은 대부분의 경우 정당한 추론이고, 이름을 붙이는 행위 자체가 흔히 남용되는 수사이기 때문이다.
재구성 — 산문에서 논증을 꺼낸다
재구성(reconstruction)은 글에 흩어져 있는 주장을 번호 붙인 전제와 결론으로 옮겨 적는 작업이다. 이 장에서 가장 실용적인 기술이고, 나머지 절이 전부 이 작업 위에 올라간다.
절차는 일곱 걸음이다. 순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 결론을 찾는다. 이 글이 나를 무엇에 설득하려 하는가. '따라서', '그러므로' 뒤를 먼저 보되, 표시가 없는 글이 더 많다.
- 결론과 무관한 문장을 걷어낸다. 배경 설명, 같은 말의 반복, 예시, 감정을 싣는 표현. 걷어낸 것은 지우지 말고 따로 적어 둔다.
- 남은 문장을 주장 하나씩으로 쪼갠다. "A 이고 B 이므로"는 전제 두 개다.
- 번호를 붙여 줄 세운다. (P1) (P2) … 아래 가로선, 그 아래 (C).
- 중간 결론을 표시한다. 어떤 문장이 다른 전제에서 나오고 또 다른 것의 전제가 되면 논증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 빠진 고리를 채운다. 다음 절의 일이다.
- 다시 읽고 자비의 원리로 점검한다. 글쓴이가 이 재구성을 보고 "내 말이 맞다"고 할 것인가.
두 번째 걸음에서 가장 많이 실수한다. 수사와 전제를 가르는 기준은 없애면 논증이 약해지는가 하나다. 없애도 결론을 받아들일 이유가 그대로면 그것은 전제가 아니다. 반대로 감정을 싣는 표현이라고 무조건 걷어내면 안 된다. "끔찍한 일"이라는 말이 "그 일은 큰 해를 끼친다"는 전제를 나르고 있을 수 있다.
재구성은 남의 말을 바꾸는 일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바꿨는지 남겨야 한다. 걷어낸 문장, 채워 넣은 전제, 나눠 놓은 문장 셋을 표시해 두면 상대가 "그건 내 말이 아니다"라고 할 때 어디를 고칠지 바로 찾을 수 있다.
숨은 전제를 찾는다
앞 절의 두 예제에서 모두 구멍이 나왔다. 이것이 예외가 아니다. 실제 논증은 거의 언제나 전제 일부를 말하지 않는다. 당연해 보이는 것을 매번 적으면 글이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말해지지 않은 전제를 숨은 전제라 한다. 찾는 방법은 이렇다. 전제에서 결론으로 건너뛰는 자리를 짚고, 그 자리를 메우려면 무엇이 참이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다만 아무 문장이나 채워 넣을 수는 없다. 후보는 두 관문을 지나야 한다.
- 관문 1 — 이것을 넣으면 건너뛰는 자리가 메워지는가. 메워지지 않으면 채워 넣을 이유가 없다.
- 관문 2 — 글쓴이가 이것을 실제로 받아들일 만한가. 받아들이지 않을 문장을 넣으면 상대가 하지 않은 말을 떠안기는 것이 된다.
관문을 지나는 후보가 여럿이면 가장 약한 것을 고른다. 앞 절의 자전거 도로 논증에서 구멍을 메우는 후보는 여럿이다. "자전거 도로는 언제나 사고를 없앤다"도 메우고, "자전거 도로를 놓으면 사고가 줄어든다"도 메운다. 앞의 것을 골라 "언제나 없애지는 않는다"고 공격하는 것은 상대의 논증을 대신 약하게 만든 다음 때리는 일이다.
숨은 전제를 찾는 일이 왜 남는 일인가. 논쟁이 풀리지 않을 때 어긋난 자리가 대개 여기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오간 문장이 아무리 명확해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숨은 전제를 깔고 있으면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그 전제를 꺼내 놓는 순간 다툼이 처음으로 같은 자리에서 벌어진다.
자비의 원리 — 가장 강한 형태로 읽는다
앞 절의 규칙 뒤에는 더 일반적인 원칙이 있다. 자비의 원리(principle of charity)다. 남의 논증을 여러 가지로 읽을 수 있을 때, 가장 강한 읽기를 택한다. 가장 그럴듯하고, 가장 방어하기 쉽고, 가장 반박하기 어려운 읽기를 고른다는 뜻이다.
자비의 원리는 예의의 문제가 아니다. 두 가지 실용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 약한 읽기를 무너뜨려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상대는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하면 되고,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강한 읽기를 무너뜨려야 상대가 물러설 이유가 생긴다.
둘째, 강한 읽기를 만들다 보면 자기 입장이 틀렸음을 발견하기도 한다. 상대 논증을 가장 좋은 형태로 세워 보는 것은 자기 생각을 검사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반대편 실패가 허수아비(straw man)다. 상대의 주장을 약한 형태로 고쳐 놓고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름 그대로, 허수아비는 쓰러뜨려도 사람이 쓰러지지 않는다.
자비의 원리에도 한계가 있다. 상대가 지지할 수 없는 판본까지 밀어 올리면 그것도 주장을 바꿔치기한 것이다. 상대의 말을 훨씬 더 정교한 이론으로 갈아 끼운 뒤 그 이론을 논박하거나 옹호하면, 정작 상대가 한 말은 다뤄지지 않은 채 남는다. 자비의 원리가 가리키는 곳은 "가장 강한 아무 주장"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말로 볼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다.
실전에서는 이렇게 한다. 강하게 읽은 판본을 적고, 그 판본이 상대의 것이 맞는지 물어본다. 물어볼 수 없는 상황이면 "이 글은 이렇게 읽을 때 가장 강해진다. 다르게 읽어야 한다면 밝혀 달라"고 적어 둔다. 그렇게 적어 두면 잘못 읽었을 때 고칠 수 있고, 허수아비라는 비난도 받지 않는다.
비형식 오류 — 왜 나쁘고 언제는 나쁘지 않은가
이제 논리학 문서 3장이 이름만 적어 두고 넘긴 일곱을 받는다. 허수아비, 인신공격, 선결문제 요구, 성급한 일반화, 거짓 딜레마, 권위 호소, 미끄러운 비탈이다.
이 절의 방침을 먼저 밝힌다. 일곱 가운데 어느 것도 "이 모양이면 나쁘다"는 규칙이 아니다. 각각은 논증을 검사할 때 던지는 물음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 걸리는 흔한 방식이고, 같은 모양이라도 그 물음을 통과하면 좋은 논증이다. 그래서 이 절은 이름을 외우게 하는 대신 어느 물음에서 걸리는지와 언제는 걸리지 않는지를 적는다.
재구성이 끝난 논증에 던지는 물음은 다섯이다. 앞으로 이것을 관문이라 부른다. 다음 절에서 이 다섯을 순서 있는 절차로 묶는다.
- 결론과 전제를 제대로 짚었는가. 글쓴이가 이 재구성에 동의하겠는가.
- 전제 하나하나가 결론과 관련이 있는가. 빼도 결론을 받아들일 이유가 그대로면 그 전제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
- 전제가 결론을 얼마나 뒷받침하는가. 연역으로 읽으면 타당한가. 귀납으로 읽으면 얼마나 강한가.
- 전제 하나하나를 받아들일 이유가 있는가. 여기서부터는 논리가 아니라 그 분야의 지식이 답한다.
- 아직 결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이유가 되는가.
상대를 잘못 겨눈 둘 — 허수아비와 인신공격
허수아비는 앞 절에서 다뤘다. 깨지는 것은 첫째 관문이다. 무너뜨린 것이 상대의 결론이 아니다.
허수아비가 아닌 경우가 있다. 상대의 주장이 정말로 그 약한 형태일 때, 그리고 널리 퍼진 판본을 대상으로 삼는다고 밝히고 그렇게 할 때다. 어떤 입장에는 정교한 판본과 거친 판본이 함께 돌아다니고, 거친 판본이 실제로 더 널리 쓰이는 일이 있다. 그 판본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 다만 "이 비판은 거친 판본에만 닿는다"고 적어야 한다. 적지 않으면 정교한 판본을 지지하는 사람에게는 허수아비가 된다.
인신공격(ad hominem)은 주장 대신 그 주장을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다. 깨지는 것은 둘째 관문이다. 사람의 성질이 전제로 들어와 있는데 그것이 결론과 관련이 없다.
그런데 관련이 생기는 자리가 있다. 상대가 논증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증언을 내놓은 경우다. "내가 봤는데 그랬다"가 근거의 전부라면, 그 사람이 믿을 만한지는 곧바로 관련이 있다.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 그 분야를 모른다는 것, 이 결론으로 이익을 본다는 것은 모두 정당한 반론이다. 법정에서 증인의 신빙성을 다투는 것이 인신공격이 아닌 이유가 이것이다.
헷갈리는 사례 하나. 담배 회사가 돈을 댄 연구가 담배의 해로움을 낮게 보고했다고 하자. 두 가지 반응이 있다.
- "후원자가 담배 회사이니 그 결론은 거짓이다" — 인신공격이다. 후원자가 누구든 결론의 참·거짓은 자료가 정한다.
- "후원자가 담배 회사이니 이 보고를 증거로 받아들이기 전에 자료와 방법을 따로 확인해야 한다" — 정당하다. 증언으로서의 무게를 낮춘 것이지 결론을 거짓이라 한 것이 아니다.
두 문장의 차이가 이 절 전체의 요령이다. 결론을 거짓이라 하면 오류이고, 증거로서의 무게를 조정하면 오류가 아니다.
전제를 겨눈 둘 — 거짓 딜레마와 권위 호소
거짓 딜레마(false dilemma)는 선택지가 둘뿐인 것처럼 내놓는 것이다. 깨지는 것은 넷째 관문이다. "A 이거나 B 다"라는 전제가 거짓이다.
선택지가 정말로 둘뿐이면 딜레마는 거짓이 아니다. "
그리고 이 오류를 지적하는 쪽도 부담을 진다. "제3의 길이 있다"고 말하기만 하고 그 길이 무엇인지 대지 않으면 반론이 되지 않는다. 거짓 딜레마라는 지적은 셋째 선택지를 실제로 내놓아야 완성된다.
권위 호소(appeal to authority)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대개 정당하다. 우리가 아는 것의 대부분은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 아는 사람에게 들은 것이다. 권위 호소를 원칙적으로 배격하면 남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무엇에나 정당한 것은 아니다. 권위 호소 안에는 다시 네 관문이 있다. 그 사람이 해당 분야의 전문가인가. 지금 자기 분야 안에서 말하고 있는가. 그 분야에 대체로 합의가 있는가. 이 결론으로 이익을 보지는 않는가. 넷을 다 지나면 결론을 믿을 좋은 이유가 된다. 다만 연역이 아니라 귀납이므로 결론이 보증되지는 않는다. 전문가도 틀린다.
이 가운데 셋째 것이 이 문서와 곧바로 이어진다. 철학의 많은 물음에는 전문가들 사이의 합의가 없다. 그래서 이 문서는 "어느 철학자가 이렇게 말했다"를 근거로 쓰지 않고, 3장의 세 등급으로 무게를 표시한 다음 논증 자체를 보여 준다.
헷갈리는 사례 하나. 어떤 물리학자가 영양학에 대해 말한다. 권위 호소의 첫째 관문에서 걸린다. 그런데 그 물리학자가 영양학 논문을 여러 편 낸 사람이라면 걸리지 않는다. 관문이 묻는 것은 직함이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한 전문성이다.
뒷받침의 세기를 겨눈 둘 — 성급한 일반화와 미끄러운 비탈
성급한 일반화(hasty generalization)는 표본이 결론의 범위를 받치지 못하는 것이다. 깨지는 것은 셋째 관문이다. 귀납의 강도가 모자란다.
사례 하나로 충분한 경우가 있다. 첫째, 전칭 주장을 반박할 때다. "모든 백조는 희다"는 검은 백조 한 마리로 끝난다. 이때 사례 하나로 결론을 내는 것은 성급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것이다. 둘째, 대상이 균질하다고 알려진 경우다. 순수한 물질의 시료 한 방울로 그 물질의 성질을 말하는 것은 성급하지 않다. 셋째, 사례가 기제를 드러내는 경우다. 사고 한 건이 설계 결함을 드러내면, 그 결함을 공유하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헷갈리는 사례 하나. 어떤 약을 먹은 환자 한 명에게 심각한 부작용이 났다.
- "그러므로 이 약은 위험하다" — 표본 하나로 확률을 말했다. 성급하다.
- "그러므로 이 약의 안전성을 다시 검사해야 한다" — 성급하지 않다. 여기서 결론은 확률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주장이고, 나쁜 결과가 큰 경우에는 사례 하나로도 행동을 바꿀 이유가 된다.
미끄러운 비탈(slippery slope)은 A 를 허용하면 결국 Z 까지 간다고 몰아가는 것이다. 깨지는 것 역시 셋째 관문이다. 고리가 여러 개 이어질 때 각 고리가 확실하지 않으면 전체는 훨씬 더 불확실해지는데, 그것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
그런데 실제로 미끄러운 비탈이 있다. 고리마다 왜 다음 단계로 가는지 기제를 댈 수 있으면 정당한 귀납 논증이다. 기제의 예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법에서 판례가 다음 판단을 구속하는 경우. 어떤 예외를 허용하면 그 예외를 요구할 유인이 실제로 커지는 경우. 그리고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할지에 대한 원칙이 없어서 한 걸음마다 같은 논리가 되풀이되는 경우.
헷갈리는 사례 하나. "여기에 선을 그을 원칙적인 이유가 없으므로 첫걸음도 안 된다"는 논증. 이것은 미끄러운 비탈처럼 보이지만 성격이 다르다. 선을 그을 수 없다는 것만으로는 미끄러진다는 것이 확립되지 않는다. 어른과 아이 사이에 명확한 선이 없다고 해서 어른과 아이의 구별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선이 없다는 것과 실제로 굴러떨어진다는 것은 다른 주장이고, 뒤의 것에는 따로 근거가 필요하다.
이유가 되는가를 겨눈 하나 — 선결문제 요구
선결문제 요구(begging the question)는 결론을 전제 안에 이미 넣어 놓은 것이다. 깨지는 것은 다섯째 관문이다.
여기서 흔한 오해를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선결문제 요구를 저지른 논증은 대개 타당하다. 전제가 결론을 담고 있으니 전제가 참이면 결론이 참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나쁜 이유는 논증이 하려던 일을 못 하기 때문이다. 논증은 아직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에게 이유를 주는 것인데, 이미 결론을 받아들인 사람만 전제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아무에게도 이유를 주지 못한다.
그래서 이 오류는 청중에 상대적이다. 같은 논증이 어떤 자리에서는 선결문제 요구이고 다른 자리에서는 아니다. 전제를 이미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전제로부터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정상적인 추론이다.
그리고 모든 논증은 어디선가 전제를 받아들이고 시작한다. 전제가 결론을 논리적으로 함축한다는 것만으로 순환이라고 하면 타당한 논증이 전부 순환이 된다. 그래서 이 지적은 "전제와 결론이 겹친다"가 아니라 "이 자리의 상대는 그 전제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형태로 해야 한다.
헷갈리는 사례 하나. 8장에서 볼 문제다. 귀납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지금까지 귀납이 잘 통해 왔으니까"로 옹호하면 선결문제 요구다. 지금까지 잘 통했다는 것에서 앞으로도 통한다는 것으로 가려면 이미 귀납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이 순환을 피할 수 있는지가 8장의 주제이고, 피할 수 있다는 데 합의가 없다.
오류 이름 붙이기라는 수사
마지막으로 이 절 전체를 겨누는 경고 하나. 오류의 이름을 대는 것 자체가 흔히 남용된다.
세 가지를 구별해야 한다.
첫째, 이름은 판정이 아니다. "그건 허수아비다"는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말이다. 판정이 되려면 상대의 주장이 무엇이었고 당신이 무엇을 공격했고 둘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야 한다. 이름은 그 작업을 가리키는 딱지이지 그 작업의 대체물이 아니다.
둘째, 오류를 짚어도 상대의 결론은 남는다. 논증이 나쁘다는 것과 결론이 거짓이라는 것은 다른 주장이다. 상대의 논증을 무너뜨리고 "그러므로 당신이 틀렸다"로 가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논증이고, 논리학 문서 3장이 이것을 오류에 호소하기라고 부른다.
셋째, 이름은 대화를 끝내는 데 쓰인다. 이름을 붙이면 상대의 말을 더 읽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자비의 원리와 정반대 방향이다. 실제로 어떤 논증이 오류인지 아닌지는 앞에서 본 것처럼 거의 언제나 맥락에 달려 있고, 맥락을 따지려면 상대의 말을 더 읽어야 한다.
실전에서 쓸 만한 습관 하나. 이름을 대기 전에 깨진 관문을 먼저 말한다. "권위 호소" 대신 "그분은 이 분야 전문가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가 반박할 자리가 생기고 — 사실은 전문가일 수도 있다 — 논의가 이어진다. 이름만 던지면 반박할 자리가 없고 그래서 논의가 멈춘다.
| 이름 | 어느 관문이 깨지는가 | 언제는 깨지지 않는가 |
|---|---|---|
| 허수아비 | 공격한 것이 상대의 결론이 아니다 | 널리 퍼진 판본을 대상으로 삼는다고 밝히고 그렇게 할 때 |
| 인신공격 | 사람의 성질이 결론과 관련이 없다 | 근거가 그 사람의 증언일 때. 신빙성은 관련이 있다 |
| 성급한 일반화 | 표본이 결론의 범위를 받치지 못한다 | 전칭 주장을 반박할 때, 대상이 균질할 때, 기제가 드러날 때 |
| 미끄러운 비탈 | 고리마다의 연결 기제를 대지 못한다 | 판례 구속·유인 변화·경계 원칙의 부재 같은 기제를 댈 수 있을 때 |
| 거짓 딜레마 | 선택지를 둘로 좁힌 전제가 거짓이다 | 정말로 배타적이고 남김없는 이분법일 때 |
| 권위 호소 | 전문성·분야·합의·이해관계 네 관문 가운데 하나를 못 채운다 | 넷을 다 채울 때. 우리가 아는 것의 대부분이 이 경로다 |
| 선결문제 요구 | 이 자리의 상대가 전제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 전제를 이미 공유하는 청중 앞에서 그 전제로부터 끌어낼 때 |
논증을 평가하는 절차
앞 절의 다섯 관문을 순서 있는 절차로 묶는다. 재구성이 끝난 논증에 차례로 던지고, 걸리는 자리에서 멈춰 판정문을 적는다.
| 걸린 관문 | 그때 적는 판정문 | 상대에게 남는 일 |
|---|---|---|
| ① 제대로 짚었는가 | 이것은 상대의 논증이 아니다 | 없다. 재구성부터 다시 하는 것은 이쪽 일이다 |
| ② 관련이 있는가 | 그 전제는 결론과 상관이 없다 | 왜 관련이 있는지 대거나 그 전제를 뺀다 |
| ③ 얼마나 뒷받침하는가 | 전제가 다 참이어도 결론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 | 빠진 전제를 대거나 결론을 약하게 고친다 |
| ④ 전제를 받아들일 이유가 있는가 | 짜임은 성하고 전제 하나가 의심스럽다 | 그 전제를 옹호하거나 다른 전제로 간다 |
| ⑤ 상대에게 이유가 되는가 | 타당하지만 이유가 되지 못한다 | 결론에 기대지 않는 전제를 새로 찾는다 |
순서를 지키면 시간을 아낀다. 셋째에서 걸리는 논증은 넷째를 따질 필요가 없고, 첫째에서 걸리는 논증은 나머지 넷을 따져 봐야 헛일이다.
셋째 관문에서 "따라 나오지 않는다"고 적을 때는 반례를 실제로 내놓아야 한다. 전제를 모두 참으로 만들면서 결론을 거짓으로 만드는 상황 하나를 손에 쥐고 있어야 판정이 선다. 짜임에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논리학 문서 3장이 이 점을 다룬다 — 어떤 논증이 부당한 형식의 대입례라는 것만으로는 그 논증이 부당함을 확립하지 못한다.
그리고 판정문을 정확히 적는 습관이 이 절의 핵심이다. 표의 가운데 칸을 다시 보라. 다섯 어디서 걸리든 얻는 결론은 "이 논증은 결론을 뒷받침하지 못한다"이지 "결론이 거짓이다"가 아니다. 뒤의 것을 주장하려면 결론을 겨냥한 별도의 논증이 필요하다.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 용어·절차 | 뜻 |
|---|---|
| 재구성(reconstruction) | 산문에 흩어진 주장을 번호 붙인 전제와 결론으로 옮겨 적는 작업 |
| 재구성 일곱 걸음 | 결론 찾기 → 걷어내기 → 쪼개기 → 번호 붙이기 → 중간 결론 표시 → 숨은 전제 채우기 → 자비 점검 |
| 중간 결론 | 다른 전제에서 나오면서 동시에 다른 것의 전제가 되는 문장. 논증이 여러 단임을 뜻한다 |
| 숨은 전제 | 글에 없지만 논증이 서려면 필요한 전제. 두 관문을 지나야 채워 넣을 수 있다 |
| 숨은 전제의 두 관문 | ① 건너뛰는 자리를 메우는가 ② 글쓴이가 받아들일 만한가. 여럿이면 가장 약한 것을 고른다 |
| 자비의 원리(principle of charity) | 여러 읽기가 가능할 때 가장 강한 읽기를 택한다. 다만 상대가 지지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
| 허수아비(straw man) | 상대의 주장을 약한 형태로 고쳐 놓고 무너뜨리는 것 |
| 인신공격(ad hominem) | 주장 대신 말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 증언을 다루는 자리에서는 정당하다 |
| 선결문제 요구(begging the question) | 결론을 이미 받아들인 사람만 전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논증. 청중에 상대적이다 |
| 성급한 일반화(hasty generalization) | 표본이 결론의 범위를 받치지 못하는 것 |
| 거짓 딜레마(false dilemma) | 선택지를 둘로 좁힌 전제가 거짓인 것 |
| 권위 호소(appeal to authority) | 권위를 전제로 쓰는 것. 네 관문을 지나면 정당한 귀납 논증이다 |
| 권위 호소의 네 관문 | 전문성 · 분야 안인가 · 그 분야에 합의가 있는가 · 이해관계가 없는가 |
| 미끄러운 비탈(slippery slope) | 첫걸음이 끝까지 간다고 몰아가는 것. 고리마다 기제를 대면 정당하다 |
| 오류에 호소하기 | 상대 논증이 나쁘다는 것에서 상대 결론이 거짓이라고 결론짓는 것. 그 자체가 나쁜 논증이다 |
| 평가 다섯 관문 | ① 제대로 짚었는가 ② 관련이 있는가 ③ 얼마나 뒷받침하는가 ④ 전제를 받아들일 이유가 있는가 ⑤ 상대에게 이유가 되는가 |
이 장으로 도구가 갖춰졌다. 다음 장부터는 이 도구를 실제 문제에 대어 본다. 첫 문제는 앎이다. 무엇을 갖추면 안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오래된 분석안 하나를 세우고, 3장에서 본 방식대로 반례를 대어 무너뜨리는 장면을 처음으로 보게 된다.
이 장의 출처
아래는 이 장을 쓰면서 확인한 자료다. 이 문서는 어느 것도 옮기지 않았다.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장에서 답할 질문은 하나다.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곁들여 하나 더 묻는다. 그 조건을 적어 보려던 시도가 왜 실패했는가.
3장에서 개념 분석이 무엇인지, 반례가 그것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보았다. 이 장은 그 도구를 실제 물음에 처음으로 대어 보는 자리다. 다루는 개념은 '안다' 이고, 무너지는 분석은 오래 이어져 온 후보이며, 무너뜨리는 반례는 세 쪽짜리 논문 하나다. (흔히 플라톤까지 거슬러 잡지만, 그 계보 자체가 최근 다투어진다.)
앞 장에서 가져오는 것은 넷이다.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구별, "X 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 이라는 개념 분석의 형태, 반례가 하는 일, 그리고 사고실험에서 나오는 직관을 논증의 전제로 쓰는 방식이다. 논증을 번호 붙여 줄 세우는 4장의 재구성 방식도 그대로 쓴다.
이 장은 3장이 소개한 세 등급 가운데 정설과 미결이 한 장 안에 함께 있는 드문 경우다. 게티어 사례가 낡은 분석을 무너뜨렸다는 데는 사실상 다툼이 없고, 그것을 무엇으로 대신할지에는 합의가 없다. 두 부분을 섞어 읽지 않도록 절을 나누어 두었다.
앎이라고 부르는 것 세 가지
한국어 '안다' 는 서로 다른 세 가지에 붙는다. 셋을 갈라 두지 않으면 첫 문단부터 논의가 어긋난다.
| 부르는 이름 | 무엇에 붙는가 | 보기 |
|---|---|---|
| 능력적 앎 | 할 줄 아는 것 | 자전거를 탈 줄 안다. 한국어를 안다 |
| 친숙에 의한 앎 | 겪어 보아 익숙한 것 | 그 사람을 안다. 서울을 안다 |
| 명제적 앎 | 그러하다는 것 | 문이 잠겼다는 것을 안다 |
가르는 시험은 간단하다. '…라는 것을 안다' 로 바꿔 써서 뜻이 그대로면 명제적 앎이다. "자전거를 탈 줄 안다" 를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것을 안다" 로 바꾸면 다른 말이 된다. 앞은 탈 수 있다는 뜻이고 뒤는 자기 능력에 대해 무언가를 믿는다는 뜻이다.
인식론이 명제적 앎만 다루는 데는 이유가 있다. 명제적 앎의 대상만 참이거나 거짓이다. 자전거 타는 능력은 참도 거짓도 아니므로 "참인 것을 아는가" 를 물을 수 없고, "그렇게 믿을 근거가 있는가" 도 물을 수 없다. 이 장에서 '앎' 은 언제나 명제적 앎을 가리킨다.
앎을 세 조건으로 쪼개기
오래 이어져 온 후보 분석은 이것이다.
갑이 P 를 안다는 것은, 다음 셋이 모두 성립한다는 것이다.
- 믿음 — 갑이 P 라고 믿는다.
- 참 — P 가 참이다.
- 정당화 — 갑이 P 를 믿는 것이 정당화되어 있다.
이 셋을 묶어 정당화된 참인 믿음(justified true belief)이라 하고, 앞 글자를 따 JTB 라 부르기도 한다. 3장의 형태로 적으면 "갑이 P 를 알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이 셋을 모두 만족하는 것" 이라는 주장이다.
주장이 두 방향을 함께 말한다는 데 주의하자. 셋이 필요하다는 것과 셋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절은 앞쪽을 확인하고, 다음 절이 뒤쪽을 무너뜨린다.
세 조건이 왜 각각 필요한가
믿음. 시험에서 정답을 적었지만 스스로는 찍었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 답을 안다고 하지 않는다. 스스로 참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자리는 없다.
참. 거짓을 안다고 하지 않는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아무리 확신을 가지고 근거를 대어도, 그것이 거짓인 이상 그는 안 것이 아니라 잘못 믿은 것이다. 이 조건은 앎이 믿는 사람에 관한 사실만으로는 정해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계가 어떠한지가 함께 들어간다.
정당화. 아무 근거 없이 찍었는데 우연히 맞은 사람은 안다고 하지 않는다. 동전을 던져 내일 비가 온다고 정하고, 실제로 비가 왔다고 하자. 믿었고 참이었지만 안 것은 아니다.
세 번째 조건은 앞의 둘보다 다루기 까다롭다. 정당화가 정확히 무엇인지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게 믿는 것이 인식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게 만드는 것" 정도로 잡아 두고 쓴다. 무엇이 그 일을 하는지 — 다른 믿음인가, 경험인가, 믿음을 만들어 낸 과정인가 — 는 6장이 통째로 맡는다.
낱말 하나를 미리 밝혀 둔다. 정당화가 진리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정당하게 믿었는데 거짓인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창밖이 젖어 있어 비가 왔다고 정당하게 믿었는데 사실은 청소차가 지나간 것일 수 있다. 이렇게 보는 입장을 가류주의(fallibilism)라 하고, 반대로 정당화가 거짓을 통과할 수 없어야 한다는 입장을 무오류주의(infallibilism)라 한다. JTB 분석은 가류주의를 전제로 서 있다. 이 틈이 다음 절의 전부다.
게티어 — 반례 하나가 분석을 무너뜨린다
1963년에 게티어가 세 쪽짜리 논문을 냈다. 3장에서 이름만 나왔던 그 반례다. 제목이 "정당화된 참인 믿음은 앎인가" 였고, 본문은 사례 둘이 거의 전부였다.
첫째 사례를 옮긴다. 갑과 을이 같은 자리에 지원했다. 인사 담당자가 갑에게 "을이 뽑힐 것" 이라고 말해 주었고, 갑은 조금 전에 을의 주머니에 동전이 열 개 있는 것을 직접 세어 보았다. 그래서 갑은 이렇게 믿는다.
- (ㄱ) 뽑히는 사람은 주머니에 동전이 열 개 있다.
갑의 근거는 튼튼하다. 담당자의 말과 자기 눈으로 센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뽑힌 사람은 을이 아니라 갑 자신이었고, 갑의 주머니에도 마침 동전이 열 개 있었다. 갑은 자기 주머니를 세어 본 적이 없어 그 사실을 모른다.
확인해 보자. (ㄱ)은 참이다. 갑은 (ㄱ)을 믿는다. 갑은 (ㄱ)을 믿을 정당한 근거를 가졌다. 세 조건이 다 갖춰졌다. 그런데 갑이 (ㄱ)을 알았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갑이 옳게 된 것은 갑이 댈 수 있는 근거와 아무 상관 없는 일 때문이다.
무엇이 어긋났는가
갑의 정당화는 "을이 뽑힌다" 를 거쳐 간다. 그 명제가 거짓이다. 그런데 거기서 (ㄱ)을 끌어내는 추론 자체는 타당하다 — 을이 뽑히고 을의 주머니에 동전이 열 개 있다면, 뽑히는 사람의 주머니에는 동전이 열 개 있다. 타당한 추론이므로 정당화가 그대로 옮겨 간다. 정당화가 거짓 명제를 통과할 수 있다는 것, 즉 앞 절의 가류주의가 이 사례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ㄱ)이 참이 된 것은 전혀 다른 경로다. 갑이 뽑혔고 갑의 주머니에 동전이 열 개 있었기 때문이다. 정당화가 가리키는 길과 명제를 참이게 만든 길이 갈라졌다. 그 틈으로 운이 들어온다. 이렇게 정당화와 진리 사이에 끼어드는 운을 인식적 운(epistemic luck)이라 부른다.
이것은 3장에서 배운 반례다
게티어가 한 일은 새로운 종류의 작업이 아니다. 주장이 금지한 조합을 실제로 하나 내놓은 것이고, 그것이 반례가 하는 일 전부다. 논리학에서 논증 형식에 대해 하던 일을 정의에 대해 했을 뿐이다.
무엇이 무너지고 무엇이 남는지를 정확히 적어 두자. 무너진 것은 충분 쪽이다. 세 조건을 갖추고도 앎이 아닌 경우가 있으므로 "셋이면 앎이다" 가 거짓이 된다. 남은 것은 필요 쪽이다. 앞 절에서 확인한 대로 셋은 여전히 각각 필요해 보인다. 그러니 게티어 이후의 작업은 대개 넷째 조건을 찾는 일이 된다.
이 판정은 3장의 세 등급 가운데 정설에 든다. 게티어 사례가 JTB 분석을 무너뜨린다는 데 사실상 다툼이 없다. 다툼은 다음 절에서 시작된다.
고쳐 보려는 시도들 — 그리고 각각이 걸리는 자리
넷째 조건을 찾는 일이 오래 이어졌다. 이 절은 대표적인 후보 여섯을 순서대로 보되, 각각을 무너뜨리는 것까지 함께 본다. 여기서부터는 3장의 세 등급 가운데 미결이다. 아래 어느 것도 정답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무오류 조건 — 정당화가 거짓을 통과할 수 없게 한다
가장 곧바로 떠오르는 수리다. 게티어 사례가 가능한 것은 정당화가 거짓 명제를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니, 통과할 수 없게 하면 된다. 정당화를 이렇게 강하게 잡는 것이 앞에서 이름을 준 무오류주의다.
이 수리는 확실히 통한다. 게티어 사례가 하나도 남지 않는다. 그런데 값이 크다. 아는 것이 거의 남지 않는다. 눈으로 본 것, 남에게 들은 것, 기억해 낸 것 — 이 가운데 거짓일 가능성이 완전히 닫힌 것은 없다. 잘못 보았을 수도, 잘못 들었을 수도, 잘못 기억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가 안다고 여기는 거의 전부가 앎이 아니게 된다.
이 길은 7장의 회의주의로 곧장 이어진다. 회의주의를 피하려고 세운 조건이 회의주의를 부르는 셈이다.
거짓 전제 없음 조건 — 그리고 가짜 헛간 들판
다음 후보는 더 얌전하다. 앎에 이르는 추론에 거짓 명제가 끼어 있지 않아야 한다. 게티어의 두 사례가 정확히 이 조건을 어긴다. 갑은 "을이 뽑힌다" 라는 거짓을 거쳐 갔다.
이 조건을 무너뜨리는 것이 가짜 헛간 들판 사례다. 널리 알려진 것은 앨빈 골드먼(Alvin Goldman)이 1976년 논문에서 논의한 형태이고, 골드먼 자신은 이 사례를 카를 기넷(Carl Ginet)에게서 얻었다고 밝혔다.
어떤 지역의 주민들이 도로변에 헛간 앞면만 세워 두었다. 정면에서 보면 진짜와 구별할 수 없다. 진짜 헛간은 그 들판에 하나뿐이다. 지나가던 사람이 하필 그 하나를 보고 "저기 헛간이 있다" 고 믿는다.
이 사람의 믿음은 참이고, 정당화되었고(눈으로 보았다), 거짓 전제를 거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안다고 하기 어렵다. 조건이 걸러 내지 못한다.
이 사례가 드러낸 것은 새로운 종류의 우연이다. 앞의 게티어 사례에서는 내가 거친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면, 여기서는 내가 거치지 않은 주변이 잘못되어 있다. 그것을 걸러 내려면 실제로 일어난 일만 볼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르게 되었을 경우까지 보아야 한다. 아래 두 조건이 그 방향이다.
인과 조건 — 사실이 믿음의 원인이어야 한다
골드먼이 그보다 앞서 내놓은 조건이다. 갑이 P 를 안다면 P 를 참이게 하는 사실이 갑의 믿음을 낳은 인과 사슬 안에 있어야 한다. 게티어 사례에서는 그렇지 않다. 갑이 뽑혔다는 사실은 갑의 믿음과 아무 인과적 연결이 없다.
이 조건은 두 곳에서 걸린다. 첫째, 원인을 가질 수 없는 명제가 있다. 수학적 참, 자연법칙, 미래에 대한 명제가 그렇다. 소수가 무한히 많다는 사실이 내 믿음의 원인일 수는 없다. 둘째, 가짜 헛간 사례에는 인과 연결이 있다. 진짜 헛간에서 나온 빛이 그 사람의 눈에 들어와 믿음을 만들었다. 그런데도 앎이 아니다.
무효화 요인 없음 조건
무효화 요인(defeater)은 이렇게 정의된다. 내가 그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 믿음을 더는 정당하게 유지할 수 없게 만드는 참인 명제다. 조건은 이렇다. 갑이 P 를 안다면 갑의 정당화에 대한 무효화 요인이 없어야 한다.
게티어 사례에는 그런 참이 실제로 있다. "을은 뽑히지 않는다" 가 그렇고, "동료는 차가 없다" 가 그렇다. 가짜 헛간 사례에도 있다 — "이 들판의 헛간은 거의 다 앞면뿐이다". 이 조건은 앞의 것들보다 넓게 걸러 낸다.
걸리는 자리는 오도하는 무효화 요인이다. 이런 사례가 있다. 내가 도서관에서 톰이 책을 훔쳐 나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런데 톰의 어머니가 "톰은 그날 멀리 있었고 톰과 똑같이 생긴 쌍둥이 형제가 있다" 고 말했다고 하자. 어머니의 말은 사실이 아니고, 어머니는 상태가 온전치 않다. 그래도 "톰의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다" 는 참이고, 내가 그것을 알게 되었다면 내 믿음은 흔들렸을 것이다. 정의대로라면 그것은 무효화 요인이고, 따라서 나는 톰이 훔친 것을 모른다고 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면 진짜 무효화 요인과 오도하는 무효화 요인을 갈라야 하는데, 그 규칙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다. 가르는 규칙을 "그 명제가 참이 아닌 것에 기대고 있으면 오도하는 것" 쯤으로 잡아 보아도, 어느 명제에 기대고 있는지를 정하는 일이 또 남는다. 넓게 잡으면 아는 것이 거의 없어지고 좁게 잡으면 게티어 사례가 새어 나온다.
민감성과 안전성 — 조금 다르게 되었을 경우를 본다
마지막 두 후보는 앞의 것들과 종류가 다르다. 실제로 일어난 일만 보지 않고 조금 다르게 되었을 경우에 무엇이 참이었을지를 본다.
그러려면 도구가 하나 필요하다. "만약 …였다면 …였을 것이다" 꼴의 문장을 반사실 조건문(counterfactual conditional)이라 한다. 앞부분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전제하고 던지는 조건문이다. "내가 그 열차를 탔다면 늦지 않았을 것이다" 가 그 예다. 이런 문장의 참·거짓을 무엇이 정하는지는 11장이 도구를 갖춰 다룬다. 여기서는 실제와 조금만 다른 경우를 떠올려 그 경우에 무엇이 참인지 본다는 어림만 쓴다. '조금만 다른' 이 어디까지인지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 — 이것이 두 조건 모두에서 약점이 된다.
민감성(sensitivity). 갑의 믿음이 민감하다는 것은, P 가 거짓이었다면 갑이 P 를 믿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안전성(safety). 갑의 믿음이 안전하다는 것은, 비슷한 경우에 갑이 그런 식으로 믿었다면 그때도 P 가 참이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두 문장이 서로 뒤집은 말처럼 보이지만 같은 말이 아니다. 보는 곳이 다르다.
두 조건 다 앞의 사례들을 잘 걸러 낸다. 게티어의 동전 사례에서 갑의 믿음은 민감하지 않다 — 뽑히는 사람의 주머니에 동전이 열 개 없었더라도 갑은 여전히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가짜 헛간 사례에서 그 사람의 믿음은 안전하지 않다 — 조금만 다른 쪽을 보았다면 같은 방식으로 거짓을 믿었을 것이다.
걸리는 자리도 각각 있다. 민감성은 7장에서 폐쇄 원리를 잃는다. 아는 것에서 따라 나오는 것을 모를 수 있게 된다는 뜻인데, 그 값이 작지 않다. 안전성은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 앞에서 헛돈다. 어떤 경우에도 참인 명제는 어떻게 믿든 자동으로 안전하므로, 엉터리 방법으로 믿어도 조건을 통과한다. 그리고 두 조건 모두 '가까운 경우' 의 범위를 정하는 규칙이 없다는 문제를 함께 안는다.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 용어 | 뜻 |
|---|---|
| 명제적 앎 / 능력적 앎 / 친숙에 의한 앎 | 그러하다는 앎 / 할 줄 아는 앎 / 겪어 보아 아는 앎. 인식론은 첫째만 다룬다 |
| 믿음(belief) | 어떤 명제를 참이라고 여기는 것 |
| 정당화(justification) | 그렇게 믿는 것이 인식적으로 나무랄 데 없게 만드는 것. 무엇이 그 일을 하는지는 6장 |
| 정당화된 참인 믿음(JTB) | 믿음 · 참 · 정당화 세 조건. 앎의 오랜 후보 분석 |
| 가류주의(fallibilism) | 정당화가 진리를 보증하지 않는다는 입장. JTB 는 이것을 전제한다 |
| 무오류주의(infallibilism) | 정당화가 거짓을 통과할 수 없어야 한다는 입장 |
| 게티어 사례(Gettier case) | 세 조건을 다 갖추고도 앎이 아닌 사례. JTB 의 충분 쪽을 무너뜨린다 |
| 인식적 운(epistemic luck) | 정당화와 진리 사이에 끼어드는 우연 |
| 거짓 전제 없음 조건 | 앎에 이르는 추론에 거짓 명제가 없어야 한다는 조건 |
| 인과 조건 | 명제를 참이게 하는 사실이 믿음의 원인이어야 한다는 조건 |
| 무효화 요인(defeater) | 알게 되었다면 그 믿음을 정당하게 유지할 수 없게 만드는 참인 명제 |
| 민감성(sensitivity) | P 가 거짓이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라는 조건 |
| 안전성(safety) | 비슷한 경우에 그런 식으로 믿었다면 참이었을 것이라는 조건 |
| 반사실 조건문 | ‘만약 …였다면 …였을 것이다’ 꼴의 문장. 참·거짓을 정하는 방법은 11장 |
| 가짜 헛간 들판 | 거짓 전제 없이도 앎이 아닌 사례. 조건들을 두 무리로 가른다 |
사람으로는 게티어와 골드먼이 나왔다. 입장으로는 가류주의와 무오류주의가 나왔고, 넷째 조건 후보 여섯이 각각의 반례와 함께 나왔다.
이 장은 정당화라는 낱말을 계속 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하지 않았다. 다음 장이 그 물음을 받는다. 무엇이 믿음을 정당화하는가, 그리고 그 근거는 또 무엇이 정당화하는가.
이 장의 출처
아래는 이 장을 쓰면서 확인한 자료다. 이 문서는 어느 것도 옮기지 않았다.
- SEP — The Analysis of Knowledge (JTB 와 게티어 이후의 지도)
- SEP — Epistemology
- Edmund Gettier,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 (1963) — 세 쪽짜리 원문
정당화의 구조
앞 장은 정당화라는 낱말을 계속 쓰면서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하지 않았다. 이 장이 그 빚을 갚는다. 답할 질문은 둘이다. 무엇이 믿음을 정당화하는가. 그리고 그 정당화하는 것은 또 무엇이 정당화하는가.
둘째 질문이 이 장의 전부라고 해도 된다. 첫째 질문에 어떻게 답하든 둘째 질문이 곧바로 따라붙고, 그것을 어떻게 막느냐로 입장이 갈린다.
5장에서 가져오는 것은 셋이다. 정당화 조건이 앎에 필요하다는 것, 정당화가 진리를 보증하지는 않는다는 것(가류주의), 그리고 무오류 조건을 세게 걸면 아는 것이 거의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논증을 (P1) (P2) … (C) 로 줄 세우는 4장의 방식도 계속 쓴다.
미리 밝혀 둔다. 이 장에서 나오는 세 입장 — 토대론, 정합론, 신빙론 — 가운데 어느 것도 자리를 잡지 못했다. 3장의 세 등급으로는 미결이다. 그러니 이 장은 정답을 고르는 대신 각 입장이 무엇을 설명하려고 그렇게 말하는지, 그 대가로 무엇을 내놓는지를 적는다. 그 거래를 읽어 내는 것이 이 장의 목표다.
왜 물음이 자꾸 뒤로 물러나는가
어떤 믿음이든 붙잡고 "왜 그렇게 믿는가" 를 물어 보자. 대답이 나오면 그 대답에 다시 같은 물음을 던진다. 이 일을 계속하면 어떻게 되는가.
실제로 해 보면 이렇게 된다.
- "아홉 시 기차가 있다." — 왜?
- "시간표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 그 시간표가 맞다고 왜 믿는가?
- "역에서 붙인 것이고 역은 시간표를 제대로 붙인다." — 그것은 왜 믿는가?
- "여태 어긋난 적이 없었다." — 여태 어긋난 적이 없다는 것은 왜 믿는가?
세 번 만에 대답이 궁해진다. 그런데 이것은 이 사람이 준비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어떤 믿음에서 시작해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물음이 믿음의 내용을 건드리지 않고 언제나 한 칸 뒤로 물러나기 때문이다.
문제를 정확히 세우기 위해 논증으로 줄 세운다.
- (P1) 어떤 믿음이 정당화되려면 그 믿음을 정당화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 (P2) 믿음을 정당화하는 것은 다른 믿음이다.
- (P3) 다른 믿음이 무언가를 정당화하려면 그 믿음 자신이 정당화되어 있어야 한다.
- (C) 따라서 어떤 믿음이 정당화되려면 정당화된 믿음의 사슬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후퇴 논증(regress argument)이라 한다. 결론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다. 이상해지는 것은 그 사슬이 어떻게 생겼는지 물을 때다. 가능한 모양이 셋뿐이다. 끝없이 이어지거나, 어디선가 멈추거나, 앞에 나온 믿음으로 되돌아온다.
셋이 다 이상해 보인다는 것이 문제다. 끝없이 이어지자니 유한한 사람이 무한한 근거를 가질 수 없어 보이고, 멈추자니 근거 없이 정당화되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렵고, 되돌아오자니 자기가 자기를 받치는 꼴이 된다.
이 세 갈래는 오래된 것이다. 고대 회의주의자들의 논변을 전하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의 기록에 이미 무한 후퇴·가정·순환이 함께 나온다. 흔히 아그리파의 세 갈래라 부르고, 뒤에 붙은 뮌히하우젠 트릴레마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넷째 길이 있다. 그런 사슬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회의주의이고 7장이 다룬다.
무한주의 — 정말로 끝나지 않는다
첫째 갈래를 그대로 받는 입장이 무한주의(infinitism)다. 소수설이지만 논거가 없지 않다. 피터 클라인(Peter Klein)이 대표적인 옹호자다.
무한주의자의 논거는 주로 다른 둘이 더 나쁘다는 것이다. 멈추는 자리를 두면 그 자리에서 "왜 여기서는 더 묻지 않아도 되는가" 라는 물음을 자의적으로 막게 되고, 되돌아오는 것을 허용하면 어떤 믿음이든 자기를 지지하는 순환을 만들어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남는 것은 첫째 갈래뿐이라는 것이다. 덧붙여, 사람이 무한한 근거를 이미 다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요구되는 것은 물으면 다음 근거를 댈 수 있는 상태이지 무한한 목록을 머릿속에 지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치르는 값은 분명하다. 그 사슬에 실제로 끝이 없다면, 어느 지점에서도 정당화가 완성되지 않는다. 다음 근거를 댈 수 있다는 것만으로 지금 이 믿음이 정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가 무한주의가 답해야 할 자리다.
토대론 — 멈추는 자리를 둔다
토대론(foundationalism)은 이렇게 말한다. 정당화된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 다른 믿음에 기대어 정당화되는 믿음과, 다른 믿음에 기대지 않고 정당화되는 믿음이다. 뒤의 것을 기초 믿음(basic belief)이라 한다. 정당화는 기초에서 위로 흐르고 거꾸로는 흐르지 않는다.
토대론이 설명하려는 것은 분명하다. 후퇴를 멈춘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근거를 대는 방식과도 잘 맞는다. 근거를 캐물으면 사람들은 어느 지점에서 "그냥 보이니까" 나 "그냥 그런 것이니까" 로 대답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무엇이 기초 믿음인가
후보는 대체로 둘이다.
- 자기 마음의 지금 상태에 대한 믿음 — "나는 지금 붉게 보이는 무언가를 겪고 있다", "나는 지금 아프다". 잘못 보고 있더라도 그렇게 보인다는 것 자체는 틀리기 어렵다.
- 따져 볼 것 없이 자명한 것 — "총각은 결혼하지 않았다", "같은 것은 같다".
얼마나 튼튼해야 기초 자격을 얻는가에 따라 토대론이 둘로 갈린다.
강한 토대론은 기초 믿음이 확실해야 한다고 본다. 틀릴 수 없고 의심할 수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방식이 그 대표이고, 7장에서 그 방식을 다시 본다. 이렇게 잡으면 기초가 단단해지는 대신 수가 아주 적어진다. 자기 마음 상태에 대한 믿음 몇 개에서 바깥 세계에 대한 믿음 전체를 끌어내야 하는데, 그 다리를 놓는 데 성공한 사람이 없다.
온건한 토대론은 기초 믿음이 확실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경험이 얼마간의 근거를 주고, 그 근거는 새 증거가 나오면 무너질 수 있다. 5장의 무효화 요인이 여기서 다시 쓰인다 — 기초 믿음도 무효화될 수 있다. 이렇게 잡으면 기초의 수가 넉넉해지는 대신 "근거 없이 정당화된다" 는 말이 약해진다.
주어진 것의 딜레마
토대론에 대한 가장 강한 반론은 기초 믿음이 무엇으로 정당화되는지를 캐묻는다. 흔한 대답은 경험이다. 붉은 것을 보는 경험이 "붉게 보인다" 는 믿음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되묻는다. 그 경험은 어떤 것인가.
경험이 이미 "…이다" 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면, 그 내용도 참일 수 있고 거짓일 수 있다. 참·거짓을 가진 것은 정당화가 필요하고, 그러면 후퇴가 다시 시작된다. 반대로 경험이 아무 내용 없는 날것의 겪음이라면, 그것은 무엇을 믿게 해 주는지 말할 수 없으므로 근거가 될 수 없다. 윌프리드 셀라스(Wilfrid Sellars, 1912–1989)가 1950년대에 이 자리를 짚고 주어진 것의 신화라 불렀다.
온건한 토대론의 대응은 이렇다. 경험이 주는 것을 '완결된 정당화' 가 아니라 '무너질 수 있는 얼마간의 근거' 로 잡으면 두 뿔 사이를 지나갈 수 있다. 그러면 다시 이런 되물음이 온다 — 경험이 얼마간의 근거를 준다는 것 자체는 무엇이 정당화하는가. 이 주고받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합론 — 사슬이 아니라 그물이다
정합론(coherentism)은 다른 자리를 친다. 후퇴 논증의 세 전제를 다 받아들이는 대신, 결론에서 나온 사슬이라는 그림을 거부한다. 정당화는 한 줄로 늘어선 것이 아니라 믿음들이 서로 받치는 그물이라는 것이다.
정합론자가 보기에 "그러면 순환 아닌가" 라는 비난은 이미 정당화가 선형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그물에는 시작점이 없으므로 돌아온다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어떤 믿음이 정당화되는지는 그 믿음 하나를 두고 위로 거슬러 올라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체계 전체가 얼마나 잘 맞물려 있는지로 정한다.
정합이란 서로 모순이 없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서로를 설명해 주고, 하나를 고치면 다른 것도 함께 고쳐야 할 만큼 촘촘히 얽혀 있는 것을 말한다. 무관한 참인 문장을 잔뜩 모아 놓은 것은 모순이 없어도 정합적이지 않다.
정합론이 설명하려는 것은 둘이다. 첫째, 주어진 것의 신화를 피한다. 믿음을 정당화하는 것은 믿음뿐이라고 보므로 '내용 없는 경험이 어떻게 근거가 되는가' 라는 물음이 아예 생기지 않는다. 둘째, 우리가 실제로 믿음을 고치는 방식과 잘 맞는다. 관찰과 이론이 어긋날 때 늘 관찰이 이기는 것은 아니다. 이상한 계기판 눈금 하나 때문에 잘 확립된 이론을 버리지는 않는다.
고립 반론
가장 강한 반론은 이것이다. 잘 지어낸 이야기도 정합적이다.
세계와 맞물린 믿음 체계와 촘촘하게 지어낸 소설이 정합의 정도에서 똑같다고 하자. 정합만으로 정당화를 정의하면 두 체계가 똑같이 정당화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는 세계에 대해 옳고 하나는 아니다. 이것을 고립 반론이라 하고, 같은 이야기의 다른 판이 대안 체계 반론이다 — 똑같이 정합적인 체계가 여럿 있을 수 있고 정합만으로는 고를 수 없다.
정합론자의 대응은 관찰에서 온 믿음에 특별한 무게를 주는 것이다. 로렌스 봉주르(Laurence BonJour)의 방식이 그렇다. 내가 애써 만든 것이 아니라 저절로 떠오른 믿음은 대체로 믿을 만하다는 메타 믿음이 체계 안에 있고, 그 메타 믿음이 관찰 믿음의 무게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어낸 소설은 관찰 믿음이 없으므로 걸러진다.
여기에 다시 되물음이 온다. 그 메타 믿음은 무엇이 정당화하는가. 체계 안의 다른 믿음들이라고 답하면 지어낸 체계도 자기 나름의 메타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체계 바깥의 무언가라고 답하면 정합론이기를 그만두는 셈이다. 이 주고받음도 끝나지 않았다. 봉주르 자신은 뒤에 이 입장을 떠나 토대론 쪽으로 옮겨 갔다.
정당화하는 것이 내 안에 있어야 하는가
앞의 세 갈래와 가로지르는 갈림이 하나 있다. 물음은 이것이다. 어떤 믿음을 정당화하는 것에 믿는 사람이 반성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하는가.
그래야 한다고 보면 내재주의(internalism), 그럴 필요 없다고 보면 외재주의(externalism)다.
내재주의의 근거는 인식적 책임이다. 정당화는 그 사람이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재는 말인데, 그 사람이 들여다볼 수도 없는 것 때문에 잘한 것이 된다는 말은 이상하다. 외재주의의 근거는 우리가 실제로 앎을 인정하는 범위다. 어린아이도 눈앞의 컵을 보고 컵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이에게 "네 시각이 왜 믿을 만한가" 를 물으면 아무 대답도 못 한다. 내재주의를 세게 걸면 이런 앎이 전부 사라진다.
신빙론
신빙론(reliabilism)은 외재주의의 대표다. 골드먼이 다듬은 형태가 널리 논의된다. 주장은 이렇다. 믿음을 만들어 낸 과정이 신빙성이 있으면 — 참인 믿음을 충분히 자주 내놓으면 — 그 믿음은 정당화되어 있다. 믿는 사람이 그 사실을 알 필요는 없다.
신빙론이 후퇴 논증에 답하는 방식은 앞의 셋과 다르다. 갈래를 고르지 않는다. (P2) — 믿음을 정당화하는 것은 다른 믿음이다 — 를 부인하기 때문에 사슬이 애초에 생기지 않는다. 정당화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과정이라면, 그 과정을 다시 정당화하라는 요구는 뜻이 통하지 않는다. 과정은 참이거나 거짓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빙론은 5장의 문제에도 손을 뻗는다. 가짜 헛간 들판에서 그 사람의 시각 과정은 그 들판에서는 신빙성이 없다. 앞면만 세운 것이 대부분이니 참을 내놓는 비율이 낮다. 그래서 신빙론은 그 사례를 걸러 낼 수 있다.
치르는 값이 셋 있다.
새로운 악령 문제. 나를 속이려는 강력한 존재가 있어서, 내가 보고 듣는 것이 전부 그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하자. 7장이 이 설정을 정면으로 다룬다. 그런 세계에 사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그는 우리와 똑같이 신중하고 똑같이 증거에 맞춰 믿는다. 그러나 그의 지각 과정은 참을 거의 내놓지 못한다. 신빙론대로라면 그의 믿음은 정당화되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내재주의자는 그것이 잘못된 판정이라고 본다 — 그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모르고 쓰는 신빙성. 이름 붙은 사례가 둘 있다. 봉주르의 노먼 사례는 실제로 투시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이 아주 신빙성이 높은 사람에 대한 것이고, 레러의 트루템프 사례는 뇌에 심긴 장치가 주변 온도에 대한 참인 믿음을 자동으로 만들어 주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본인은 자기에게 그런 능력이나 장치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떠오르는 믿음에 근거가 있다고 여길 이유도 없다. 그래도 그 믿음이 정당화되었다고 해야 하는가. 신빙론은 그렇다고 하고, 내재주의자는 아니라고 한다.
둘을 나란히 두는 이유가 있다. 노먼의 것은 본인의 능력이고 트루템프의 것은 밖에서 이식된 장치다. 외재주의자는 둘을 같게 다루지만, 내재주의자가 느끼는 거북함의 크기는 다를 수 있다.
일반성 문제. 잣대를 대려면 '그 과정' 을 하나로 지목해야 한다. 그런데 한 번의 믿음 형성은 여러 넓이의 과정에 동시에 속한다. 그냥 시각인가, 어두울 때의 시각인가, 이 날 이 자리에서의 시각인가. 넓이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참의 비율이 달라지고 판정이 뒤집힌다. 어느 넓이가 옳은지를 신빙론 자체가 정해 주지 않는다.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 용어 | 뜻 |
|---|---|
| 후퇴 논증(regress argument) | 정당화의 근거를 계속 물으면 사슬이 생긴다는 논증. 이 장의 모든 입장이 이것에 대한 대응이다 |
| 아그리파의 세 갈래 | 사슬이 끝없이 이어지거나 멈추거나 되돌아온다는 세 갈래. 뮌히하우젠 트릴레마라고도 한다 |
| 토대론(foundationalism) | 다른 믿음에 기대지 않고 정당화되는 믿음이 있다는 입장 |
| 기초 믿음(basic belief) | 다른 믿음에 기대지 않고 정당화되는 믿음 |
| 강한 토대론 / 온건한 토대론 | 기초 믿음이 확실해야 한다는 쪽 / 무너질 수 있어도 된다는 쪽 |
| 주어진 것의 신화 | 경험이 내용을 가지면 정당화가 필요하고 갖지 않으면 근거가 못 된다는 딜레마 |
| 정합론(coherentism) | 정당화는 믿음 체계 전체의 맞물림에서 온다는 입장. 정당화가 선형이라는 그림을 거부한다 |
| 정합 | 모순이 없을 뿐 아니라 서로를 설명하며 촘촘히 얽혀 있는 상태 |
| 고립 반론 / 대안 체계 반론 | 잘 지어낸 이야기도 정합적이다 / 정합적인 체계가 여럿일 수 있다 |
| 무한주의(infinitism) | 정당화의 사슬이 끝없이 이어져도 된다는 입장. 소수설 |
| 내재주의 / 외재주의 | 정당화하는 것에 반성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 그럴 필요 없다 |
| 신빙론(reliabilism) | 믿음을 만든 과정이 참을 충분히 자주 내놓으면 그 믿음은 정당화되었다는 입장 |
| 새로운 악령 문제 | 우리와 똑같이 신중한 통 속의 뇌를 신빙론이 정당화되지 않았다고 판정하는 문제 |
| 일반성 문제 | 믿음을 만든 과정을 어느 넓이로 잡느냐에 따라 신빙론의 판정이 뒤집히는 문제 |
사람으로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데카르트, 셀라스, 봉주르, 클라인, 골드먼이 나왔다. 골드먼은 5장의 인과 조건에 이어 두 번째다.
이 장은 정당화를 다루면서 회의주의를 두 번 스쳤다. 후퇴 논증의 넷째 길로 한 번, 새로운 악령 문제의 통 속의 뇌로 한 번이다. 다음 장이 그것을 정면으로 받는다. 지금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이 장의 출처
아래는 이 장을 쓰면서 확인한 자료다. 이 문서는 어느 것도 옮기지 않았다.
- SEP — Foundationalist Theories of Epistemic Justification
- SEP — Coherentist Theories of Epistemic Justification
- SEP — Reliabilism
- SEP — Internalist vs. Externalist Conceptions of Epistemic Justification
회의주의
이 장에서 답할 질문은 하나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그 물음이 답을 얻지 못하면 무엇까지 무너지는가.
앞의 두 장에서 가져오는 것이 많다. 앎의 세 조건과 민감성 조건(5장), 정당화의 후퇴와 내재주의·외재주의·신빙론(6장)이다. 논증을 (P1) (P2) … (C) 로 줄 세우는 4장의 방식과, 반박하기 쉬운 형태로 요약하지 않는다는 자비의 원리도 계속 쓴다.
이 장의 요점은 회의주의를 물리치는 방법이 아니다. 타당한 논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결론을 내놓았을 때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요점이고, 회의주의는 그 구조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다. 이 장을 다 읽고 나서 회의주의가 틀렸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아도 된다. 대신 어느 문장을 버려야 하는지, 그리고 버리면 무엇을 함께 잃는지를 적을 수 있으면 된다.
미리 밝힌다. 이 장의 대응들 가운데 자리를 잡은 것은 없다. 3장의 세 등급으로는 미결이다.
꿈 논증 — 지금 깨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르네 데카르트가 1641년에 낸 성찰의 첫머리는 자기가 믿는 것을 하나씩 흔들어 보는 작업이다. 순서가 정해져 있다.
먼저 감각이 가끔 속인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멀리 있는 탑은 둥글어 보이는데 가까이 가면 네모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지금 눈앞 한 뼘 거리에 있는 손까지 의심할 이유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수를 둔다. 꿈이다. 꿈속에서 나는 손을 보고 있다고 여긴 적이 여러 번 있고, 그때마다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이 그런 때가 아니라고 어떻게 말하는가.
논증으로 줄 세운다.
- (P1) 깨어서 손을 보는 경우와 손을 보는 꿈을 꾸는 경우는, 내가 안에서 가진 증거로는 구별되지 않는다.
- (P2) 두 경우를 가릴 증거가 없다면, 나는 어느 쪽인지 알지 못한다.
- (C) 그러므로 나는 내가 지금 깨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흔한 반박이 왜 빗나가는가
이 논증에 처음 부딪히면 대개 세 가지로 받는다. 셋 다 같은 이유로 빗나간다.
"꿈은 덜 생생하다" — 지금 이 순간이 생생하다는 것은 (P1)의 반례가 되지 못한다. 꿈속에서도 생생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비교가 성립하려면 꿈꾸는 동안과 깨어 있는 동안을 같은 자리에서 견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자리가 없다.
"볼을 꼬집어 보면 된다" — 꼬집는 것도 꿈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꼬집고 아팠다는 것까지 꿈이 담을 수 있으므로 이 시험은 두 경우를 가르지 못한다.
"꿈에는 앞뒤가 안 맞는 데가 있다" —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꿈꾸는 동안에는 그 어긋남을 알아채지 못한다. 지금 어긋남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깨어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깨어 있는 경우와 꿈꾸는 경우 모두에서 똑같이 나타나는 것이다.
셋이 같은 자리에서 빗나간다. 회의주의자는 "너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 고 주장하지 않는다. 꿈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주장하는 것은 가릴 수단이 안에 없다는 것 하나뿐이고, 위의 셋은 모두 안에 있는 수단이다.
데카르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꿈이라 해도 "둘과 셋을 더하면 다섯" 은 그대로 참일 것 같다. 그래서 한 수를 더 둔다. 전능한 악령이 있어 내가 셈을 할 때마다 나를 속인다면? 이 수가 남긴 자리가 다음 절의 주제다.
통 속의 뇌 — 논증을 형식으로 세운다
악령의 현대판이 통 속의 뇌다. 내 뇌가 통 안의 양분 속에 담겨 있고, 컴퓨터가 신경에 신호를 넣어 지금 이 경험을 만들어 낸다고 하자. 통 속의 뇌인 경우와 지금 이 경우는 안에서 구별되지 않는다.
이 사례를 널리 알린 것은 힐러리 퍼트넘(Hilary Putnam, 1926–2016)인데, 그의 목적은 회의주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나는 통 속의 뇌다" 라는 문장이 어떤 경우에도 참일 수 없음을 말의 뜻이 정해지는 방식으로부터 보이려 했다. 그 논의는 16장의 언어철학에 걸쳐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런 대응이 있다는 것만 적어 둔다.
이제 이 사례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본다. 그러려면 도구가 하나 필요하다.
폐쇄 원리
폐쇄 원리(closure principle)는 이렇게 말한다.
갑이 P 를 알고,
말로 옮기면 "아는 것에서 따라 나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그것도 아는 것이다" 가 된다. 앎의 울타리가 함의 아래에서 새지 않는다는 뜻이라 폐쇄라 부른다.
이 원리는 거의 반박할 수 없어 보인다. 내가 시계를 보고 세 시임을 알고, 세 시이면 두 시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그로부터 두 시가 아니라고 믿는다면, 두 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고 해야 자연스럽다. 앎에서 앎을 끌어내는 일이 아예 불가능하다면 논증이라는 것이 인식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
회의주의자가 쓰는 것은 이 원리를 뒤집은 방향이다. Q 를 모른다면 P 도 모르는 것이 된다.
이 절과 다음 절에서 쓰는 논증 형식은 둘뿐이다. 논리학 문서 3장이 정의한 두 형식이고, 여기서는 이름과 아래 두 줄만 빌려 쓴다.
- 앞이 그러하면 뒤도 그러한데 앞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뒤도 그러하다. 논리학 문서 3장이 이 형식을 전건 긍정이라 부른다.
- 앞이 그러하면 뒤도 그러한데 뒤가 그러하지 않다. 그러므로 앞도 그러하지 않다. 이것이 후건 부정이다.
둘 다 타당하다. 형식 논리 전반은 논리학 이 다루므로, 여기서는 두 이름과 위 두 줄만 쓴다.
표준 회의주의 논증
이제 세울 수 있다.
- (P1) 나는 내가 통 속의 뇌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 (P2) 내가 손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나는 내가 통 속의 뇌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 (C) 그러므로 나는 내가 손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P2)가 폐쇄 원리에서 나온다. 손이 있다는 것은 내가 통 속의 뇌가 아님을 함의하고 — 통 속의 뇌에게는 손이 없다 — 나는 그 함의를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이다.
형식은 이렇다.
논증이 왜 강한지 짚어 두자. 회의주의자는 통 속의 뇌 가설이 그럴듯하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다. (P1)이 요구하는 것은 그 가설이 거짓임을 내가 안다는 것을 부인하는 데 그친다. 가설이 아무리 억지스러워도, 그것이 거짓임을 아느냐고 물으면 대답이 궁해진다. 그리고 그 궁함 하나면 논증이 굴러간다.
무어의 뒤집기 — 같은 세 문장, 다른 선택
조지 에드워드 무어(G. E. Moore, 1873–1958)는 1939년 강연에서 손을 들어 보이며 "여기 손이 하나 있다" 고 말하고, 다른 손을 들며 "여기 또 하나" 라고 말했다. 그것으로 바깥 세계가 있다는 증명을 삼았다.
우습게 들리지만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무어가 한 일을 앞의 논증과 나란히 놓으면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가 보인다.
- (P1*) 나는 내가 손이 있다는 것을 안다.
- (P2) 내가 손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나는 내가 통 속의 뇌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 (C*) 그러므로 나는 내가 통 속의 뇌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형식은
두 논증을 견줘 보자. 공유하는 전제 (P2)는 같다. 형식은 둘 다 타당하다. 회의주의자는 "통 속의 뇌가 아님을 모른다" 를 붙잡고 "손이 있음을 안다" 를 버렸고, 무어는 "손이 있음을 안다" 를 붙잡고 "통 속의 뇌가 아님을 모른다" 를 버렸다. 같은 재료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 것이다.
무어의 논거는 이것이다. 두 문장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확실한가. 무어가 보기에 자기 손이 여기 있다는 것보다 회의주의의 전제가 더 확실하다고 볼 이유가 없다. 그리고 덜 확실한 것으로 더 확실한 것을 뒤집을 수는 없다.
회의주의자의 되받음은 이것이다. 무어는 안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묻는 자리에서 안다고 답했을 뿐이다. 4장의 이름으로는 선결문제 요구다.
이 주고받음이 결판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 절의 소득이다. 타당한 논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결론을 내놓으면 할 수 있는 일은 둘뿐이다. 전제 하나를 버리거나 결론을 받아들이거나. 어느 쪽을 택할지는 논증 자체가 정해 주지 않는다. 무엇이 더 확실한지에 대한 판단이 정한다. 이것은 회의주의에만 있는 사정이 아니라 철학의 논증 대부분이 놓이는 자리다.
세 명제 중 무엇을 버릴 것인가
앞의 두 절을 합치면 이런 자리에 선다. 아래 세 문장은 각각 그럴듯한데 함께 참일 수 없다.
- (1) 나는 내가 통 속의 뇌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 (2) 내가 손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나는 내가 통 속의 뇌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폐쇄 원리)
- (3) 나는 내가 손이 있다는 것을 안다.
셋 중 어느 둘을 붙잡아도 남은 하나가 거짓이 된다. 그래서 이 자리를 대하는 방식이 곧 입장이 된다.
(3)을 버린다 — 회의주의
결론을 그대로 받는 길이다. 우리는 손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값은 명확하다. 우리가 안다고 여기는 거의 전부를 내놓아야 한다. 이 길을 택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다른 두 길의 값이 더 크다고 보면 남는 길이 이것이라는 논거는 살아 있다.
(1)을 버린다 — 무어와 외재주의
나는 내가 통 속의 뇌가 아님을 안다고 말하는 길이다. 무어가 그렇게 했고, 6장의 외재주의가 그것을 이론으로 뒷받침한다.
신빙론자의 말은 이렇다. 앎에 필요한 것은 내 믿음을 만든 과정이 실제로 신빙성이 있는 것이지, 내가 그 신빙성을 반성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통 속의 뇌가 아니라면 내 지각 과정은 실제로 신빙성이 있고, 그러면 "나는 통 속의 뇌가 아니다" 라는 믿음도 신빙성 있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된다. 그러니 나는 그것을 안다.
값은 이것이다. 내가 통 속의 뇌라면 이 대답이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쪽인지 안에서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애초의 문제였다. 외재주의자는 이 지적을 받아들이면서, 안에서 확인할 수 없다는 것과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다르다고 답한다. 그 답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6장의 내재주의·외재주의 갈림과 정확히 같은 물음이다.
(2)를 버린다 — 민감성과 관련 대안
폐쇄 원리를 포기하는 길이다.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1938–2002)이 1981년 책에서 낸 방식이 대표적이다. 5장의 민감성을 앎의 조건으로 놓으면 이 결과가 따라 나온다.
두 믿음에 민감성을 대어 보자. "나에게 손이 있다" 는 믿음은 민감하다 — 손이 없었다면 나는 그렇게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통 속의 뇌가 아니다" 라는 믿음은 민감하지 않다 — 내가 통 속의 뇌였다면 나는 여전히 아니라고 믿었을 것이다. 민감성이 앎에 필요하다면 앞은 알고 뒤는 모른다. 그런데 앞은 뒤를 함의한다. 폐쇄 원리가 깨진다.
값이 크다. 이 길을 가면 "나는 내게 손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내가 통 속의 뇌가 아님은 알지 못한다" 를 통째로 삼켜야 한다. 이런 문장을 입 밖에 낼 수 있는지가 이 길에 대한 주된 반론이다. 아는 것에서 곧바로 따라 나오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넷째 길 — 맥락주의
맥락주의(contextualism)는 셋 중 하나를 버리는 대신 세 문장이 같은 자리에서 주장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안다' 가 요구하는 기준이 대화의 맥락에 따라 오르내린다는 것이다. 키스 디로즈(Keith DeRose), 스튜어트 코헨(Stewart Cohen), 데이비드 루이스(David Lewis, 1941–2001) 등이 다듬었다.
일상 맥락에서 "은행이 토요일에 여는 것을 아느냐" 고 물으면 지난주에 가 보았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큰돈이 걸려 있고 틀리면 안 된다" 는 말이 얹히면 같은 근거로는 안다고 하기 어려워진다. 사실도 증거도 그대로인데 판정이 바뀐다. 맥락주의는 '안다' 가 원래 이런 낱말이라고 본다.
회의주의 논의가 시작되면 통 속의 뇌 가능성이 화제에 오르고, 그것만으로 기준이 크게 올라간다. 그 높은 기준에서는 (1)이 참이고 (3)이 거짓이다. 일상 맥락으로 돌아오면 기준이 내려가 (3)이 참이 된다. 두 문장이 모순되지 않는 것은 '안다' 가 두 자리에서 다른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맥락주의를 상대주의로 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맥락주의가 말하는 것은 사람마다 진리가 다르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도 증거도 그대로이고, 움직이는 것은 '안다' 라는 말이 그 자리에서 요구하는 것뿐이다.
값이 둘 있다. 첫째, '안다' 가 정말로 맥락에 민감한 낱말인지를 언어 쪽에서 떠받쳐야 하는데, '크다' 나 '평평하다' 같은 전형적인 맥락 민감어와 '안다' 가 다르게 행동한다는 반론이 있다. 둘째, 높은 기준의 맥락에서는 회의주의자가 옳다고 인정하는 셈이므로, 이것이 회의주의를 물리친 것인지 회의주의에 자리를 내준 것인지가 다투어진다.
관련 대안 — 무엇을 배제해야 하는가
폐쇄 원리를 버리는 길에는 민감성 말고 다른 판본이 있다. 프레드 드레츠키(Fred Dretske, 1932–2013)의 관련 대안 이론이다. 주장은 이렇다. 안다는 것은 모든 대안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대안만 배제하는 것이다.
사례가 유명하다. 동물원 우리 앞에 줄무늬 짐승이 서 있고 팻말에 얼룩말이라 적혀 있다. 저것이 얼룩말임을 아는가? 안다고 대답하는 데 무리가 없다. 그런데 저것이 얼룩말로 정교하게 칠한 노새가 아님을 아는가? 이번에는 대답이 궁해진다. 칠한 노새와 얼룩말은 내가 선 자리에서 똑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얼룩말이라면 칠한 노새가 아니다. 폐쇄 원리대로라면 앞을 알 때 뒤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자연스러운 대답이 어긋난다. 드레츠키는 여기서 폐쇄 원리 쪽을 의심한다. 앎이 요구하는 것은 관련된 대안의 배제뿐이고, 평범한 동물원에서 칠한 노새는 관련된 대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는 물음이 있다. 무엇이 관련된 대안인지를 무엇이 정하는가. 여기서 두 길이 갈린다. 맥락주의는 대화의 맥락이 정한다고 본다 — 칠한 노새를 화제에 올리는 순간 그것이 관련된 대안이 된다. 드레츠키 쪽은 맥락이 아니라 상황 자체가 정한다고 본다 — 실제로 칠한 노새가 돌아다니는 지역이 아니라면 그 대안은 관련되지 않고, 누가 그것을 입에 올려도 마찬가지다.
이 갈림이 5장의 가짜 헛간 들판을 다시 불러온다. 그 들판에서는 가짜 헛간이 실제로 관련된 대안이다. 주변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시각 능력으로 같은 믿음을 가져도, 평범한 들판에서는 알고 가짜 헛간 들판에서는 알지 못한다. 내 안의 것이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판정이 달라진다 — 이것이 외재주의의 특징이고, 관련 대안 이론이 외재주의에 속하는 이유다.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 용어 | 뜻 |
|---|---|
| 꿈 논증 | 깨어 있는 경우와 꿈꾸는 경우가 안에서 구별되지 않으므로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다는 논증 |
| 악령 | 나를 속이려는 전능한 존재. 감각에서 오지 않은 믿음까지 흔들려고 데카르트가 끌어들였다 |
| 통 속의 뇌 | 악령의 현대판. 통 속의 뇌인 경우와 지금 이 경우가 안에서 구별되지 않는다 |
| 폐쇄 원리(closure principle) | P 를 알고 |
| 표준 회의주의 논증 | 통 속의 뇌가 아님을 모른다는 전제와 폐쇄 원리에서 후건 부정으로 얻는 논증 |
| 무어의 뒤집기 | 같은 공유 전제에 다른 출발점을 더해 회의주의 결론을 뒤집는 논증 |
| 맥락주의(contextualism) | ‘안다’ 가 요구하는 기준이 대화 맥락에 따라 오르내린다는 입장 |
| 관련 대안 | 앎이 요구하는 것은 모든 대안이 아니라 관련된 대안의 배제뿐이라는 입장 |
사람으로는 데카르트, 퍼트넘, 무어, 노직, 드레츠키, 디로즈, 코헨, 루이스가 나왔다. 데카르트는 6장의 강한 토대론에 이어 두 번째다.
이 장이 남긴 판단 규칙을 정리한다.
| 물음 | 기준 |
|---|---|
| 이 반박이 회의주의 논증에 통하는가 | 안에서 얻는 증거를 대고 있는가. 그렇다면 통하지 않는다 |
| 이 논증에서 무엇을 버릴 수 있는가 | 전제 하나를 버리거나 결론을 받아들이거나 둘뿐이다 |
| 어느 전제를 버릴 것인가 | 논증이 정해 주지 않는다. 무엇이 더 확실한지에 대한 판단이 정한다 |
| 이 입장이 폐쇄 원리를 지키는가 | 아는 것에서 따라 나오는 것을 모를 수 있다고 하면 버린 것이다 |
| 맥락주의인가 관련 대안 이론인가 | 관련성을 대화가 정하는가 상황이 정하는가 |
인식론 세 장이 여기서 끝난다. 앎을 조건으로 쪼개려던 시도(5장), 정당화의 구조를 그리려던 시도(6장), 그리고 그 둘이 회의주의 앞에서 겪는 일(7장)이었다. 다음 장은 같은 물음을 다른 자리에서 다시 받는다. 지금까지 늘 그랬다는 것에서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것으로 건너가는 일 — 귀납은 정당한가.
이 장의 출처
아래는 이 장을 쓰면서 확인한 자료다. 이 문서는 어느 것도 옮기지 않았다.
귀납은 정당한가
지금까지 손에서 놓은 것은 모두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니 다음에 놓는 것도 떨어질 것이다. 이 걸음을 딛지 않고 하루를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 걸음의 근거를 대 보라고 하면, 대기가 놀랄 만큼 어렵다. 이 장은 그 어려움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를 본다.
이 장에서 답할 질문은 둘이다. 지금까지 늘 그랬다는 것이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근거가 되는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매일 하고 과학이 통째로 기대고 있는 이 추론은 대체 무엇인가.
앞 장에서 가져오는 것이 넷이다. 3장의 타당·건전·반례, 4장의 논증 재구성과 숨은 전제 드러내기, 6장의 정당화, 그리고 7장에서 본 회의주의 논증의 모양이다. 마지막 것이 특히 중요하다. 이 장의 중심 논증은 7장의 그 논증과 뼈대가 같고, 그래서 빠져나갈 길도 같은 자리에서 갈린다.
미리 밝혀 둘 것이 있다. 이 장의 중심 문제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이것은 결말을 짓기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표준적인 서술이다. 해법 후보는 여럿이고 각각 지지자가 있지만 어느 하나도 합의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장은 답을 주는 대신 왜 이 물음이 그토록 질긴가를 보이는 데 힘을 쓴다.
연역이 데려다주지 못하는 곳
논리학 문서 3장은 논증을 연역과 귀납으로 가르고 나서 이렇게 선을 그었다. "이 문서는 연역만 다룬다." 이 장은 그 선의 반대편이다.
갈라 두면 편한 이름부터 정하자. 결론이 전제에 이미 들어 있는 것을 넘어서지 않는 추론이 연역이고, 넘어서는 추론을 확장적 추론(ampliative inference)이라 한다. 넘어선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가. 전제를 모두 참으로 만들면서 결론을 거짓으로 만드는 상황이 있다는 뜻이다. 3장의 말로 하면 반례가 있다는 뜻이고, 따라서 확장적 추론은 예외 없이 부당하다.
확장적 추론에는 적어도 세 갈래가 있다.
| 이름 | 모양 | 보기 |
|---|---|---|
| 열거적 귀납(enumerative induction) | 지금까지 본 F 는 모두 G 였다 → 다음 F 도 G 일 것이다 | 지금까지 마신 물은 갈증을 없앴다 → 다음 물도 그럴 것이다 |
| 유비 논증(argument from analogy) | A 와 B 가 여러 점에서 닮았다 → 남은 한 점에서도 닮았을 것이다 | 쥐에게 독이었다 → 사람에게도 독일 것이다 |
|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 | H 가 참이면 관찰한 것이 잘 설명된다 → H 가 참일 것이다 | 마당에 발자국이 있다 → 밤에 누가 지나갔다 |
이 셋을 묶어 이 장은 귀납이라 부른다. 좁게는 첫째 갈래만 귀납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흄의 문제는 셋 모두를 건드리므로 넓게 잡는 편이 낫다.
왜 이것이 큰 문제가 되는가. 확장적 추론을 빼면 남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의 법칙은 전부 유한한 관찰에서 나왔고, 기억을 믿는 것도, 남의 말을 믿는 것도, 내일 아침에도 지구가 있으리라 여기는 것도 전부 이 걸음을 딛는다. 연역만으로 지탱되는 앎은 지금 눈앞에 있는 것과 그것의 논리적 귀결뿐이다.
흄의 문제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이 이 물음을 세운 방식은 지금도 거의 그대로 쓰인다. 흄은 우리가 이 걸음을 딛는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이 걸음을 받쳐 주는 논증을 찾다가 찾지 못했고, 왜 찾을 수 없는지를 보였다.
논증을 세운다
4장에서 배운 대로 번호를 붙여 세워 보자.
- 우리는 관찰한 사례에서 관찰하지 않은 사례로 넘어가는 추론을 한다. 이것을 귀납이라 부른다.
- 이 추론이 정당하려면, 그것을 받쳐 주는 논증이 있어야 한다.
- 논증은 연역이거나 귀납이다. 셋째 종류는 없다.
- 연역 논증으로는 받칠 수 없다. "지금까지 관찰한 것은 모두 이러했다"가 참이면서 "다음 것도 이러하다"가 거짓인 상황을 모순 없이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반례가 있고, 따라서 부당하다.
- 귀납 논증으로도 받칠 수 없다. 그 논증은 "귀납은 지금까지 잘 통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통할 것이다"가 될 텐데, 이것 자체가 귀납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귀납을 받쳐 주는 논증은 없다.
논증은 타당하다. 그러니 결론을 피하려면 전제 가운데 하나를 버려야 한다. 어느 것을 버릴 수 있는지가 다음 절의 내용이다.
왜 순환인가
다섯째 전제를 형식으로 보자. 귀납의 걸음은 이런 모양이다. 3장과 4장에서 쓴 표기를 그대로 쓴다.
이 걸음을 허락하는 규칙을
두 그림을 겹쳐 보라. 같은 모양이다. 위의
자연의 제일성을 넣어 보면
넷째 전제를 공격하는 자연스러운 수가 있다. 4장에서 배운 숨은 전제 드러내기다. 위 논증이 부당한 것은 전제가 하나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닌가. 빠진 것을 채워 넣자.
자연의 제일성(the uniformity of nature) — 관찰하지 않은 부분도 관찰한 부분과 같은 규칙을 따른다.
이 전제를 넣으면 논증이 타당해진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전제 자체를 어떻게 아는가가 남는다. 그것이 거짓인 세계를 모순 없이 상상할 수 있으므로 연역으로는 얻을 수 없다. 남은 길은 "지금까지 자연은 제일적이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인데, 이것이 다시 귀납이다.
제일성 원리에는 이것 말고도 곤란한 점이 있다. 세기를 조절하기가 어렵다. 논증이 타당해질 만큼 세게 적으면 "관찰된 규칙성은 모두 이어진다"가 되는데, 이것은 그냥 거짓이다. 이어지지 않은 규칙성이 얼마든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규칙성과 "내가 본 백조는 모두 희다"는 규칙성이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고 참이 될 만큼 약하게 적으면 "어떤 규칙성은 이어진다" 정도가 되고, 그러면 논증이 다시 부당해진다. 어느 규칙성이 이어지는지를 골라 주는 일이 남는데, 그 문제가 이 장 네 번째 절의 주제다.
7장과 같은 모양이다
여기서 잠깐 멈추고 논증의 모양을 보아 두면 뒤가 편하다. 7장의 회의주의 논증은 이런 꼴이었다. 전제 하나하나는 따로 보면 그럴듯한데, 그것들을 이으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대응은 전부 "어느 전제를 버릴 것인가"의 선택이 되었다.
흄의 논증도 똑같다. 여섯 항목 가운데 따로 놓고 보아 이상한 것이 없는데 결론은 "귀납은 정당화되지 않는다"다. 그래서 다음 절에 나올 응답들은 하나같이 어느 전제를 버리는가로 정리된다. 7장에서 무어가 "결론이 더 못 믿을 만하니 전제 쪽이 틀렸다"고 되받은 그 수도 여기서 그대로 쓸 수 있다. 다만 7장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수를 쓴다고 어느 전제가 틀렸는지가 정해지지는 않는다.
해법 후보들 — 그리고 어느 것도 합의되지 않았다
흄 이후로 응답이 끊이지 않았다. 아래 다섯이 대표적이고, 다섯 다 지지자가 있으며, 다섯 다 만만찮은 반론을 받는다. 어느 하나가 표준 해법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절의 결론이다.
이름이 붙는 응답이 셋이라 먼저 소개해 둔다. 피터 스트로슨(Peter Strawson, 1919–2006), 한스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 1891–1953), 그리고 카를 포퍼(Karl Popper, 1902–1994)다. 포퍼의 응답은 과학철학 전체를 다시 짠 것이어서 9장이 통째로 다룬다. 여기서는 흄의 논증에 대한 응답으로서만 적어 둔다.
| 응답 | 무엇을 주장하는가 | 가장 강한 반론 |
|---|---|---|
| 물음의 해소 (스트로슨) | ‘합리적’ 이라는 말이 이미 ‘증거에 비추어 판단하는’ 을 뜻한다. 귀납이 합리적이냐는 물음은 ‘총각이 미혼이냐’ 같은 물음이다 | 낱말의 뜻을 밝혀도 ‘왜 그 기준을 써야 하는가’ 는 남는다. 뜻이 그렇다는 이유로 방법이 정당해지지 않는다 |
| 실용적 옹호 (라이헨바흐) | 자연에 규칙성이 있다면 귀납은 결국 그것을 찾아낸다. 없다면 어떤 방법도 못 찾는다. 그러니 귀납을 쓰는 것은 손해가 아니다 | 같은 논증이 무수히 많은 다른 규칙에도 그대로 성립한다. 귀납만 고를 근거가 되지 못한다 |
| 규칙 순환은 다르다 | 결론을 전제로 쓴 것이 아니라 규칙을 그 규칙으로 지지한 것이므로 나쁜 순환이 아니다 | 같은 방식으로 아무 규칙이나 자기 자신을 지지할 수 있다. 늘 틀린 답을 내는 규칙도 자기 기준으로는 옳다고 나온다 |
| 외재주의 (6장의 신빙론) | 귀납이 실제로 믿을 만한 과정이면 그것으로 정당화된다. 우리가 그것을 증명해 보일 필요는 없다 | 흄이 물은 것이 바로 ‘실제로 믿을 만한가’ 였다면 이 답은 물음을 되풀이한다 |
| 귀납을 버린다 (포퍼) | 과학은 추측하고 반증할 뿐 귀납하지 않는다. 정당화할 귀납이 애초에 없다 | 반증을 견딘 이론을 앞으로도 쓰겠다는 판단 자체가 귀납이다. 9장에서 다시 본다 |
표의 셋째 줄과 넷째 줄이 6장과 이어진다. 규칙 순환을 허용하자는 쪽은 정당화가 어디선가는 멈춰야 한다는 토대론의 문제의식을 귀납에 옮긴 것이고, 외재주의 쪽은 정당화의 조건을 믿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세상 쪽으로 옮긴 6장의 그 수를 그대로 쓴다. 인식론에서 갈린 자리가 여기서 다시 갈린다.
이 문서는 다섯 중 어느 하나를 고르지 않는다. 고를 만한 근거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각 응답이 무엇을 사고 그 값으로 무엇을 파는지를 보이는 것까지다.
굿맨의 새 수수께끼
흄의 문제는 "귀납을 해도 되는가"를 묻는다. 넬슨 굿맨은 그 물음을 인정한 뒤에 다른 물음을 얹었다. 귀납을 해도 된다고 치자. 그런데 무엇을 귀납하는가. 이것을 귀납의 새 수수께끼(the new riddle of induction)라 한다.
굿맨은 낱말 하나를 새로 만들었다. 관례대로 음차해 그루(grue)라 적는다. 정의는 이렇다.
어떤 것이 그루다 — 그것이 시각
그러면 같은 자료가 두 가설을 똑같이 뒷받침한다.
- 가설 하나 — 모든 에메랄드는 초록이다. 예측:
뒤에 처음 보는 에메랄드도 초록일 것이다. - 가설 둘 — 모든 에메랄드는 그루다. 예측:
뒤에 처음 보는 에메랄드는 파랑일 것이다.
두 예측은 서로 어긋난다. 그런데 두 가설을 지지하는 증거는 한 개도 다르지 않다. 관찰을 더 해도 소용이 없다.
여기서 요점을 놓치기 쉽다. 이 수수께끼는 귀납이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굿맨이 보인 것은 이것이다 — 어떤 술어가 투사 가능한가(projectible), 즉 관찰된 사례에서 관찰되지 않은 사례로 옮겨 발라도 되는 술어인가를, 논리만으로는 고를 수 없다는 것. 귀납의 형식은 "지금까지 본
곧바로 나오는 응답이 있다. "그루는 시각을 언급하니까 인위적이다. 초록은 그렇지 않다." 굿맨은 이 응답을 미리 막아 두었다. 짝이 되는 낱말을 하나 더 만들면 된다. 블린(bleen) — 시각
굿맨 자신의 답은 정착(entrenchment)이었다. "초록"은 실제로 오랫동안 투사되어 온 술어이고 "그루"는 아니다. 그러니 정착된 술어를 쓰라는 것이다. 이 답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는지는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서술이지,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정당화가 아니다. 굿맨도 그 점을 감추지 않았다. 새 수수께끼 역시 합의된 해법이 없다.
확증 — 증거가 가설을 뒷받침한다는 것
앞 절들이 물은 것은 "귀납해도 되는가"였다. 이제 물음을 바꾼다. 어떤 관찰이 어떤 가설을 뒷받침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을 확증(confirmation)이라 하고, 이 물음은 흄의 문제와 별도로 다룰 수 있다.
출발점으로 삼기 좋은 규칙이 둘 있다. 첫째는 니코 조건(Nicod condition)이다. "모든
둘째는 동치 조건(equivalence condition)이다. 논리적으로 동치인 두 가설은 같은 관찰로 확증된다. 이것도 그럴듯하다. 같은 것을 말하는 두 문장이 증거를 다르게 받는다면, 증거가 세상이 아니라 문장을 적은 방식에 반응하는 셈이다.
그런데 두 조건을 함께 두면 이상한 것이 나온다. 카를 헴펠(Carl Gustav Hempel, 1905–1997)이 정리한 까마귀의 역설(the raven paradox)이다.
-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검지 않은 것은 모두 까마귀가 아니다"와 논리적으로 동치다. 조건문의 앞뒤를 맞바꾸고 둘 다 부정한 것을 대우라 하는데, 조건문과 그 대우는 언제나 같은 값을 갖는다. 조건문과 그 대우가 언제나 같은 값을 갖는다는 것은 논리학 문서 6장이 진리표로 확인해 준다.
- 니코 조건에 따르면, 검지 않으면서 까마귀가 아닌 것을 하나 관찰하면 둘째 문장이 확증된다. 흰 구두가 그런 것이다.
- 동치 조건에 따르면, 둘째 문장을 확증하는 것은 첫째 문장도 확증한다.
- 그러므로 흰 구두를 하나 보는 것이 "모든 까마귀는 검다"를 확증한다.
결론이 이상하게 들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까마귀를 보지 않고 방 안에서 구두만 들여다보면서 조류학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응은 세 갈래다.
| 대응 | 무엇을 버리는가 | 대가 |
|---|---|---|
| 니코 조건을 버린다 | ‘F 이고 G 인 사례가 확증한다’ 를 일반 규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 그러면 무엇이 확증인지를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
| 동치 조건을 버린다 | 논리적으로 동치인 문장이 증거를 다르게 받을 수 있다고 본다 | 확증이 세상이 아니라 표기 방식에 반응하게 된다. 대부분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
| 결론을 받아들인다 | 흰 구두가 확증한다는 것을 인정하되, 확증에 정도가 있다고 본다 | ‘얼마나’ 를 재는 도구가 따로 필요하다. 그것이 다음 절이다 |
셋째 길이 지금 가장 널리 쓰인다. 흰 구두도 확증하기는 하되 그 몫이 극히 작다는 것이다. 왜 작은가. 세상에서 검지 않은 것은 까마귀보다 압도적으로 많고, 그중 하나를 집어 까마귀가 아님을 확인하는 일은 가설이 틀렸을 자리를 거의 훑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거의"를 숫자로 만들려면 확률이 필요하다.
베이즈 갱신 — 확증을 정도로 재기
앞 절의 셋째 길이 요구한 도구가 확률이다. 확률의 기초는 확률 문서가 다루므로 여기서는 쓸 것만 꺼낸다.
가설을
낱말만 붙여 두자.
이 식을 확증에 쓰는 방식은 간단하다.
실제 비교에는 오즈(odds) 형태가 편하다. 확률
짧게 한 번 돌려 보자. 어떤 동전이 공정하다는 가설과 앞면이 나올 확률이 0.8 이라는 가설을 놓고, 둘의 사전 확률을 각각 0.5 로 두었다고 하자. 앞면이 다섯 번 연달아 나왔다. 우도는 각각
사전 확률은 어디서 오는가
위 예제가 짚은 자리를 조금 더 파 보자. 앞의 동전 계산에서 두 가설에 0.5씩 준 것은 어디서 온 값인가. "아무 정보가 없으니 똑같이 나누자"는 것이 흔한 대답이고, 이것을 무차별 원리라 부른다. 그런데 이 원리는 곧바로 곤란해진다. 무엇을 "같은 경우"로 셀지에 따라 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앞면 확률이 0.5 인가 아닌가로 나누면 반반이지만, 앞면 확률이 0에서 1 사이의 어느 값인지로 나누면 0.5 는 점 하나가 되어 확률이 0 이 된다. 같은 무지에서 다른 사전 확률이 나온다.
사전 확률을 얼마로 잡느냐는 결론을 크게 흔든다. 앞의 동전 예에서 "앞면 확률 0.8" 가설의 사전 확률을 0.5 대신 0.001 로 두면, 우도비 10.5 를 곱해도 사후 오즈는 여전히 0.0105 에 그쳐 사후 확률이 약 0.01 이다. 같은 증거, 같은 계산, 전혀 다른 결론.
수렴 정리가 보장하는 것과 보장하지 않는 것
여기에 대한 표준적인 위안이 수렴 정리다. 대략 이렇게 말한다. 사전 확률이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증거를 계속 받으면, 두 사람의 사후 확률은 서로 가까워진다.
이 정리가 보장하는 것은 진짜다. 그러나 보장하지 않는 것을 함께 적지 않으면 위안이 과해진다.
| 보장하는 것 | 보장하지 않는 것 |
|---|---|
| 증거가 충분히 쌓이면 서로 다른 사전 확률의 차이가 씻겨 나간다 | 얼마나 쌓여야 하는지. 유한한 증거는 극단적인 사전 확률에 눌릴 수 있다 |
| 참인 가설이 후보 목록에 들어 있으면 결국 그쪽으로 간다 | 참인 가설이 목록에 들어 있다는 것. 목록에 없으면 수렴할 곳도 없다 |
| 0도 1도 아닌 사전 확률은 증거에 따라 움직인다 | 0으로 놓은 가설이 움직이는 것. 사전 확률 0은 어떤 증거로도 0 그대로다 |
| 두 사람이 같은 증거를 본다는 조건 아래에서의 접근 | 두 사람이 같은 것을 증거로 치는 것. 무엇이 자료인지가 갈리면 이 조건이 깨진다 |
마지막으로 하나 더. 수렴 정리의 "결국"은 확률 1로라는 뜻이고, 그 확률은 다시 각자의 사전 확률로 잰 값이다. 즉 "내 사전 확률에 비추어 보면 나는 결국 참에 수렴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말이 된다. 이 문장의 모양을 앞의 규칙 순환과 견주어 보라. 같은 자리에 서 있다. 베이즈주의가 흄의 문제를 우회한다는 표준적 평가는 여기서 나온다.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
마지막으로 첫 절에서 이름만 대 두었던 세 번째 갈래를 본다.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은 관찰된 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가설이 참이라고 결론짓는 추론이다. 이름은 길버트 하먼(Gilbert Harman)이 1965년 논문에서 붙였고, 그 뒤로 과학철학과 인식론 양쪽에서 널리 쓰인다.
이 추론은 앞의 두 갈래로 환원되지 않는다. 열거적 귀납은 이미 본 것과 닮은 것을 예측하지만,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결론에 놓을 수 있다. 발자국에서 사람을, 증상에서 병원체를, 안개상자의 궤적에서 전자를 결론짓는 것이 이 걸음이다. 9장의 실재론 논쟁이 통째로 이 걸음의 자격을 두고 벌어진다.
"더 나은 설명"을 재는 기준으로 흔히 드는 것은 넷쯤이다. 더 단순한가, 이미 아는 것과 잘 어울리는가, 더 많은 것을 설명하는가, 새로운 예측을 내놓는가. 실제 판단에서 이 기준들이 일하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왜 이 기준을 만족하는 설명이 더 참에 가까운가에 아직 좋은 답이 없다는 것이다. 단순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다.
두 번째 약점은 더 날카롭다. 이 추론은 후보 목록 안에서 최선을 고른다. 그런데 목록이 빠짐없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얻는 것은 "최선의 설명"이 아니라 "내가 떠올린 것 중 최선의 설명"이고, 떠올린 것들이 모두 나쁘면 그중 최선도 나쁘다. 이 반론은 9장에서 반 프라센이 실재론을 공격할 때 다시 나온다.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 용어·인물 | 뜻 |
|---|---|
| 확장적 추론(ampliative inference) | 결론이 전제에 들어 있는 것을 넘어서는 추론. 반례가 늘 있으므로 예외 없이 부당하다 |
| 열거적 귀납(enumerative induction) | 지금까지 본 F 가 모두 G 였다는 데서 다음 F 도 G 라고 결론짓는 추론 |
| 유비 논증(argument from analogy) | 여러 점에서 닮은 둘이 남은 한 점에서도 닮았다고 결론짓는 추론 |
|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 | 관찰한 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가설이 참이라고 결론짓는 추론. 관찰한 적 없는 종류의 것을 결론에 놓을 수 있다 |
| 흄 | 귀납을 정당화하는 순환 없는 논증이 없음을 보였다. 이 문제가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것이 표준적 서술이다 |
| 자연의 제일성(the uniformity of nature) | 관찰하지 않은 부분도 관찰한 부분과 같은 규칙을 따른다는 원리. 논증을 타당하게 만들지만 그 자체가 귀납으로만 지지된다 |
| 규칙 순환(rule-circularity) | 문제 되는 추론 규칙을 그 규칙을 지지하는 논증 안에서 쓰는 것. 전제 순환과 구별되지만 대가가 있다 |
| 굿맨 | 귀납의 새 수수께끼를 세웠다. 그루와 블린, 정착 개념이 그의 것이다 |
| 그루(grue) | 시각 t 이전에 관찰되었고 초록이거나, 그렇지 않고 파랑인. 블린(bleen)은 초록과 파랑을 바꾼 짝 |
| 투사 가능성(projectibility) | 술어를 관찰된 사례에서 관찰되지 않은 사례로 옮겨 발라도 되는 성질. 논리만으로는 고를 수 없다 |
| 정착(entrenchment) | 술어가 실제로 투사되어 온 이력. 굿맨의 답이지만 서술이지 정당화가 아니다 |
| 확증(confirmation) | 증거가 가설을 뒷받침한다는 관계. 베이즈 식 정의로는 사후 확률이 사전 확률보다 커지는 것 |
| 니코 조건(Nicod condition) | ‘모든 F 는 G 다’ 는 F 이면서 G 인 사례로 확증된다는 규칙 |
| 동치 조건(equivalence condition) | 논리적으로 동치인 가설은 같은 관찰로 확증된다는 규칙 |
| 까마귀의 역설(the raven paradox) | 두 조건을 함께 두면 흰 구두가 ‘모든 까마귀는 검다’ 를 확증하게 된다. 헴펠이 정리했다 |
| 사전 확률 / 사후 확률 / 우도 | 증거 전의 믿음 / 증거 후의 믿음 / 가설이 참일 때 그 증거가 나올 확률 |
| 수렴 정리 | 사전 확률이 달라도 증거가 쌓이면 사후 확률이 가까워진다는 결과. 참인 가설이 후보에 있어야 하고 사전 확률이 0이 아니어야 한다 |
| 스트로슨 / 라이헨바흐 / 포퍼 | 흄의 문제에 각각 물음의 해소·실용적 옹호·귀납 포기로 응답했다. 어느 응답도 합의되지 않았다. 포퍼는 9장의 주역이다 |
다음 장은 이 장의 물음을 실제 활동에 대어 본다. 귀납이 정당화되지 않았는데도 과학은 잘 굴러간다. 그렇다면 과학이 하는 일은 무엇이고, 무엇이 과학이 아닌 것과 과학을 가르는가. 포퍼의 답이 이 장의 마지막에 이름만 나왔는데, 다음 장이 그 답의 전모와 그 답이 부딪힌 벽을 다룬다.
이 장의 출처
아래는 이 장을 쓰면서 확인한 자료다. 이 문서는 어느 것도 옮기지 않았다.
- SEP — The Problem of Induction
- SEP — Nelson Goodman (새 수수께끼)
- SEP — Bayesian Epistemology
- SEP — Abduction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
과학철학
과학은 우리가 가진 가장 믿을 만한 앎의 방식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무엇이 그것을 그렇게 만드는지, 그리고 그 앎이 정확히 무엇에 대한 앎인지는 생각보다 답하기 어렵다. 이 장은 그 두 물음을 다룬다.
이 장에서 답할 질문은 둘이다. 무엇이 과학이고 무엇이 과학이 아닌가. 그리고 성공한 과학 이론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하는 말을 참이라고 믿어야 하는가.
8장에서 가져오는 것이 넷이다. 흄의 문제(아직 풀리지 않았다), 확증,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 그리고 8장 마지막에서 본 후보 목록이 빠짐없다는 보장이 없다는 지적이다. 마지막 것이 이 장 끝의 실재론 논쟁에서 결정적인 무기가 된다.
이 장은 20세기 과학철학이 실제로 지나온 순서를 따라간다. 반증주의가 서고, 뒤엠-콰인 논제가 그것을 흔들고, 쿤이 논의의 축을 논리에서 역사로 옮기고, 그 뒤에 실재론 논쟁이 남는다. 개별 과학의 내용은 가르치지 않는다. 과학사 사례는 논점을 세우는 데 필요한 만큼만 쓴다.
구획 문제 — 무엇이 과학인가
구획 문제(the demarcation problem)는 과학과 과학 아닌 것을 가르는 기준을 찾는 문제다. 왜 이런 것을 묻는가. 학교에서 무엇을 과학으로 가르칠지, 법정에서 어떤 증언을 전문가 증언으로 받을지 같은 실제 결정이 여기에 걸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철학의 물음으로서는 더 앞선 이유가 있다. 과학의 결론을 특별히 믿을 만하다고 여긴다면, 그 특별함이 어디서 오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낱말 하나를 정해 두자. 이 장에서 관찰 가능(observable)하다는 것은 사람이 도움 없이 알아볼 수 있다는 뜻으로 쓴다. 계기 바늘의 움직임, 시험관 안의 색 변화, 사진 건판의 무늬는 관찰 가능하다. 전자, 유전자의 배열, 지구 핵의 온도는 관찰 불가능(unobservable)하다. 이 구별에 정확한 경계가 있는지는 뒤에서 다시 다툰다. 지금은 분명한 사례가 양쪽에 있다는 것만 있으면 된다.
가장 먼저 시도된 기준은 검증 가능성이다. 관찰로 참임을 보일 수 있는 주장만 과학이라는 것이다. 이 기준은 곧바로 무너진다. "모든 금속은 열을 받으면 늘어난다" 같은 전칭 명제는 유한한 관찰로 참임을 보일 수 없다. 그러면 자연법칙이 통째로 과학 바깥으로 밀려난다. 정작 걸러 내려던 것은 남고 걸러 내지 말아야 할 것이 걸러진다.
그림에 이름이 둘 나온다. 포퍼의 반증 가능성이 다음 절의 주제이고, 임레 라카토슈(Imre Lakatos, 1922–1974)의 연구 프로그램은 그 절 끝에서 다룬다. 넷째 갈래, 즉 하나의 기준은 없다는 쪽도 진지한 입장이다. 라우든(Larry Laudan)은 구획 기준을 찾는 일 자체를 그만두자고 주장한 것으로 널리 인용된다. 그 대신 주장을 하나하나 증거에 비추어 평가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길에도 대가가 있다. 교육과 정책에서 무엇을 과학으로 다룰지에 답을 주지 못한다.
이 절의 결론을 미리 적어 두자. 구획 문제에는 합의된 답이 없다. 아래 두 절은 답을 찾는 과정이지 답이 아니다.
포퍼의 반증주의
8장에서 흄의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 한 줄 소개했던 포퍼가 여기서 본격적으로 나온다. 그는 기준의 방향을 뒤집었다. 참임을 보일 수 있느냐가 아니라 거짓임을 보일 수 있느냐를 묻자는 것이다. 이것이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이고, 이 기준을 중심에 놓는 입장이 반증주의(falsificationism)다.
왜 방향을 뒤집으면 사정이 나아지는가. 전칭 명제에는 논리적 비대칭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백조는 희다"를 확립하려면 모든 백조를 봐야 하지만, 무너뜨리는 데는 검은 백조 한 마리면 된다. 그리고 무너뜨리는 걸음은 연역이다. 전칭 명제가 참이면 이 새도 희어야 하는데 희지 않다, 그러므로 전칭 명제는 거짓이다 — "A 이면 B 다, B 가 아니다, 그러므로 A 가 아니다" 라는 형식이고 논리학 문서 4장이 이것을 후건 부정이라 부르며 타당함을 보인다. 8장이 그토록 애를 먹은 확장적 걸음이 여기에는 없다.
포퍼는 이 비대칭에서 과학의 방법 전체를 끌어냈다. 과학이 하는 일은 관찰을 모아 법칙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대담하게 추측하고 그 추측을 깨려고 애쓰는 것이다. 좋은 이론이란 많은 것을 설명하는 이론이 아니라 많은 것을 금지하는 이론이다. 금지하는 것이 많을수록 깨질 기회가 많고, 그런 이론이 깨지지 않고 버티면 그만큼 값이 있다.
여기서 포퍼의 유명한 구별이 나온다. 확인은 그것이 위험한 예측의 결과일 때만 값을 갖는다. 이론이 예측한 것이 이론 없이도 예상되는 것이라면 그 예측이 맞아도 알려 주는 바가 없다. 아인슈타인이 빛이 태양 곁에서 휜다고 예측했을 때, 그 예측은 관측 결과가 반대로 나올 수 있는 예측이었다. 관측이 그 예측과 맞았을 때 값이 있었던 것은 맞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편에 놓이는 것이 무엇이 일어나도 맞는 이론이다. 어떤 관찰이 나와도 그 틀 안에서 설명되고, 그래서 어떤 관찰도 그 틀에 반대되지 않는 이론이다. 포퍼가 실제로 든 예는 점성술,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심리학이었다. 그 판정이 옳았는지는 별개의 문제이고 지금도 다툰다. 특히 정신분석이 정말 아무 관찰도 배제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반론이 많다. 그러니 여기서는 사례가 아니라 기준 자체만 가져가는 편이 낫다. 기준은 이렇다. 어떤 관찰이 나오면 이 이론을 버리겠는가. 이 물음에 답할 수 없으면 그 이론은 반증 가능하지 않다.
포퍼는 이 기준을 지키기 위한 규율도 요구했다. 예측이 빗나갔을 때 임시방편(ad hoc)으로 조건을 덧붙여 이론을 구해 내지 말라는 것이다. 덧붙인 조건이 새로운 검사거리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오직 실패를 가리는 데만 쓰인다면, 그 이론은 반증 가능성을 그만큼 잃는다.
반증주의가 걸리는 곳
반증주의는 매력적이고, 과학자들이 자기 일을 이야기할 때 지금도 자주 빌려 쓴다. 그런데 논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곤란한 곳이 여럿 있다.
| 걸리는 곳 | 무엇이 문제인가 |
|---|---|
| 확률적 가설 | ‘이 동전이 앞면이 나올 확률은 0.5 다’ 는 어떤 관찰열로도 논리적으로 반증되지 않는다. 앞면만 백 번 나와도 그 이론과 모순되지 않는다 |
| 관찰 진술도 틀릴 수 있다 | 반증하는 쪽은 관찰 진술이다. 그런데 관찰 진술 역시 틀릴 수 있으므로, 어긋남이 생겼을 때 이론이 아니라 관찰 쪽을 의심할 수도 있다 |
| 검사되는 것은 가설 하나가 아니다 | 다음 절의 뒤엠-콰인 논제다. 예측을 내놓는 것이 가설과 보조 가정의 묶음이므로 어긋남이 어느 부분을 겨냥하는지 논리가 정해 주지 않는다 |
| 반증을 견딘 이론을 쓰는 일 | 포퍼는 견딘 이론을 ‘입증되었다’ 고만 하고 참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이론으로 다리를 놓는 것은 앞날에 대한 판단이다. 8장의 흄이 여기서 되돌아온다 |
| 실제 과학사와 맞지 않는다 | 어긋남이 생겼다고 이론을 버린 일이 드물다. 대개는 문제로 기록해 두고 이론을 계속 쓴다. 다음다음 절의 쿤이 이것을 파고든다 |
넷째 줄을 조금 더 보자. 포퍼는 귀납을 쓰지 않는다고 했고, 그것이 8장에서 본 흄에 대한 그의 응답이었다. 그런데 반증을 견딘 이론과 이미 반증된 이론 가운데 앞엣것을 골라 쓰겠다는 판단은 과거의 성적을 근거로 앞날을 정하는 판단이다. 이것이 귀납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포퍼는 이것을 합리적 선호이지 믿음이 아니라고 답했지만, 이 답이 충분하다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라카토슈는 반증주의를 살리려고 단위를 바꾸었다. 검사받는 것은 이론 하나가 아니라 연구 프로그램(research programme)이라는 것이다. 프로그램에는 건드리지 않기로 한 견고한 핵이 있고, 그 둘레에 고쳐 쓸 수 있는 보호대가 있다. 어긋남이 생기면 보호대를 고친다. 여기까지는 임시방편과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라카토슈는 갈림을 하나 넣었다. 그 수정이 새로운 예측을 낳고 그중 일부가 맞으면 진행적이고, 실패를 가리기만 하면 퇴행적이다. 이 기준은 실제 과학사를 훨씬 잘 그려 내지만, 대가가 있다. 진행인지 퇴행인지는 시간이 지나야 갈린다. 지금 이 이론이 과학이냐는 물음에 지금 답하지 못한다.
뒤엠-콰인 논제와 미결정성
앞 절의 셋째 반론을 정면으로 본다. 피에르 뒤엠(Pierre Duhem, 1861–1916)은 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로서 물리학의 실험이 실제로 무엇을 검사하는지를 따졌고, 뒤에 콰인이 그 지적을 훨씬 넓은 주장으로 밀고 나갔다. 둘을 묶어 뒤엠-콰인 논제(the Duhem–Quine thesis)라 한다.
논제는 간단하다. 가설 하나만으로는 관찰 예측이 나오지 않는다. 예측을 내놓으려면 보조 가정이 필요하다. 계기가 제대로 잰다, 시료가 오염되지 않았다, 배경 이론이 옳다, 다른 원인이 끼어들지 않았다 같은 것들이다. 초기 조건도 필요하다. 그러니 검사에 걸리는 것은 가설이 아니라 묶음이다.
예측이 빗나갔다고 하자. 후건 부정이 알려 주는 것은 "가설과 보조 가정과 초기 조건이 모두 참일 수는 없다"뿐이다. 무엇을 버릴지는 논리가 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가 있다. 천왕성의 궤도가 뉴턴 역학의 예측과 어긋났을 때, 천문학자들은 역학을 버리지 않고 보조 가정을 고쳤다. 아직 관측하지 못한 행성이 하나 더 있다고 놓은 것이다. 그 자리에서 해왕성이 발견되었다. 뒤에 수성의 궤도가 또 어긋났을 때 같은 수를 썼다. 안쪽에 아직 못 본 행성이 있다고 놓은 것이다. 이번에는 그런 행성이 없었고, 결국 바뀐 것은 역학 쪽이었다.
같은 모양의 대응이 한 번은 옳았고 한 번은 틀렸다. 그리고 두 경우를 미리 가를 논리적 규칙은 없었다. 뒤엠-콰인 논제의 무게가 여기에 있다.
콰인은 이 지적을 훨씬 세게 밀었다. 「경험주의의 두 도그마」(1951)에서 그는 우리의 믿음 전체가 가장자리에서만 경험과 맞닿는 하나의 그물이며, 어떤 진술이든 그물의 다른 곳을 충분히 고치면 참으로 지켜 낼 수 있고, 반대로 어떤 진술도 수정에서 면제되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까지 오면 논제는 검사의 논리에 대한 지적을 넘어 의미와 앎에 대한 전체론이 된다.
미결정성 — 두 가지를 갈라야 한다
미결정성(underdetermination)은 자료가 이론을 정해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주장에 쓰이므로 갈라 두어야 한다.
| 약한 판본 | 강한 판본 | |
|---|---|---|
| 무엇을 말하는가 | 어긋남이 생겼을 때 묶음의 어디를 고칠지 자료가 정해 주지 않는다 | 관찰 결과가 완전히 같은 서로 다른 이론이 있을 수 있다 |
| 근거 | 뒤엠-콰인 논제. 검사의 논리적 구조에서 곧바로 나온다 | 구성해 보이는 사례들. 우주 전체가 같은 비율로 커졌다는 가설 같은 것 |
| 얼마나 확실한가 | 거의 다툼이 없다 | 다툼이 많다. 실제 과학에서 나온 사례가 드물다는 것이 주된 반론이다 |
| 무엇을 위협하는가 | 반증주의의 깔끔한 그림 | 이론 선택이 증거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 전체 |
강한 판본에 대한 반론도 함께 적어 두어야 공평하다. 첫째, 경험적으로 동등한 이론을 실제로 두 개 내놓은 예가 매우 드물다. 대개는 "있을 수 있다"는 논증뿐이다. 둘째, 두 이론이 동등한지 판정하려면 무엇이 관찰 결과인지를 정해야 하는데, 그 판정 자체가 배경 이론에 기댄다. 배경 이론이 바뀌면 동등하던 두 이론이 갈릴 수 있다. 셋째, 자료가 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무것도 정해 주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단순성이나 다른 앎과의 어울림 같은 것이 남는데, 그것들이 참으로 이어지는가는 8장에서 본 대로 열린 문제다.
8장을 읽은 독자는 이 그림이 낯익을 것이다. 그루와 같은 모양이다. 자료를 남김없이 맞히는 후보가 여럿이고, 자료 바깥에서 갈라지며, 무엇을 고를지는 자료가 아닌 다른 것이 정한다. 8장에서는 그 다른 것이 술어의 선택이었고 여기서는 이론의 선택이다.
쿤 — 정상과학과 패러다임
토머스 쿤(Thomas Kuhn, 1922–1996)의 『과학혁명의 구조』(1962)는 논의의 축을 옮겼다. 포퍼와 라카토슈가 "과학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물었다면, 쿤은 과학자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가를 보고 거기서 출발했다.
그가 본 것은 이렇다. 성숙한 과학 분야의 연구자들은 이론의 기초를 다투며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대부분의 시간을 퍼즐을 푸는 데 쓴다. 정해진 틀 안에서 아직 계산되지 않은 값을 계산하고, 아직 재지 않은 것을 재고, 이론과 자료의 자릿수를 맞춘다. 이 틀이 패러다임(paradigm)이고, 이 시기의 활동이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다.
패러다임은 이론 하나가 아니다. 그 분야가 무엇을 좋은 문제로 치는지, 어떤 풀이를 풀린 것으로 인정하는지, 어떤 장치와 계산법을 쓰는지까지 포함한다. 쿤이 특히 강조한 것은 본보기 풀이다. 교과서에 실린 몇몇 모범 사례를 흉내 내면서 배우는 것이 그 분야에 들어가는 길이고, 규칙을 명시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정상과학은 패러다임을 검사하지 않는다. 어긋남이 나오면 그것은 패러다임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아직 풀지 못한 퍼즐로 기록된다. 이런 어긋남을 변칙 사례(anomaly)라 한다. 변칙은 늘 있다. 변칙이 쌓이고, 끈질기고, 그 분야가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를 건드릴 때에야 위기가 온다. 그리고 위기가 왔다고 패러다임이 버려지지도 않는다. 쓸 만한 대안이 나와 있을 때에만 버려진다.
여기가 포퍼와 정면으로 갈리는 자리다. 포퍼의 그림에서는 어긋남 하나가 이론을 무너뜨린다. 쿤이 보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안 없이 이론을 버리는 것은 연구를 그만두는 것이지 과학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약불가능성 — 무엇이 아닌지가 더 중요하다
패러다임이 바뀌는 일을 쿤은 과학혁명이라 불렀고, 혁명 전후의 두 패러다임 사이의 관계를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이라 불렀다. 이 낱말이 이 장에서 가장 자주 오해되는 낱말이므로 정확히 적어 둔다.
공약불가능하다는 것은 공통의 척도가 없다는 뜻이다. 낱말 그대로 함께 잴 자가 없다는 말이다. 세 갈래로 나타난다. 첫째, 무엇을 좋은 문제로 치고 무엇을 풀린 것으로 칠지가 함께 바뀐다. 둘째, 같은 낱말이 두 패러다임에서 같은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셋째, 무엇이 자료로 보이는지가 이론에 따라 달라진다. 셋째 것을 관찰의 이론 적재성(theory-ladenness of observation)이라 하고, 핸슨(Norwood Russell Hanson)이 이름을 붙였다.
이제 이 낱말이 뜻하지 않는 것을 적는다.
| 오해 | 쿤이 실제로 말한 것 |
|---|---|
| 두 패러다임을 비교할 수 없다 | 비교는 가능하다. 다만 규칙 하나를 적용해 결판을 내는 방식으로 되지 않는다 |
| 두 패러다임을 번역할 수 없다 | 어렵고 손실이 있을 뿐이다. 다른 패러다임의 언어를 배우는 일은 가능하고, 실제로 과학사가가 하는 일이 그것이다 |
| 아무 이론이나 똑같이 좋다 | 쿤은 정확성·일관성·넓이·단순성·다산성을 이론 선택의 공통된 값으로 꼽았다. 그 값들은 패러다임을 가로질러 공유된다 |
| 이론 선택이 비합리적이다 | 값들이 서로 충돌하고 사람마다 무게를 다르게 주기 때문에 알고리즘이 되지 않을 뿐이다. 알고리즘이 없다는 것과 이유가 없다는 것은 다르다 |
셋째 줄과 넷째 줄이 이 절의 핵심이다. 쿤은 이론 선택에 공통된 값이 있다고 보았다. 없는 것은 그 값들에 무게를 배분하는 공통의 규칙이다. 두 사람이 같은 값을 인정하면서도 단순성과 넓이 중 어느 쪽을 더 치느냐가 달라 다른 이론을 고를 수 있고, 쿤이 보기에 그것은 과학의 결함이 아니라 위험을 분산하는 장치였다. 모두가 같은 규칙을 따르면 공동체 전체가 한꺼번에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쿤 자신이 상대주의 독법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 『과학혁명의 구조』 뒤에 붙인 후기와 그 뒤의 글들에서 그는 자기 주장이 "과학은 진보하지 않는다"나 "과학은 군중의 취향이다"로 읽히는 데 반대했다. 그가 부정한 것은 진리에 가까워지는 것으로서의 진보였고, 문제 푸는 능력의 축적으로서의 진보는 인정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쿤을 정반대로 읽게 된다.
마지막으로 하나. 뒤에 쿤은 공약불가능성을 국소적인 것으로 좁혔다. 두 패러다임의 언어 전체가 아니라 서로 얽혀 있는 낱말 몇 개의 무리가 옮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좁힌 판본이 지금 논의의 기준이 되는 판본이다.
과학적 실재론 논쟁
마지막 물음이다. 성공한 과학 이론이 관찰 불가능한 것에 대해 하는 말을 참이라고 믿어야 하는가.
과학적 실재론(scientific realism)은 그렇다고 답한다. 좀 더 정확히 하면 세 가지 주장의 묶음이다. 관찰 불가능한 것들이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이론의 문장은 그것들에 대해 문자 그대로 참이거나 거짓이며, 성숙하고 예측에 성공한 이론은 대체로 참에 가깝다. 셋째 것이 실제로 다투어지는 대목이다.
실재론이 다수설이다. 표준적인 과학철학 교과서가 실재론을 기본으로 놓고 서술하며, 반실재론 쪽도 자기 입장을 실재론에 대한 반론의 형태로 제시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주요 소수설이 있고, 그 소수설이 만만치 않다.
기적 불가 논증
실재론의 대표 논증은 기적 불가 논증(the no-miracles argument)이다. 힐러리 퍼트넘의 정식화가 널리 인용된다. 논증은 이렇다. 과학 이론은 예측을 놀랄 만큼 잘 맞힌다. 특히 이론을 만들 때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새로운 종류의 현상까지 맞힌다. 이론이 말하는 것이 거짓이라면 이 성공은 설명되지 않는 우연이 된다. 그러므로 이론은 대체로 참이다.
논증의 모양을 보면 8장의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이다. 과학의 성공이라는 사실이 있고,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가설이 "이론이 참이다"라는 것이다.
비관적 귀납
반대편의 대표 논증은 비관적 귀납(the pessimistic induction)이다. 라우든이 정리한 형태가 널리 인용된다. 과거를 보면 예측에 성공했으나 지금은 거짓으로 여겨지는 이론이 줄줄이 있었다. 열을 물질로 본 이론, 빛을 나르는 매질을 놓은 이론, 그 밖에도 많다. 그 이론들도 자기 시대에는 성공했다. 그러니 지금 성공하고 있는 이론도 뒤에 거짓으로 판명될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논증은 기적 불가 논증의 전제를 정면으로 친다. 기적 불가 논증은 성공이 참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비관적 귀납은 성공했으면서 참이 아니었던 사례를 대는 것이다.
특히 날카로운 사례가 하나 있다. 프레넬(Augustin-Jean Fresnel, 1788–1827)의 빛 이론은 원판 그림자 한가운데에 밝은 점이 생긴다는 뜻밖의 예측을 내놓았고, 그 점이 실제로 관측되었다. 이론을 만들 때 고려하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현상을 맞힌 것이니 기적 불가 논증이 요구하는 조건을 정확히 만족한다. 그런데 그 이론은 빛을 나르는 매질을 놓았고, 그런 매질은 없었다.
실재론 쪽의 표준적인 응답은 가려내기다. 폐기된 이론에서 성공에 실제로 기여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나누어 보면, 기여한 부분은 대개 후속 이론에 보존된다는 것이다. 프레넬의 경우 예측을 실제로 낳은 것은 매질에 대한 그림이 아니라 파동의 수학적 관계였고, 그 관계는 뒤의 이론에 그대로 살아남았다. 이 응답을 끝까지 밀면 구조 실재론(structural realism)이 된다. 이론이 옮겨 나르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구조라는 입장이고, 워럴(John Worrall)이 이 이름으로 정리했다.
반 프라센의 구성적 경험주의
주요 소수설을 가장 강한 형태로 적는다. 바스 반 프라센(Bas van Fraassen, 1941– )의 구성적 경험주의(constructive empiricism)는 『과학적 이미지』(1980)에서 제시되었다.
주장은 이렇다. 과학의 목표는 참인 이론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적합한 이론을 내놓는 것이다. 어떤 이론이 경험적으로 적합(empirically adequate)하다는 것은 그 이론이 관찰 가능한 것들에 대해 말하는 바가 모두 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고 믿는 것에 더해, 그 틀 안에서 연구하겠다는 실천적 개입을 하는 것이다.
무엇이 이 입장을 강하게 만드는지 짚어 두자. 오해를 하나씩 걷어 내면 보인다.
- 이론이 뜻이 없다고 하지 않는다. 반 프라센은 이론의 문장이 문자 그대로 참이거나 거짓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 점에서 도구주의와 갈린다. 전자에 대한 문장은 참이거나 거짓이고, 다만 우리에게 그중 어느 쪽인지 믿을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 과학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구성적 경험주의자는 실재론자와 똑같은 이론을 쓰고 똑같은 실험을 하고 똑같은 예측을 한다. 갈리는 것은 실험실 바깥의 한 걸음뿐이다.
- 회의주의가 아니다. 관찰 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믿는다. 문제 삼는 것은 증거가 미치는 범위를 넘어서는 믿음이다.
논증은 둘이다. 첫째, 증거는 관찰 가능한 데까지만 미친다. 경험적으로 동등한 두 이론이 있다면 자료는 둘 사이에서 침묵한다. 그런데도 하나를 참이라고 믿는 것은 증거가 주지 않은 것을 믿는 일이다. 둘째, 기적 불가 논증이 기대는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이 정당화되지 않았다. 8장에서 본 대로 우리는 후보 목록이 빠짐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얻는 것은 "최선의 설명"이 아니라 "떠올린 것 중 최선"이다. 그리고 실재론자가 관찰 불가능한 것에 대해 그 추론을 써도 된다고 하려면 별도의 논증이 필요한데, 기적 불가 논증이 바로 그 추론을 쓰고 있다. 논증이 그 자격을 미리 가정한다.
반 프라센은 과학의 성공에 대해 다른 설명을 내놓는다. 이론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태어나고, 예측이 어긋나는 이론은 곧바로 버려진다. 그러니 지금 남아 있는 이론이 잘 맞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 잘 맞지 않는 것들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다윈식 설명이라 불렀다. 이 설명이 옳다면 과학의 성공을 설명하는 데 이론의 참을 끌어올 필요가 없다.
이 입장이 치르는 대가도 적어 두어야 한다. 관찰 가능성이라는 선을 그어야 한다. 맨눈으로 보는 것과 현미경으로 보는 것과 안개상자의 궤적을 보는 것 사이에 원리적인 선이 있는가. 반 프라센은 그 선이 흐릿하다는 것을 인정하되, 흐릿한 술어에도 분명한 사례가 있다고 답한다. 그리고 관찰 가능성은 우리 종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사실이지 세상의 구조에 대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반론은 여기를 친다. 인식적으로 중요한 선이 왜 하필 우리 감각기관의 한계와 일치해야 하는가.
왜 결판이 나지 않는가
두 대표 논증이 서로를 정확히 겨누고 있는데도 결판이 나지 않는 이유가 있다.
| 논증 | 가장 강한 반론 |
|---|---|
| 기적 불가 논증 | 성공한 이론만 뒤에서 골라 놓고 성공이 놀랍다고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 논증은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을 쓰는데, 반실재론자가 문제 삼는 것이 바로 그 추론이다 |
| 비관적 귀납 | 목록이 대표적인가. 성숙한 이론과 새로운 예측이라는 조건을 걸면 사례가 크게 줄어든다. 그리고 이 논증 자체가 귀납이므로 8장의 문제를 그대로 짊어진다 |
둘째 줄의 마지막 지적은 조심해서 써야 한다. "귀납이니까 못 믿는다"는 실재론자가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실재론자는 과학의 귀납을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쓸 수 있는 형태는 표본이 대표적인지를 묻는 것이다. 과거의 폐기된 이론들이 지금의 성숙한 이론들과 같은 부류에 드는가. 실재론자는 아니라고 하고, 반실재론자는 그 구별이 사후에 그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 논쟁은 열려 있다. 다수설은 실재론이지만, 그것은 반대편이 논파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실재론 쪽의 대가가 작다고 판단한다는 뜻이다.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 용어·인물 | 뜻 |
|---|---|
| 구획 문제(the demarcation problem) | 과학과 과학 아닌 것을 가르는 기준을 찾는 문제. 합의된 답이 없다 |
| 관찰 가능 / 관찰 불가능(observable / unobservable) | 사람이 도움 없이 알아볼 수 있는 것 / 없는 것. 경계가 흐릿하다는 것이 논쟁거리다 |
|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 | 그 이론을 거짓으로 만들 관찰을 미리 말할 수 있음. 포퍼의 구획 기준이다 |
| 반증주의(falsificationism) | 포퍼의 입장. 과학은 대담하게 추측하고 그 추측을 깨려고 애쓰는 일이지, 관찰을 모아 법칙을 뽑는 일이 아니다 |
| 임시방편(ad hoc) | 실패를 가리기만 하고 새 검사거리를 낳지 않는 수정. 포퍼가 금지한 것 |
| 연구 프로그램(research programme) | 라카토슈가 검사 단위로 삼은 것. 건드리지 않는 견고한 핵과 고쳐 쓰는 보호대로 이루어진다. 새 예측을 낳으면 진행적, 실패를 가리기만 하면 퇴행적이다 |
| 뒤엠-콰인 논제(the Duhem–Quine thesis) | 가설은 홀로 검사되지 않는다. 예측을 내는 것은 가설과 보조 가정과 초기 조건의 묶음이다. 뒤엠과 콰인 |
| 미결정성(underdetermination) | 자료가 이론을 정해 주지 않음. 약한 판본은 어디를 고칠지 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 강한 판본은 경험적으로 동등한 이론이 여럿이라는 것 |
| 쿤 | 『과학혁명의 구조』(1962). 논의의 축을 규범에서 역사로 옮겼다 |
| 패러다임(paradigm) | 이론·문제·풀이 방식·본보기 사례를 함께 묶은 틀. 정상과학이 그 안에서 이루어진다 |
| 정상과학(normal science) / 변칙 사례(anomaly) / 위기 / 과학혁명 | 패러다임 안의 퍼즐 풀이 / 풀리지 않는 어긋남 / 기초를 다시 묻는 시기 / 패러다임의 교체 |
|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 두 패러다임을 함께 잴 공통 척도가 없음. 비교 불가능이나 번역 불가능을 뜻하지 않는다. 쿤은 상대주의 독법을 거부했다 |
| 관찰의 이론 적재성(theory-ladenness of observation) | 무엇이 자료로 보이는지가 이론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핸슨이 이름 붙였다 |
| 과학적 실재론(scientific realism) | 성숙하고 성공한 이론은 관찰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도 대체로 참이라는 입장. 다수설이다 |
| 기적 불가 논증(the no-miracles argument) | 이론이 거짓이라면 예측의 성공이 기적일 것이라는 실재론의 논증. 퍼트넘의 정식화가 널리 인용된다 |
| 비관적 귀납(the pessimistic induction) | 성공했으나 거짓으로 판명된 과거 이론들을 들어 지금 이론도 그럴 것이라고 보는 논증. 라우든이 정리했다 |
| 구성적 경험주의(constructive empiricism) | 과학의 목표는 경험적 적합성이며 관찰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다는 입장. 반 프라센의 주요 소수설 |
| 경험적 적합성(empirical adequacy) | 이론이 관찰 가능한 것들에 대해 말하는 바가 모두 참임 |
| 다윈식 설명 | 과학의 성공을 이론의 참이 아니라 이론 사이의 도태로 설명하는 것. 반 프라센이 기적 불가 논증에 맞세운 대안 설명이다 |
| 도구주의(instrumentalism) / 구조 실재론(structural realism) | 이론을 계산 장치로만 보는 입장 / 이론이 옮겨 나르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구조라는 입장. 워럴이 정리했다 |
여기까지가 앎에 대한 다섯 장이다. 무엇을 아는지, 그 앎이 무엇에 기대는지, 그 기댐이 버틸 수 있는지, 경험에서 무엇을 끌어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끌어냄을 가장 조직적으로 하는 활동이 무엇인지 물었다. 다음 장부터는 물음의 방향이 바뀐다.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있는가를 묻는다.
이 장의 출처
아래는 이 장을 쓰면서 확인한 자료다. 이 문서는 어느 것도 옮기지 않았다.
- SEP — Science and Pseudo-Science (구획 문제)
- SEP — Karl Popper
- SEP — Thomas Kuhn
- SEP — Scientific Realism
- SEP — Underdetermination of Scientific Theory
무엇이 있는가
책상 위에 사과가 둘 있다. 둘 다 빨갛다. 여기까지는 아무도 다투지 않는다. 그런데 한 걸음만 더 가 보자. 그 둘이 정말 무언가를 함께 가지고 있는가? "빨강"이라는 것이 사과와 별도로 있어서 두 사과가 그것을 나눠 가진 것인가, 아니면 빨간 사과 둘이 있을 뿐이고 '빨강'은 그것들을 함께 부르려고 우리가 쓰는 말일 뿐인가.
이 물음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그 느낌이 맞다. 사과를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저울에 달아도, 분광기에 넣어도, 사과를 반으로 갈라 보아도 '빨강 그 자체'가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물음이기는 한가.
이 장은 그 의심에서 시작한다. 형이상학(metaphysics)은 독자가 가장 미심쩍어하는 분야이고, 미심쩍어하는 것이 옳다. 그래서 첫 절의 일은 입장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것이 진짜 물음인지를 보이는 것이다.
이 장에서 답할 질문은 넷이다.
- 무엇이 있느냐는 물음은 경험으로 풀리지 않는데, 그러면 무엇으로 푸는가
- 어떤 이론이 무엇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아내는가
- 빨간 것 둘이 공유하는 무언가가 있는가. 그 답에 따라 무엇이 달라지는가
- 널빤지를 하나씩 갈아 끼운 배는 언제까지 그 배인가
앞 장에서 가져오는 것은 넷이다. 3장의 사고실험과 개념 분석, 그리고 3장이 세운 세 등급(정설·다수설·미결)을 그대로 쓴다. 4장의 논증 재구성과 자비의 원리도 계속 쓴다. 5장에서 "필요충분조건으로 분석을 세우고 반례로 시험한다"는 작업 방식을 보았는데, 이 장의 마지막 절과 다음 장이 그 작업을 다시 한다. 8장의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과 9장의 과학적 실재론 논쟁은 넷째 절에서 곧바로 다시 쓰인다.
기호는 거의 쓰지 않는다. 둘째 절에서
형이상학은 무엇을 묻는가
물음에는 종류가 있다. 3장이 그것을 갈라 두었다. "이 사과는 몇 그램인가"는 재면 되는 물음이고, "이 사과가 빨갛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는 말의 뜻을 따지는 물음이다. 그런데 "빨강이라는 것이 있는가"는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다. 재서 알 수 없고, 그렇다고 '빨강'이라는 낱말의 뜻만 밝힌다고 답이 나오지도 않는다.
형이상학이 묻는 것은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있는 것들은 어떤 것들인가이다. 그중 앞엣것 — 목록에 무엇을 올려야 하는가 — 을 따로 존재론(ontology)이라 부른다. 이 장이 존재론이고, 다음 장이 '있는 것들이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가'를 다룬다.
재서 풀리지 않는데 왜 물음인가
세 가지를 짚어 두면 이 물음이 헛돌지 않는다는 것이 보인다.
첫째, 답이 정해지면 다른 것들이 따라 정해진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세 자리를 보자.
- 수학 — "3보다 큰 소수가 있다"는 참이다. 그런데 이 문장이 참이려면 소수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가? 수학자는 이 물음을 하지 않고도 잘 일하지만, 수학이 무엇에 대한 참인지를 묻는 순간 이 물음이 나온다
- 과학 법칙 — 다음 장에서 볼 것인데, 자연법칙을 "성질 사이의 관계"로 읽는 유력한 입장이 있다. 그 성질이 보편자다. 보편자가 없다면 그 입장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 도덕 — 17장에서 볼 것인데, "잔인함은 나쁘다"가 참이려면 나쁨이라는 속성이 있어야 하는가. 도덕 실재론과 반실재론의 다툼이 이 물음과 맞물려 있다
둘째, 아무 답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뒤에서 보겠지만 각 입장은 대가를 치른다. 목록을 늘리면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를 설명해야 하고, 줄이면 "그러면 이 참인 문장은 무엇 덕분에 참인가"를 설명해야 한다. 어느 쪽도 공짜가 아니라는 것이 이 다툼을 실질적인 다툼으로 만든다.
셋째, 경험이 무관하지는 않다. 경험이 답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경험이 무관하다는 것은 다르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최선의 과학 이론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존재론에 직접 영향을 준다. 넷째 절이 바로 그 통로를 다룬다.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목록을 다투기 전에 먼저 정해야 할 것이 있다. 어떤 이론이 무엇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아내는가. 이것이 정해지지 않으면 다툼이 헛돈다. 서로 상대가 무엇을 주장하는지 모른 채 다투게 되기 때문이다.
없는 것에 대해 말하기
문제를 먼저 보자. "페가수스는 없다"는 참인 것 같다. 그런데 이 문장이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있으려면 페가수스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없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콰인은 이 매듭에 플라톤의 수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수염이 얽혀 있어서 자꾸 걸리는데 잘 잘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걸려 넘어진 사람들이 낸 답 하나는 "페가수스는 있기는 있는데 존재하지는 않는다"처럼 있음에 등급을 두는 것이었다. 콰인은 이 길을 막는다. '있다'를 여러 뜻으로 쪼개기 시작하면 무엇이 있느냐는 물음 자체가 흐려진다는 것이다.
콰인의 기준 — 변항이 무엇을 값으로 갖는가
콰인이 1948년 논문 "무엇이 있는가에 관하여"(On What There Is)에서 내놓은 답은 간단하다. 존재를 한 뜻으로 못 박고, 대신 이론이 무엇에 개입하는지를 읽어내는 절차를 준다.
절차는 이렇다. 어떤 이론을 받아들였다면 그 이론의 문장들을 한정사가 드러나게 다시 적는다. "소수는 무한히 많다"는
이 기준이 하는 일과 하지 않는 일을 갈라 두어야 한다. 하는 일은 다툼을 정리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목록을 주장한다면, 각자가 받아들이는 이론을 이 절차에 넣어 보면 누가 무엇에 개입했는지가 드러난다. 하지 않는 일은 답을 주는 것이다. 어떤 이론을 받아들일지는 이 기준이 정해 주지 않는다.
개입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읽어낸 개입이 부담스러우면 길은 둘뿐이다.
다시 쓴다. 같은 일을 하면서 그것을 말하지 않는 문장으로 바꿀 수 있는지 본다. "페가수스는 없다"는 "페가수스인 것은 하나도 없다"로 다시 적을 수 있고, 그러면 이 문장은 아무것에도 개입하지 않고 참이 된다. 없는 것을 가리키는 이름이 있어야 했던 문제가 사라진다.
인정한다. 다시 쓸 수 없으면 인정하고, 대신 그 이론이 무엇을 해 주는지를 내세운다. 넷째 절이 수에 대해 이 길을 간다.
다시 쓰기를 밀어붙이는 힘이 오컴의 면도날이다. 14세기의 오컴(William of Ockham)에게 돌려지는 이 원칙은 "필요 이상으로 항목을 늘리지 말라"로 요약된다. 다만 여기에는 조심할 것이 있다. 면도날은 설명이 같을 때 간단한 쪽을 고르라는 말이지 무조건 적은 쪽을 고르라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나'로 셀지부터가 이미 존재론에 달려 있다. 면도날은 다툼을 끝내는 도구가 아니라 다툼에서 쓰는 저울 하나다.
보편자와 개별자
이제 첫 절의 사과로 돌아간다. 다툼의 이름부터 정한다. 개별자(particular)는 이 사과, 저 사과처럼 한 자리에 하나씩 있는 것이다. 보편자(universal)는 여러 개별자에 동시에 걸치는 것 — 빨강, 둥긂, 질량을 가짐 같은 것이다. 물음은 보편자가 있느냐다.
여럿에 걸친 하나 논증
실재론 쪽의 기본 논증은 이렇게 간다. 사과 a 도 빨갛고 사과 b 도 빨갛다. 이것은 참이다. 그런데 참인 문장에는 그것을 참으로 만드는 것이 있어야 한다. 두 문장이 '빨갛다'라는 같은 술어를 쓰고 그 술어가 둘 다에 대해 참인 데에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 이유는 둘이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그 공유되는 것이 보편자다. 이 논증을 여럿에 걸친 하나 논증(one over many argument)이라 부른다.
논증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보아야 한다. 힘은 "그냥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규칙적이다"에서 온다. 8장에서 본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과 같은 모양이다. 관찰된 것(같은 술어가 여럿에 걸친다)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을 있다고 놓는 것이다.
실재론의 두 갈래
보편자가 있다고 해도 어디에 어떻게 있느냐가 남는다. 두 답이 고전적이다.
초월적 보편자. 플라톤(Plato, 기원전 428?–348?) 쪽 답이다. 보편자는 사례와 독립해서 있다. 빨간 것이 하나도 없어도 빨강은 있다. 이 답의 장점은 아직 사례가 없는 성질 — 아무도 만든 적 없는 색, 아직 아무것도 도달하지 못한 속도 — 을 자연스럽게 다룬다는 것이다. 대가는 그 보편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그것과 우리가 어떻게 접촉하는지는 더 어렵다.
내재적 보편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 쪽 답이다. 보편자는 사례 안에만, 사례가 있는 동안만 있다. 사례가 없는 보편자는 없다. 장점은 보편자를 시공간 안에 두어 접촉 문제를 줄인다는 것이고, 대가는 "하나가 여러 자리에 통째로 있다"는 말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과 a 의 빨강과 사과 b 의 빨강이 같은 하나라면, 그 하나가 두 자리에 나뉘지 않고 온전히 있다는 뜻이 된다. 개별자는 그렇게 굴지 않는다.
유명론의 세 갈래
유명론(nominalism)은 개별자 말고는 없다고 본다. 그러면 "둘 다 빨갛다"를 무엇으로 설명하느냐에 따라 갈래가 나뉜다.
- 술어 유명론 — 둘 다 '빨갛다'가 참인 것들일 뿐이다. 공유되는 것은 낱말이 걸린다는 사실이지 사물이 아니다
- 유사성 유명론 — 둘이 서로 닮았을 뿐이다. 닮음을 원초적인 것으로 두고 거기서 시작한다
- 트롭 이론 — 사과 a 에는 a 의 빨감이 있고 사과 b 에는 b 의 빨감이 따로 있다. 이 낱낱의 성질을 트롭(trope)이라 하고, 20세기 중반부터 다듬어졌다. 트롭들은 개별자이므로 보편자가 아니고, "둘 다 빨갛다"는 두 트롭이 서로 닮았다는 뜻이 된다
세 갈래가 공통으로 지는 빚이 있다. 왜 하필 그것들에 그 낱말이 걸리는가. 술어 유명론은 그 물음에 "그냥 걸린다"고 답해야 하고, 유사성 유명론과 트롭 이론은 '닮았다'에 기댄다. 그런데 실재론자는 여기서 되묻는다 — 여러 쌍이 모두 '닮음'이라는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 닮음 자체가 여럿에 걸친 하나가 아닌가.
개념론
세 번째 자리에 개념론(conceptualism)이 있다. 공유되는 것이 있기는 한데 그것은 사물 쪽이 아니라 우리 쪽에 있다는 입장이다. 우리가 만든 개념이 여럿에 걸치는 것이지 세상에 그런 항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입장의 매력은 목록을 늘리지 않으면서 "그냥 걸린다"보다 나은 답을 준다는 데 있다. 부담은 마음이 없었어도 나무가 나무였을 것이라는 상식을 어떻게 지키느냐다.
여기서 도구 하나를 정해 둔다. 유형(type)과 사례(token)다. '바나나'에 글자가 몇 개 있느냐는 물음은 사례로 세면 셋이고 유형으로 세면 둘이다. 둘 다 맞고, 다른 것을 센 것뿐이다. 이 구분은 14장에서 유형 동일론과 사례 동일론을 가를 때 그대로 쓰인다.
| 입장 | 무엇을 설명하는가 | 무엇을 대가로 치르는가 |
|---|---|---|
| 초월적 실재론 | 사례 없는 성질까지 다룬다. 수학·법칙·도덕 속성에 자리를 준다 | 보편자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그것과 어떻게 접촉하는지 말하기 어렵다 |
| 내재적 실재론 | 보편자를 시공간 안에 두어 접촉 문제를 줄인다 | 하나가 여러 자리에 통째로 있다는 말을 감당해야 한다. 사례 없는 성질을 다루지 못한다 |
| 술어 유명론 | 목록이 가장 짧다. 개별자만 있으면 된다 | 왜 그 낱말이 하필 그것들에 걸리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
| 유사성 유명론 | 닮음이라는 익숙한 관계에서 출발한다 | 닮음 자체가 여럿에 걸친 하나가 아니냐는 되물음을 받는다 |
| 트롭 이론 | 성질을 인정하면서 보편자는 인정하지 않는다 | 낱개 항목이 아주 많아진다. 절약을 이유로 삼기 어려워진다 |
| 개념론 | 목록을 늘리지 않으면서 공유를 설명한다 | 마음이 없었어도 나무는 나무였을 것이라는 상식을 지키기 어렵다 |
보편자 실재론과 유명론의 다툼은 미결이다. 이 문서는 어느 쪽도 고르지 않는다. 위 표가 이 절의 결론이고, 각 줄이 무엇을 사고 무엇을 파는지가 독자가 가져가야 할 전부다.
추상적 대상 — 수는 있는가
앞 절의 다툼이 가장 날카로워지는 자리가 수학이다. 물음은 이렇다. 7 같은 것이 있는가.
구체와 추상을 가르는 두 기준
먼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정해야 한다. 추상적 대상(abstract object)은 흔히 두 기준으로 가른다 — 시공간에 자리가 없고, 인과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 사과는 여기 있고 무엇을 하지만 수 7 은 어디에도 없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격자를 그려 보면 두 기준이 어긋나는 칸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은 흠이 아니라 실상이다. 이 절에서 다루는 것은 오른쪽 아래 칸 — 자리도 없고 인과에도 관여하지 않는 것들 — 이 비어 있느냐다.
불가결성 논증
수를 인정하는 쪽의 가장 강한 논증은 수학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과학에서 나온다. 콰인과 퍼트넘에게 돌려지는 불가결성 논증(indispensability argument)이 그것이고, 뼈대는 이렇다.
- 전제 1 — 우리는 최선의 과학 이론이 있다고 말하는 것들을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 전제 2 — 최선의 과학 이론은 수학적 대상에 대한 언급 없이는 적을 수 없다
- 결론 — 수학적 대상이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전제 1 은 9장의 과학적 실재론이다. 전자를 관찰할 수 없는데도 있다고 보는 근거가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리면 된다. 그 근거를 받아들인 사람은 같은 근거가 수에도 걸린다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전제 2 는 "수학을 빼고 물리학을 적어 보라" 는 도전이다. 이것이 이 논증의 힘이다 — 존재론의 물음을 경험 과학에 걸어 놓는다.
두 방향의 반격
인식 쪽에서. 베나세라프(Paul Benacerraf)가 정리한 문제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는 것에 대해 5장 이후로 세운 그림에서는, 아는 것과 아는 사람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추상적 대상은 정의상 인과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아는가. 이것은 수학이 틀렸다는 주장이 아니라, 수학적 참에 대한 설명과 수학적 앎에 대한 설명이 서로 당긴다는 지적이다. 참을 잘 설명하는 그림은 앎을 설명하기 어렵고, 앎을 잘 설명하는 그림은 참을 설명하기 어렵다.
전제 2 쪽에서. 필드(Hartry Field)가 1980년 저작 "수 없는 과학"(Science Without Numbers)에서 시도한 것이 이 방향이다. 물리 이론 하나를 수에 대한 언급 없이 다시 적을 수 있다면 전제 2 가 무너진다. 이 계획이 물리학 전체로 확장되는지는 다투어지고 있고, 결론이 나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다툼이 순수한 사변이 아니라 실제로 해 보아야 판가름 나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구성과 동일성 — 테세우스의 배
마지막 절은 다른 종류의 물음이다. 앞까지는 목록에 무엇을 올리느냐를 물었다. 이제는 목록에 올린 것 하나가 언제까지 그것인가를 묻는다.
장치와 원리
이야기는 이렇다. 배 한 척이 있고, 해마다 널빤지를 하나씩 새것으로 간다. 오래 지나면 원래 널빤지는 하나도 남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그 배인가. 여기까지는 흔히 아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진짜 물음이 되는 것은 뒷부분에서다. 빼낸 널빤지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그대로 조립한다. 이제 배가 둘이다.
이 장치를 미는 힘은 원리 하나에서 나온다. 라이프니츠 법칙이다. 같은 것에 대해 참인 것은 모두 같아야 한다는 원리로, 논리학 문서 12장이 이것을 동일성 기호의 규칙으로 형식화한다. 여기서 쓰는 것은 그 대우다 — 참인 것이 하나라도 다르면 같은 것이 아니다. (대우는 8장에서 정의했다. 조건문의 앞뒤를 맞바꾸고 둘 다 부정한 것으로, 원래 조건문과 언제나 같은 값을 갖는다.)
그 원리를 대면 이렇게 된다. 배 A 는 항구에 있고 배 B 는 창고에 있다. 참인 것이 다르므로 A 와 B 는 다르다. 그런데 A 도 그 배이고 B 도 그 배라면 A 와 B 는 같아야 한다. 같으면서 다를 수는 없다.
갈라져 나오는 두 물음
물음 하나 — 시간을 통한 동일성. 어제의 그것과 오늘의 이것을 하나라고 부르는 근거는 무엇인가. 후보는 여럿이다. 재료가 같음, 형태가 같음, 자리와 쓰임이 끊기지 않음, 만들어진 계보가 끊기지 않음. 배 A 와 배 B 는 각각 다른 후보를 만족시킨다. 그래서 후보를 고르지 않고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물음 둘 — 구성이 곧 동일성인가. 널빤지들의 모임과 배는 같은 하나인가. 같다면, 널빤지 하나를 갈아 끼운 순간 모임이 달라지므로 배도 달라져야 한다. 다르다면, 같은 자리에 같은 재료로 이루어진 두 대상이 동시에 있다는 뜻이 된다. 이쪽이 더 다루기 쉬워 보이지만 대가가 있다. 조각상과 그것을 이루는 점토를 생각해 보자. 점토는 어제부터 있었고 조각상은 오늘 만들어졌다. 참인 것이 다르므로 둘은 다르다. 그러면 지금 이 자리에 대상이 둘 있다는 말이 된다.
답의 후보와 그 값
세 갈래가 표준적이다.
- 하나만 그 배다. 기준을 하나 골라 다른 쪽을 버린다. 포기하는 것은 버린 쪽의 직관이고, 왜 그 기준을 골랐는지를 따로 대야 한다
- 시간적 부분으로 읽는다. 사물이 공간에 부분을 갖듯 시간에도 부분을 갖는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 시간적 부분(temporal part)을 인정하는 견해를 4차원주의라 하고, 사물이 어느 시점에나 통째로 있다고 보는 견해를 3차원주의라 한다. 4차원주의에서 두 계보는 앞부분을 공유하는 서로 다른 전체다. 그러면 "t3 에 배가 둘"이 모순이 아니게 된다. 포기하는 것은 사물이 매 순간 통째로 있다는 생각이다
- 그 배 같은 것은 없다. 널빤지들이 이렇게 저렇게 놓여 있을 뿐이라고 본다. 둘째 절의 유명론과 같은 종류의 수다 — 목록을 줄이고 문장을 다시 쓴다. 포기하는 것은 배가 하나의 대상이라는 생각이고, 갚아야 할 빚은 배에 관한 참인 문장들을 널빤지 이야기로 다시 쓰는 일이다
13장이 이 물음을 사람에 대해 되풀이한다. 거기서는 널빤지 대신 몸과 기억이 놓이고, 압박이 훨씬 세진다. 배에 대해서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어깨를 으쓱할 수 있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장은 장치만 세워 두고 사람에 관한 논의는 13장에 넘긴다.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 말 | 뜻 |
|---|---|
| 형이상학 | 무엇이 있고 그것들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 분야 |
| 존재론 | 형이상학 가운데 목록에 무엇을 올려야 하는가를 묻는 부분 |
| 존재론적 개입 | 어떤 이론을 받아들이면 있다고 인정하게 되는 것들 |
| 콰인의 기준 | 이론을 한정사가 드러나게 다시 적었을 때 |
| 플라톤의 수염 |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참인 문장이 있다는 데서 생기는 매듭 |
| 오컴의 면도날 | 설명이 같다면 항목이 적은 이론이 낫다는 원칙. 설명이 같지 않으면 적용되지 않는다 |
| 개별자 | 한 자리에 하나씩 있는 것. 이 사과, 저 사과 |
| 보편자 | 여러 개별자에 동시에 걸치는 것. 빨강, 둥긂 |
| 여럿에 걸친 하나 논증 | 같은 술어가 여럿에 걸치는 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공유되는 보편자라는 논증 |
| 초월적 보편자 / 내재적 보편자 | 사례와 독립해 있다는 견해(플라톤 쪽) / 사례 안에만 있다는 견해(아리스토텔레스 쪽) |
| 유명론 | 개별자 말고는 없다는 입장. 술어 유명론, 유사성 유명론, 트롭 이론으로 갈린다 |
| 트롭 | 개별자에 딸린 낱낱의 성질. 사과 a 의 빨감과 사과 b 의 빨감은 서로 다른 트롭이다 |
| 개념론 | 공유되는 것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우리가 만든 개념이라는 입장 |
| 유형 / 사례 | 여럿에 걸치는 쪽 / 낱낱의 것. 바나나의 글자는 유형으로 둘 사례로 셋이다 |
| 추상적 대상 | 시공간에 자리가 없고 인과에 관여하지 않는 것. 수, 집합, 명제 |
| 불가결성 논증 | 최선의 과학 이론이 수학 없이 적히지 않으므로 수학적 대상을 인정해야 한다는 논증 |
| 라이프니츠 법칙 | 같은 것에 대해 참인 것은 모두 같다. 뒤집으면 참인 것이 하나라도 다르면 같은 것이 아니다 |
| 시간적 부분 | 사물이 시간에 대해 갖는 부분. 이것을 인정하면 4차원주의, 인정하지 않으면 3차원주의다 |
| 사람 | 이 장에서 한 일 |
|---|---|
| 플라톤 | 보편자가 사례와 독립해 있다는 견해의 대표 |
| 아리스토텔레스 | 보편자가 사례 안에만 있다는 견해의 대표 |
| 오컴 | 유명론의 대표. 항목을 필요 이상으로 늘리지 말라는 원칙에 이름을 남겼다 |
| 콰인 | 존재론적 개입의 기준을 세웠다. 불가결성 논증의 한 축 |
| 퍼트넘 | 불가결성 논증의 다른 한 축 |
| 베나세라프 | 수학적 참에 대한 설명과 수학적 앎에 대한 설명이 서로 당긴다는 문제를 정리했다 |
| 필드 | 물리 이론을 수에 대한 언급 없이 다시 적으려는 계획을 내놓았다 |
| 사안 | 이 문서가 어떻게 다루는가 |
|---|---|
| 보편자 실재론 대 유명론 | 미결. 이 문서는 어느 쪽도 고르지 않는다 |
| 추상적 대상이 있는가 | 미결. 불가결성 논증과 인식 접근 문제가 서로 맞선다 |
| 시간을 통한 동일성의 기준 | 미결. 13장이 사람에 대해 같은 물음을 다시 다룬다 |
| 콰인의 기준이 개입을 읽는 방법이다 | 널리 받아들여진 정리 방식. 다만 그것이 유일한 기준인지는 다투어진다 |
이 장의 출처
아래는 이 장을 쓰면서 확인한 자료다. 이 문서는 어느 것도 옮기지 않았다.
- SEP — Metaphysics
- SEP — The Medieval Problem of Universals
- SEP — Nominalism in Metaphysics
- SEP — Abstract Objects
- SEP — Identity Over Time (테세우스의 배)
인과·법칙·양상
10장은 목록을 물었다. 무엇이 있는가. 이 장은 그 목록에 오른 것들이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가를 묻는다. 얽힘을 말할 때 우리가 쓰는 말이 셋 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으킨다고 하고, 세상이 어떤 법칙을 따른다고 하고, 어떤 일은 반드시 그렇고 어떤 일은 어쩌다 그렇다고 한다.
이 셋은 서로 붙어 있다. 원인을 말하려면 "그것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물어야 하고, 그 물음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물음이다. 법칙이 법칙인 이유도 "그럴 수밖에 없다"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장은 셋을 한자리에서 다룬다.
이 장에서 답할 질문은 다섯이다.
- 당구공이 부딪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보는가
- "그때 뛰었더라면 버스를 탔을 것이다" 같은 문장이 참이라는 것은 무엇에 대해 참이라는 뜻인가
- 원인을 "그것이 없었다면 결과도 없었을 것"으로 풀 수 있는가
- 자연법칙은 그저 예외 없는 규칙성인가, 아니면 그 이상인가
- 반드시 그렇다는 것과 생각만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인가
앞 장에서 가져오는 것이 셋이다. 8장에서 흄의 귀납 문제를 보았다. 이 장에서 만나는 것은 같은 사람의 다른 문제 — 인과 관념 자체에 대한 물음 — 이고, 뿌리는 같다. 5장의 작업 방식(분석을 세우고 반례로 시험한다)이 셋째 절의 본체다. 10장의 보편자가 넷째 절에서 자연법칙을 설명하는 재료로 다시 나온다.
쓰는 기호는 셋뿐이다.
그 대신 이 문서만 묻는 물음이 하나 있다. 가능세계는 정말 있는가. 논리학 문서는 세계를 "이름 붙은 점"으로 두고 그 점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고 못 박아 두었다. 둘째 절이 그 물음을 이어받는다.
흄 —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당구공 A 가 굴러가 B 를 맞히고, B 가 굴러간다. A 가 B 를 움직였다. 이보다 분명한 인과가 있을까 싶다. 그런데 흄은 여기서 묻는다. '움직였다'에 해당하는 것을 우리가 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본 것을 세어 보면 셋이다. 두 공이 닿았다. A 의 움직임이 먼저였다. 그리고 이런 장면을 여러 번 보았고 어긋난 적이 없다. 넷째 것 — "A 때문에 B 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 에 해당하는 광경은 없다.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두 사건 사이를 잇는 끈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인과를 말한다. 흄의 진단은 이렇다. 여러 번 겪고 나면 마음이 A 에서 B 로 넘어가는 데 익숙해지고, 그 익숙함을 우리가 사물 쪽에 있는 연결로 착각한다. 필연성이 있는 자리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 쪽이라는 것이다.
흄이 인과가 아예 없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인과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그은 것인지는 해석이 갈린다. 뒤쪽으로 읽으면 흄도 세계에 무언가 연결이 있을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고, 다만 그것에 대한 관념을 우리가 가질 수 없다고 말한 것이 된다. 이 문서는 어느 해석이 옳은지 정하지 않는다.
규칙성 이론
흄에게서 나온 인과 이론을 규칙성 이론(regularity theory)이라 부른다. 인과를 관찰할 수 있는 것들만으로 적으려는 시도다.
C 가 E 를 일으킨다는 것은, C 가 E 보다 먼저 일어나고 둘이 붙어 있으며, C 와 같은 유형의 사건 뒤에는 늘 E 와 같은 유형의 사건이 온다는 것이다.
이 분석의 장점이 뚜렷하다. 신비한 것을 하나도 쓰지 않는다. 시간 순서와 근접과 반복은 모두 관찰되는 것들이다. 10장의 낱말로 하면 목록을 늘리지 않는 분석이다.
걸리는 세 자리
우연한 규칙성. 이 공장 사이렌이 울린 뒤에는 늘 옆 마을 사람들이 일손을 놓는다. 예외가 없다고 하자. 그래도 사이렌이 그들을 퇴근시킨 것은 아니다. 두 마을이 같은 시각에 일을 마칠 뿐이다.
공통 원인. 기압계 바늘이 떨어진 뒤에는 늘 폭풍이 온다. 그래도 바늘이 폭풍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둘 다 기압이 떨어져서 일어난 일이다. 이 사례가 특히 나쁜 이유는, 규칙성 조건을 아무리 조여도 걸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바늘과 폭풍의 잇따름은 실제로 예외가 없다.
단칭 인과. 딱 한 번 일어난 일에도 원인이 있다. 어떤 사고, 어떤 결정, 우주의 어떤 사건은 되풀이된 적이 없다. 되풀이가 없으면 "늘 그랬다"고 말할 규칙성 자체가 없는데, 그렇다고 원인이 없다고 하지는 않는다.
덤으로 하나 더 있다. 방향 문제다. "늘 함께 일어난다"는 대칭이다. C 가 있는 곳에 늘 E 가 있고 E 가 있는 곳에 늘 C 가 있다면, 그 상관 자체는 어느 쪽이 원인인지 말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인과는 대칭이 아니다. 시간 순서를 붙여 막을 수 있지만, 그러면 시간의 방향을 인과로 설명하는 길이 막힌다.
반사실 조건문 — 다르게 되었다면
앞 절의 반례들을 다시 보면 공통점이 있다. 우리가 인과를 판정할 때 실제로 쓰는 물음은 "늘 그랬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다. 기압계를 부숴 놓았어도 폭풍은 왔을 것이다. 그래서 기압계는 원인이 아니다. 이 물음을 정확히 적을 수 있으면 인과 분석의 재료가 생긴다.
실질조건문으로는 안 된다
"그때 뛰었더라면 버스를 탔을 것이다." 이 문장은 뛰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인정하고 하는 말이다. 논리학 문서 4장이 이 자리에서 걸린다고 미리 적어 두었다.
그래서 기호를 따로 둔다.
가장 가까운 세계
뜻을 정하는 방법이 이렇다. A 가 참인 상황들 가운데 실제 상황과 가장 닮은 것을 찾아 거기서 C 가 참인지 본다. 그 상황을 가능세계라 부른다.
왜 "가장 닮은"이라는 단서가 필요한지는 예로 보면 분명하다. "내가 뛰었더라면 버스를 탔을 것이다"를 판정할 때 우리는 내가 뛰는 아무 세계나 보지 않는다. 내가 뛰면서 동시에 버스가 폭발하는 세계도 내가 뛰는 세계이지만, 그 세계는 실제와 너무 다르다. 나머지는 그대로 두고 뛰는 것만 바꾼 세계 — 그것이 가장 닮은 세계다.
이 단서가 이 이론의 힘이자 약점이다. 힘인 이유는 실질조건문의 문제를 정확히 고치기 때문이고, 약점인 이유는 무엇이 얼마나 닮았는지를 이 이론이 정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닮음의 순서를 어떻게 매기느냐에 따라 같은 문장의 참·거짓이 바뀐다.
낯선 논리
반사실 조건문은
둘째, 이행성이 안 된다.
왜 이것이 낯선지도 적어 둘 만하다. 논리학 문서가 세운 연결자들은 부분의 값만으로 전체의 값이 정해졌다.
그런데 가능세계는 정말 있는가
여기가 이 장이 논리학 문서와 갈라지는 자리다. 논리학 문서 18장은 세계를 이름 붙은 점으로 두고 "여기에 형이상학을 얹지 않는 것이 좋다"고 명시한다. 그 문서의 목적에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반사실 조건문의 참·거짓을 세계로 설명하려는 순간 물음이 생긴다. 설명하는 쪽이 무엇인지 모르면 설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상 실재론. 데이비드 루이스의 답이다. 다른 가능세계는 이 세계와 똑같은 뜻으로 있다. 덜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림자 같은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와 시공간으로도 인과로도 이어져 있지 않을 뿐이다. '현실'이라는 말은 '여기'나 '지금'처럼 말하는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어서, 다른 세계의 사람에게는 그쪽이 현실이다.
이 입장이 사는 것은 환원이다. "가능하다"가 "그런 세계가 있다"가 되면 양상 개념이 양상 아닌 말로 풀린다. 필연과 가능이 더 이상 원초적인 것이 아니게 되는데, 이것은 큰 이득이다. 치르는 값도 크다. 목록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늘어나고, 우리와 아무 인과 관계도 없는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는 물음이 남는다. 10장에서 추상적 대상에 대해 나온 그 물음이다.
대리주의. 가능세계는 이 세계 안의 무언가라고 보는 입장들을 묶어 이렇게 부른다. 최대로 일관된 명제들의 집합일 수도 있고, 세계 전체를 하나로 적은 추상적 대상일 수도 있다. 세계는 있지만 구체적인 것은 우리 세계 하나뿐이다.
사는 것은 절약이다. 추상적 대상 말고 새로 들일 것이 없다. 치르는 값은 환원의 포기다. 어느 명제 집합이 '일관된' 집합인지 정하려면 결국 가능이라는 양상 개념을 다시 써야 하고, 그러면 양상을 양상으로 설명한 셈이 된다.
이 다툼도 미결이다. 두 입장이 같은 저울을 쓰면서 반대쪽으로 기운다는 것이 이 절이 남길 것이다.
인과의 반사실적 분석과 그 반례
도구가 갖춰졌으니 인과를 분석한다.
분석
루이스가 1973년에 내놓은 분석이다. 사건 c 와 e 가 둘 다 실제로 일어났다고 하자. 아래에서
그리고 c 가 e 의 원인이다는 것은, c 에서 e 까지 인과적 의존의 사슬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c 에 의존하는 d 가 있고, d 에 의존하는 e 가 있으면 c 는 e 의 원인이다. 사슬을 두는 이유는 뒤에 나온다.
이 분석이 규칙성 이론보다 나은 자리가 곧바로 보인다. 공통 원인이 걸러진다. 기압계를 부숴 놓았어도 폭풍은 왔을 것이므로
반례 둘
그런데 무너진다. 무너지는 자리가 이 절의 본체다.
선점(preemption). 저격수 갑과 을이 있다. 갑이 쏘아 표적이 죽는다. 을은 대기 중이었고, 갑이 쏘았으므로 쏘지 않았다. 갑이 쏘지 않았다면 을이 쏘았을 것이고 표적은 그래도 죽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잉결정(overdetermination). 갑과 을이 동시에 쏘고 두 총알이 함께 치명적이다. 갑이 없었어도 을 때문에 죽고, 을이 없었어도 갑 때문에 죽는다. 분석은 둘 다 원인이 아니라고 판정한다.
두 반례가 겨누는 곳이 같다. "그것이 없었다면 결과도 없었을 것"이라는 조건은 대체할 것이 없는 원인만 원인으로 인정한다. 그런데 원인 노릇을 하는 데 대체 불가능성이 필요하지는 않다.
수선의 길과, 그것이 남기는 것
선점에 대해. 사슬을 두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갑이 쏜 것과 죽음 사이에는 중간 사건들이 있다 — 총알이 날아가고, 표적을 맞히고, 상처가 생긴다. 각 단계는 바로 앞 단계에 의존한다. 총알이 날아가지 않았다면 맞지 않았을 것이고, 맞지 않았다면 상처가 없었을 것이다. 사슬이 이어지므로 갑이 원인이 된다. 을 쪽에는 그런 사슬이 없다.
이 수선은 절반만 통한다. 을이, 갑의 총알이 맞는 것을 보고서야 쏘기를 그만두기로 되어 있었다고 해 보자. 대기하던 원인이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 있는 이런 경우에는 중간 사건 하나하나에 대해서도 "그것이 없었어도 을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 성립한다. 사슬이 끊긴다.
과잉결정에 대해. 표준적인 대응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런 경우 우리 직관 자체가 확고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총알 둘이 정확히 동시에 도달하는 경우가 실제로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그때 우리가 무엇이 원인이라고 말할지는 생각보다 분명하지 않다. 다른 하나는 사건을 더 잘게 나누는 것이다. 두 총알이 맞은 죽음과 한 총알이 맞은 죽음은 다른 사건이라고 보면 의존이 살아난다. 대가는 사건을 얼마나 잘게 나눌지가 자의적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길. 반사실 조건문 대신 개입으로 다시 적는 길이 있다. "C 를 바꾸는 개입을 하면 E 가 바뀐다"로 인과를 규정하고, 변수와 방정식으로 체계를 세우는 방식이다. 이 접근은 과학에서 인과를 다루는 방식과 잘 맞는다는 강점이 있고, 개입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과를 이미 쓰고 있지 않으냐는 순환 의심을 받는다.
여기서 5장을 돌아보아야 한다. 5장은 앎을 정당화된 참인 믿음으로 분석했고, 게티어 사례가 그 분석을 무너뜨렸으며, 대응책들이 나왔고, 어느 것도 합의를 얻지 못했다. 이 장의 인과가 정확히 같은 모양이다. 3장이 개념 분석의 순환으로 세워 둔 고리가 두 번째로 도는 것이다.
이것을 실패로 읽을 필요는 없다. 고리를 돌 때마다 무엇이 왜 어려운지가 드러난다. 선점과 과잉결정을 보고 나면, 원인이라는 개념이 '대체 불가능함'이 아니라 '실제로 일을 한 것'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분석을 세우기 전에는 몰랐던 것이다.
자연법칙 — 규칙성인가 필연인가
물음을 하나로 좁힌다. 모든 참인 전칭 문장이 법칙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법칙을 법칙으로 만드는가.
그림의 두 문장을 보자. "지름 1 km 가 넘는 금 덩어리는 없다"도 참일 것이고 "지름 1 km 가 넘는 우라늄 235 덩어리는 없다"도 참이다. 그런데 앞엣것은 어쩌다 그런 것이고 뒤엣것은 그럴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세 시험이 이 차이를 잡아낸다 — 아직 보지 않은 사례에 걸치는가, 반사실 조건문을 떠받치는가, 왜 그런지를 설명하는가.
규칙성만으로는 이 차이가 안 나온다. 두 문장 모두 예외가 없다는 점에서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답이 갈린다.
규칙성 쪽 — 최선의 체계 분석
흄 쪽에 서면서도 법칙과 우연을 가르는 길이 있다. 램지(Frank Ramsey, 1903–1930)의 착상을 루이스가 다듬은 최선의 체계 분석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전부를 참인 문장들의 체계로 정리한다고 하자. 그런 체계는 여럿 만들 수 있다. 그중 단순함과 강함의 균형이 가장 좋은 체계가 있을 것이고, 그 체계에 정리로 들어가는 문장이 법칙이다.
단순함과 강함은 서로 당긴다. 일어난 일을 전부 나열하면 가장 강하지만 가장 복잡하다. "무언가 일어난다" 하나만 두면 가장 단순하지만 아무 말도 안 한다. 우라늄 문장은 좋은 체계 안에 자리를 얻고, 금 문장은 그렇지 않다. 금 덩어리 크기를 넣으려면 체계가 복잡해지는데 그만큼 강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답의 힘은 신비한 것을 하나도 들이지 않으면서 차이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약한 곳도 분명하다. 단순함은 무엇으로 재는가. 쓰는 낱말을 바꾸면 단순함의 순위가 바뀐다. 루이스의 대답은 아무 술어나 쓰지 못하게 하고 자연스러운 성질만 쓰게 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면 10장의 물음이 되돌아온다. 어떤 성질이 자연스러운지를 정하려면 결국 성질에 관한 존재론이 필요하다.
필연 쪽 — 보편자 사이의 관계
다른 답은 법칙에 규칙성 이상의 것이 있다고 본다. 드레츠키·툴리(Michael Tooley)·암스트롱(David Armstrong, 1926–2014)이 각각 비슷한 무렵에 내놓은 견해다.
법칙은 보편자 사이의 관계다.
이 답이 사는 것은 셋이다. 법칙 같은 것과 우연한 것의 차이가 곧바로 나온다. 법칙이 반사실 조건문을 떠받치는 이유도 나온다 — 관계가 성립한다면 다른 세계에서도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칙이 설명하는 이유가 나온다. 이 셋은 최선의 체계 분석이 어렵게 얻거나 못 얻는 것들이다.
값도 크다. 첫째, 10장의 보편자를 사야 한다. 유명론자는 이 답을 쓸 수 없다. 둘째, 더 날카로운 반론이 있다. 추론 문제라 불리는 것이다.
추론 문제
반론은 이렇다.
이 반론이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는, 필연 쪽이 사려던 것이 바로 그 "따라 나옴"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원초적인 것으로 두고 이름만 붙인 것이라면, 규칙성 쪽에 대해 가지던 우위가 흐려진다.
이 사안도 미결이다. 두 진영이 모두 살아 있고 표준 개론서가 어느 쪽도 정답으로 적지 않는다.
필연·우연 × 선험·후험
마지막으로 두 구분을 겹쳐 놓는다. 이 절이 이 장에서 가장 걸리는 곳이다. 두 구분이 워낙 오래 붙어 다녀서 하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두 축
필연적과 우연적은 세상 쪽 구분이다. 달리 될 수 없었던 일과 달리 될 수 있었던 일을 가른다. 기호로는
선험적과 후험적은 우리 쪽 구분이다. 경험 없이 알 수 있는 것과 경험해야 알 수 있는 것을 가른다.
이 둘이 다르다는 것은 말로 하면 당연하지만, 실제로는 오래 겹쳐 있었다. 필연적인 것은 생각만으로 알 수 있고 우연적인 것은 겪어야 안다는 그림이 오랫동안 자연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크립키가 채운 두 칸
크립키(Saul Kripke, 1940–2022)가 1970년 강연에서 — 뒤에 "이름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으로 나온다 — 반대각선 두 칸을 채웠다.
후험적 필연. "물은 H₂O 다." 이것을 알아내는 데는 실험이 필요했다. 후험적이다. 그런데 물이 H₂O 라면, 물이 H₂O 가 아닌 세계란 없다. H₂O 가 아닌 어떤 것이 물처럼 보이고 물처럼 흐른다 해도 그것은 물이 아니다. 필연적이다.
같은 일이 이름에서도 일어난다. 헤스페루스(저녁에 보이는 밝은 별)와 포스포러스(새벽에 보이는 밝은 별)가 같은 것이라는 사실 — 우리말로는 개밥바라기와 샛별이 둘 다 금성이라는 사실 — 은 관찰로 알아냈다. 그런데 둘이 같은 것이라면, 그 하나가 그 하나 아닌 세계란 없다. 논리학 문서 12장이 이 문장을 동일성 기호를 논리에 들이는 이유로 쓴다. 여기서 묻는 것은 다른 것이다 — 그것이 필연인가.
선험적 우연. 어떤 막대 하나를 골라 "이 막대의 길이를 1 m 라 하자"고 정해 기준을 세운다고 하자. 그렇게 정한 사람은 "그 막대의 길이는 1 m 다"를 재 보지 않고도 안다. 선험적이다. 그런데 그 막대가 더 길거나 짧았을 수도 있다. 우연적이다. (지금 국제단위계는 미터를 이렇게 정의하지 않는다. 빛의 속력을 못 박고 거기서 끌어낸다. 논점은 그런 방식으로 기준을 세웠을 때 무엇이 성립하느냐이므로 예시는 그대로 쓸 수 있다.)
후험적 필연 칸(왼쪽 아래)을 떠받치는 장치가 고정지시어다. 이름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은 것을 가리킨다는 생각인데, 그 장치를 세우는 것은 16장이다. 여기서는 이름만 대고 넘긴다.
하나 더 갈라 둘 것이 있다. 분석적과 종합적은 셋째 구분이고, 뜻만으로 참인가 아닌가를 가른다. 이것을 필연·우연과 같은 것으로 다루면 크립키의 논점이 흐려진다. "물은 H₂O 다"는 뜻만으로 참이 아니면서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수반 — 양상으로 적는 의존
이 장의 도구를 하나 더 정해 둔다. 뒷장들이 계속 쓴다.
A 가 B 에 수반한다(supervenience)는 것은, B 에서 차이가 없으면 A 에서도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양상 개념이라는 데 주목하라. "차이가 없다"가 아니라 "차이가 있을 수 없다"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그림의 아름다움이 물감의 배치에 수반한다고 해 보자. 그러면 물감 배치가 똑같은 두 그림 중 하나만 아름다울 수는 없다. 이때 아름다움이 물감 배치로 환원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수반은 의존을 말할 뿐 정체를 말하지 않는다.
이 도구가 유용한 이유가 그것이다. "X 가 Y 에 달려 있다"를 "X 가 Y 다"라고 말하지 않으면서 적을 수 있다. 14장에서 마음이 몸에 수반한다는 주장이, 17장에서 도덕 속성이 자연적 속성에 수반한다는 주장이 이 도구를 쓴다.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 말 | 뜻 |
|---|---|
| 규칙성 이론 | 인과를 시간 순서·근접·예외 없는 잇따름으로 분석하는 견해 |
| 공통 원인 | 두 사건이 규칙적으로 잇따르지만 둘 다 제삼의 원인에서 나오는 경우 |
| 단칭 인과 | 되풀이된 적 없는 사건의 인과 |
| 반사실 조건문 | |
| 가장 가까운 세계 | A 가 참인 세계 가운데 실제 세계와 가장 닮은 것. 반사실 조건문의 참을 여기서 정한다 |
| 전건 강화 실패 | |
| 양상 실재론 | 다른 가능세계가 이 세계와 같은 뜻으로 있다는 견해. 루이스 |
| 대리주의 | 가능세계를 이 세계 안의 추상적 대상으로 보는 견해들의 묶음 |
| 인과적 의존 | c 가 없었다면 e 도 없었을 것이라는 관계 |
| 선점 | 대기하던 원인이 있어서, 실제 원인이 없었어도 결과가 일어났을 경우 |
| 과잉결정 | 각각으로 충분한 원인이 둘 있어서, 어느 하나가 없었어도 결과가 일어났을 경우 |
| 개입주의 | 인과를 개입의 효과로 규정하고 변수와 방정식으로 다루는 접근 |
| 법칙 같은 일반화 / 우연한 일반화 | 아직 보지 않은 사례에 걸치고 반사실 조건문을 떠받치고 설명하는 것 / 그렇지 못한 것 |
| 최선의 체계 분석 | 단순함과 강함의 균형이 가장 좋은 체계의 정리가 법칙이라는 견해. 램지와 루이스 |
| 필연화 관계 | 보편자 사이에 성립한다고 보는 관계. 법칙을 이것으로 설명하는 견해가 있다 |
| 추론 문제 | 보편자 사이의 관계에서 전칭 규칙성이 왜 따라 나오는지를 묻는 반론 |
| 후험적 필연 / 선험적 우연 | 경험으로 알지만 달리 될 수 없는 것 / 경험 없이 알지만 달리 될 수 있었던 것 |
| 분석적 / 종합적 | 뜻만으로 참인가 아닌가의 구분. 필연·우연과 같은 구분이 아니다 |
| 수반 | B 에서 차이가 없으면 A 에서도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관계. 의존을 말하되 정체를 말하지 않는다 |
| 사람 | 이 장에서 한 일 |
|---|---|
| 흄 | 인과에서 필연적 연결에 해당하는 인상이 없음을 지적했다. 규칙성 이론의 출발점 |
| 램지 | 법칙을 최선의 체계의 정리로 보는 착상을 냈다 |
| 루이스 | 반사실 조건문의 가능세계 뜻풀이, 인과의 반사실적 분석, 양상 실재론, 최선의 체계 분석 |
| 드레츠키·툴리·암스트롱 | 법칙을 보편자 사이의 필연화 관계로 보는 견해를 각각 내놓았다 |
| 크립키 | 후험적 필연과 선험적 우연의 사례를 들어 두 구분이 다른 축임을 보였다 |
| 사안 | 이 문서가 어떻게 다루는가 |
|---|---|
| 규칙성 이론만으로는 인과가 잡히지 않는다 | 정설. 무엇으로 대신할지는 미결 |
| 인과의 반사실적 분석 | 선점과 과잉결정이라는 반례가 있다는 것은 정설. 수선이 성공했는지는 미결 |
| 자연법칙이 규칙성인가 필연인가 | 미결. 두 진영이 모두 살아 있다 |
| 가능세계가 실제로 있는가 | 미결. 양상 실재론과 대리주의가 같은 저울의 반대쪽에 있다 |
| 후험적 필연이 있다 | 널리 받아들여진다.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은 16장의 몫이고 거기서도 다투어진다 |
이 장의 출처
아래는 이 장을 쓰면서 확인한 자료다. 이 문서는 어느 것도 옮기지 않았다.
- SEP — Metaphysics of Causation
- SEP — Counterfactual Theories of Causation
- SEP — Laws of Nature
- SEP — Possible Worlds
- SEP — A Priori Justification and Knowledge
자유의지와 결정론
문장 둘을 나란히 놓아 보자. 하나 — 나는 방금 커피 대신 물을 골랐고, 커피를 고를 수도 있었다. 둘 —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앞선 상태와 자연법칙이 정한 대로 일어난다. 둘 다 그럴듯한데, 함께 참일 수 있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이 장에서 답할 질문은 셋이다.
- 결정론이란 정확히 무슨 주장인가. 그리고 무엇이 결정론이 아닌가.
- 결정론이 참이면 자유의지가 없어지는가. 이것이 이 장의 중심 물음이다.
- 도덕적 책임은 무엇에 기대고 있는가. 달리 할 수 있었어야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11장에서 가져오는 것은 넷이다. 인과, 자연법칙, 반사실 조건문, 그리고 가능세계다. 이 장에서 이것들을 다시 정의하지 않고 그대로 쓴다. 특히 "달리 할 수 있었다"를 분석할 때 반사실 조건문이 그대로 도구가 된다.
미리 경고해 둘 것이 하나 있다. 이 장에서 독자가 가장 자주 걸리는 자리는 어려운 논증이 아니라 두 개의 서로 다른 물음을 섞는 것이다. "결정론은 참인가"와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양립하는가"는 다른 물음이고, 답도 따로 정해진다. 첫 절이 통째로 이 구별에 쓰인다. 여기를 대충 넘기면 나머지가 전부 흐려진다.
결정론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가
결정론(determinism)은 이렇게 말한다. 어느 한 시점의 세계의 완전한 상태와 자연법칙이 함께, 그 뒤 모든 시점의 세계의 상태를 하나로 정한다. 11장의 말로 옮기면, 법칙과 한 시점의 상태가 주어지면 미래의 상태가 그 둘의 귀결로 따라 나온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세계에 대한 주장이지 사람에 대한 주장이 아니다.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은 뒤에 나올 둘째 물음이다.
결정론이 아닌 것 셋
결정론과 자주 섞이는 것이 셋 있다. 하나씩 떼어 놓자.
첫째, 예측 가능성이 아니다. 결정론은 누군가가 미래를 계산해 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필요한 정보를 모으는 것이 원리상 불가능하고 계산이 우주의 나이보다 오래 걸려도, 미래가 하나로 정해져 있기만 하면 결정론은 참이다. 반대로 어떤 것을 잘 예측한다고 해서 그것이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둘째, 숙명론이 아니다. 숙명론(fatalism)은 내가 무엇을 하든 결과가 같다는 주장이다. 결정론은 그 반대를 말한다. 결정론이 참인 세계에서 내 숙고와 선택은 인과 사슬의 한 마디이고, 그것이 달랐다면 결과도 달랐을 것이다. 오늘 집을 나서든 말든 사고를 당할 사람은 당한다는 생각은 숙명론이지 결정론이 아니다.
셋째,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와 같지 않다. 원인이 결과를 하나로 못 박지 않고 확률만 높이는 경우가 있다면, 모든 사건에 원인이 있으면서도 결정론이 거짓일 수 있다. 11장이 인과와 법칙을 갈라 다룬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다. 결정론이 걸려 있는 것은 인과가 아니라 법칙이 상태를 하나로 정하는가이다.
두 물음을 갈라 놓는다
이제 물음 둘을 또렷이 적는다.
| 물음 | 어떤 종류의 물음인가 | 누가 답하는가 |
|---|---|---|
| 결정론은 참인가 |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한 물음 | 형이상학과 자연과학이 함께 |
|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양립하는가 | 자유의지라는 말의 뜻에 대한 물음 | 철학이 개념을 분석해서 |
두 물음의 답 조합이 자유의지 논쟁의 지형을 만든다. 셋째 물음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까지 넣으면 자리가 넷 나온다.
이 표에서 읽어야 할 것이 둘이다.
- 양립가능론(compatibilism)은 결정론이 참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참이든 거짓이든 자유의지는 무사하다고 말할 뿐이다. 그래서 물리학이 무엇을 발견해도 양립가능론은 흔들리지 않는다.
- 셋째 물음에 직접 걸려 있는 것은 자유지상론(libertarianism)뿐이다. 자유의지가 있고 그것이 결정론과 양립하지 않는다면, 결정론이 거짓이라는 결론이 곧바로 따라 나온다. 20장에 나오는 정치철학의 자유지상주의와 이름이 겹치지만 전혀 다른 주장이다.
양립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을 통틀어 비양립가능론(incompatibilism)이라 한다. 그 안에 자유지상론과 강한 결정론(hard determinism)이 함께 들어간다. 둘은 양립 물음에는 같은 답을 주고 셋째 물음에서 갈린다.
무게를 적어 두자. 양립가능론이 오늘날 표준 개론서가 다수설로 소개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다수설이라는 것이 논증이 되지는 않는다. 아래 절들에서 비양립가능론의 논증을 가장 강한 형태로 세우고, 양립가능론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치는지를 본다.
결과 논증 — 비양립가능론의 뼈대
비양립가능론을 뒷받침하는 가장 널리 논의되는 논증은 결과 논증(consequence argument)이다. 반 인와겐(Peter van Inwagen)이 『자유의지에 관한 시론』(An Essay on Free Will, 1983)에서 다듬어 놓은 형태가 표준이 되었다. 그가 산문으로 적은 뜻은 이렇다 — 결정론이 참이면 우리 행위는 먼 과거의 사실과 자연법칙의 귀결인데,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일도 자연법칙이 무엇인지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귀결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제를 번호를 붙여 세우면 이렇게 된다.
- 먼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자연법칙이 무엇인지도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결정론이 참이면, 지금 내가 하는 행위는 먼 과거의 사실과 자연법칙에서 따라 나온다.
-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서 따라 나오는 것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다.
- 그러므로 결정론이 참이면, 지금 내가 하는 행위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 전제에 이름이 있다. 전이 원리다. "어떻게 할 수 없음"이 귀결 관계를 타고 옮겨 간다는 뜻이다.
이 논증이 왜 강한지부터 보자. 전제 1과 2를 부정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과거를 바꾸거나 법칙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전제 3은 결정론이라는 말의 뜻을 되풀이한 것에 가까워서 부정할 것이 없다. 그러니 남는 것은 전제 4 하나이고, 실제 논쟁의 대부분이 여기에 모여 있다.
전제 4는 처음 보면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할 수 없다"를 형식적으로 적어 놓고 여러 문장에 걸어 보면 이상한 결과가 나온다는 지적이 있다. 특히 "어떻게 할 수 없다" 둘을 하나로 묶는 단계가 의심을 받는다. 반 인와겐 자신도 원리를 뒤에 손보았고, 그 고침이 성공했는지도 다툼거리로 남아 있다. 이 문서는 형식적 세부까지 들어가지 않는다. 기억해 둘 것은 이 논증이 무너진다면 무너지는 자리가 전제 4라는 것이다.
양립가능론이 전제 4를 공격하는 방식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원리 자체가 거짓임을 보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할 수 없다"가 전제 1·2에서 쓰인 뜻과 결론에서 쓰인 뜻이 같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뒤엣것을 밀고 나가면 다음 절의 이야기가 된다 — 자유란 무엇인가를 다시 잡는 일이다.
양립가능론 — 자유의 뜻을 다시 잡는다
양립가능론의 기본 수는 하나다. 자유의 반대말이 결정이 아니라 강제라고 보는 것. 우리가 어떤 사람을 자유롭지 않다고 말할 때 떠올리는 것은 묶인 손, 겨눠진 총, 잠긴 문이다. 원자의 앞선 배치가 아니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와 흄이 세운 고전적 양립가능론이 이것을 그대로 정의로 삼는다. 자유롭다는 것은 하고자 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 방해가 없으면 자유롭고, 방해가 있으면 자유롭지 않다. 내가 물을 마시고 싶어서 물을 마셨다면, 그 욕구가 어떻게 생겼는지와 상관없이 나는 자유롭게 물을 마셨다.
이 정의의 값이 무엇인지 보자. 이대로면 결정론은 자유에 아무 위협이 되지 않는다. 결정론이 참이어도 어떤 사람은 묶여 있고 어떤 사람은 묶여 있지 않다. 그 차이는 그대로 남는다. 대신 치르는 대가가 있다 — 우리가 자유에 대해 걱정하던 것 가운데 일부가 정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조건을 안쪽으로 옮긴다
고전적 정의에 걸리는 첫 반례는 강박과 중독이다. 심한 중독자는 손발이 묶여 있지 않다. 그는 하고자 하는 것을 한다. 그런데 그를 자유롭다고 부르기가 꺼려진다. 방해가 밖이 아니라 안에 있기 때문이다.
프랭크퍼트(Harry Frankfurt)의 계층 이론이 이 자리를 겨냥한다. 욕구에 층을 나눈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가 일차 욕구이고, 그 욕구를 갖고 싶은가 혹은 그 욕구가 나를 움직이기를 바라는가가 이차 욕구다. 두 층이 맞을 때 그 의지는 그 사람의 것이다. 원치 않는 중독자는 약을 원하면서 그 원함을 원하지 않는다. 층이 어긋나 있고, 그래서 그의 행위는 그의 것이 아니다.
이 이론에도 반례가 온다. 이차 욕구까지 누가 심어 놓았다면 어떤가. 층을 하나 더 얹어도 같은 물음이 다시 올라온다. 삼차 욕구를 심었으면 어떤가.
다음 수가 이유 반응성(reasons-responsiveness)이다. 피셔(John Martin Fischer)와 라비자(Mark Ravizza)가 세운 형태가 널리 인용된다. 여기서 보는 것은 욕구의 층이 아니라 그 행위를 낳은 절차다. 다른 이유가 주어졌다면 그 절차가 다르게 움직였을 것인가. 값을 두 배로 올려도 똑같이 사는 사람과, 값이 오르면 사지 않는 사람은 같은 행위를 해도 절차가 다르다. 앞의 사람은 이유를 알아듣지 못하고 뒤의 사람은 알아듣는다.
여기에도 남는 것이 있다. 이유를 아주 잘 알아듣도록 세뇌된 사람은 조건을 채운다. 그래서 이 진영은 절차가 어떻게 생겨났는가까지 조건에 넣게 된다.
조작 논증 — 계보 전체를 겨누는 반론
비양립가능론자가 이 계보 전체를 향해 던지는 반론이 조작 논증(manipulation argument)이다. 모양은 이렇다.
- 어떤 사람의 성격과 욕구와 숙고 절차를 다른 사람이 처음부터 설계해 심어 놓았다고 하자. 그는 양립가능론이 요구하는 조건을 전부 채운다 — 강제받지 않고, 층이 맞고, 이유를 알아듣는다.
- 그런데 그는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그가 하는 일은 결국 설계자가 시킨 일이다.
- 결정론이 참인 보통 세계에서 자란 사람과 이 사람 사이에, 양립가능론이 댈 수 있는 차이가 없다. 둘 다 앞선 원인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 그러므로 결정론이 참이면 보통 사람도 자유롭지 않다.
이 논증은 강하다. 양립가능론이 조건을 아무리 정교하게 다듬어도, 그 조건을 만족하도록 사람을 설계하는 사례를 다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양립가능론의 응답도 약하지 않다. 차이는 있다는 것이다. 조작된 사람의 숙고 절차는 그 사람의 이력에서 자라난 것이 아니라 밖에서 통째로 끼워 넣어진 것이다. 그 차이를 조건으로 적어 넣으면 된다. 남는 물음은 그 차이가 조건으로 적힐 만큼 또렷한가이고, 지금 다투는 자리가 정확히 여기다.
비양립가능론의 두 갈래
결과 논증을 받아들이면 갈림길이 나온다. 결정론이 참이라고 보면 자유의지가 없고, 자유의지가 있다고 보면 결정론이 거짓이다.
강한 결정론과 강한 비양립가능론
강한 결정론은 앞쪽을 택한다. 세계는 결정되어 있고,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부르던 것은 없다.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와 돌바크(Paul-Henri Thiry d'Holbach, 1723–1789)가 근대의 대표적 이름이다. 돌바크는 사람이 자기 행위의 원인을 모른 채 자유롭다고 느낄 뿐이라고 보았다.
오늘날의 형태는 조금 다르다. 페레붐(Derk Pereboom)이 『자유의지 없이 살기』(Living Without Free Will, 2001)에서 세운 강한 비양립가능론은 결정론이 참이라는 전제를 쓰지 않는다. 결정론이 참이면 결과 논증 때문에 자유가 없고, 거짓이면 다음에 볼 운 논증 때문에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없다.
이 입장에 대한 흔한 오해 하나를 미리 끊어 두자. 이들은 사람을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응보로서의 처벌은 근거를 잃지만, 위험한 사람을 격리하고 사람을 나아지게 하고 서로에게 기대를 거는 일은 남는다고 본다. 그 대안이 충분한지가 다투는 자리다.
자유지상론 — 비결정성을 어디에 놓을 것인가
반대쪽을 택하는 것이 자유지상론이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고, 그러므로 결정론은 거짓이다. 여기서 어려운 일이 시작된다. 비결정성을 아무 데나 넣는다고 자유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이는 것이 운 논증이다.
논증은 이렇게 간다. 내 행위가 앞선 사건들에 의해 못 박혀 있다면, 그 앞선 사건들은 내가 정한 것이 아니다. 못 박혀 있지 않다면, 같은 조건에서 다른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어느 쪽이 일어날지를 정한 것이 없다. 정한 것이 없는 것은 통제가 아니다. 무작위가 자유를 주지는 않는다.
여기서 한 문단을 따로 쓴다. 양자역학을 근거로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논증은 이 지점에서 멈춘다. 미시 세계가 비결정적이라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이 데려다주는 곳은 이 그림의 오른쪽 갈래뿐이다. 오른쪽 갈래는 그 자체로 자유를 주지 않는다. 신경세포 어딘가에서 동전이 던져진다고 해서 그 동전 던지기가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물리학은 첫째 물음에 관계하고 둘째 물음에는 관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문서는 여기서 물리학 쪽으로 가지 않는다.
자유지상론이 이 자리에서 내놓는 답이 둘 있다.
사건 인과적 자유지상론은 비결정성을 숙고 안쪽에 놓는다. 케인(Robert Kane)의 그림이 대표적이다. 사람이 갈등하는 결단의 순간 — 서로 다른 이유가 팽팽히 맞설 때 — 결과가 비결정적이고, 어느 쪽이 나오든 그것은 그 사람이 자기 이유로 원했던 것이다. 어느 쪽이 나와도 그 사람의 노력이 낳은 것이므로 운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행위자 인과(agent causation)는 더 근본적인 수를 둔다. 치좀(Roderick Chisholm, 1916–1999)이 세운 형태가 유명하다. 갈림을 정한 것은 앞선 사건이 아니라 행위자 자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원인 자리에 오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실체다. 사람이 어떤 사건을 일으키되, 그 일으킴 자체가 다른 사건에 의해 일으켜지지는 않는다.
이 견해에 대한 반론은 잘 알려져 있다 —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답도 잘 알려져 있다. 인과를 사건과 사건 사이의 관계로만 보는 것이 오히려 특별한 가정이며, 그 가정을 빼면 행위자 인과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11장이 인과를 여러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보인 것이 여기서 쓰인다.
달리 할 수 있었음과 프랭크퍼트 사례
지금까지 계속 나온 표현이 하나 있다. "달리 할 수 있었다." 이 표현이 이 논쟁의 심장이다.
양립가능론이 오래 써 온 수가 조건 분석이다. "그는 달리 할 수 있었다"를 반사실 조건문으로 읽는 것이다. 11장의 표기로 적으면 이렇게 된다.
즉 "그가 달리 하기를 원했다면 달리 했을 것이다"가 참이면 그는 달리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읽기에서는 결정론이 참이어도 이 조건문이 참일 수 있다. 결정론이 참인 세계에서도 "내가 물 대신 커피를 원했다면 커피를 마셨을 것이다"는 참이다.
이 분석에 고전적인 반례가 있다. 어떤 사람이 원할 수조차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하자. 뱀을 만지는 것에 대한 병적 공포가 있어 그것을 원하는 일이 그에게 일어날 수 없다면, 조건문 "그가 원했다면 만졌을 것이다"는 여전히 참일 수 있지만 우리는 그가 만질 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물음이 한 층 뒤로 밀린다 — 그는 달리 원할 수 있었는가. 같은 분석을 다시 걸면 다시 밀리고, 이것이 끝나지 않는다.
프랭크퍼트 사례
여기서 논쟁의 방향을 바꾼 것이 프랭크퍼트가 1969년에 발표한 짧은 논문이다. 그는 "달리 할 수 있었는가"를 분석하는 대신, 그것이 책임의 조건이기는 한가를 물었다.
겨냥한 원리에는 이름이 있다. 대안 가능성 원리다. 어떤 사람이 자기 행위에 대해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다면 그는 달리 할 수 있었어야 한다는 원리다.
사례는 이렇게 만든다. 존스는 투표를 하려 한다. 블랙은 존스가 A를 찍기를 바라고, 존스의 머리에 장치를 심어 두고 지켜본다. 존스가 B 쪽으로 기울면 블랙은 장치를 켜서 A를 찍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존스는 스스로 A를 찍기로 한다. 블랙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두 판정이 함께 나온다. 존스는 A를 찍은 데 대해 책임이 있어 보인다 — 그가 한 일은 개입 없는 자기 결정이었다. 그런데 존스는 달리 할 수 없었다 — 어느 쪽으로 기울었든 결과는 A였다. 둘이 함께 참이면 대안 가능성 원리는 거짓이다.
이 사례가 무엇을 겨냥하는지를 정확히 붙잡아야 한다. 흔한 오해가 셋이다.
- 이 사례는 결정론이 참임을 보이지 않는다. 사례 안에서 존스의 결단이 결정되어 있는지는 열려 있다.
- 이 사례는 자유의지가 있음을 보이지도 없음을 보이지도 않는다. 겨냥하는 것은 책임의 조건이다.
- 이 사례가 성공하면 양립가능론이 곧바로 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비양립가능론이 즐겨 쓰던 길 하나가 막힌다. "결정론이 참이면 달리 할 수 없고, 달리 할 수 없으면 책임이 없다"는 길이다.
사례는 성공했는가
이 사례가 성공했는지도 다툼거리다. 가장 널리 논의되는 반론이 딜레마 반론이다.
블랙은 존스가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를 어떤 징후로 읽어야 한다. 그 징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두 갈래가 난다.
- 징후가 존스의 선택을 이미 못 박는 것이라면 — 사례 안에 결정론이 몰래 들어와 있다. 그렇다면 비양립가능론자는 "그러니 존스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할 것이고, 사례는 아무것도 보이지 못한다. 다투는 결론을 전제로 깔았기 때문이다.
- 징후가 못 박지 않는 것이라면 — 존스가 그 징후를 보이고도 다르게 갈 수 있다. 그러면 블랙은 제때 개입할 수 없고, 대안이 정말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프랭크퍼트 쪽 응답도 여럿이다. 하나는 남은 대안이 번쩍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존스에게 남은 것은 "B 쪽으로 기울어 개입을 부르는 일" 뿐인데, 그 대안은 책임을 떠받칠 만한 종류의 것이 못 된다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개입자를 아예 없애고 자연적 사정으로 대안을 봉쇄하는 사례를 만드는 것이다.
어느 쪽이 이겼는지 적지 않겠다. 이 논쟁은 진행 중이다. 이 장에서 가져갈 것은 결론이 아니라 물음의 모양이다 — 책임을 물으려면 대안이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실제로 무엇이 그 행위를 낳았는가만 보면 되는가.
도덕적 책임, 반응적 태도, 그리고 운
지금까지의 논쟁에는 숨은 가정이 하나 있었다. 형이상학이 먼저 정해져야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가정이다. 결정론이 참인지 보고, 양립하는지 보고, 그러고 나서 누구를 원망해도 되는지 정한다는 순서다.
이 순서 자체를 뒤집은 것이 피터 스트로슨이 1962년에 발표한 「자유와 원한」이다.
반응적 태도
스트로슨은 사람을 대하는 두 관점을 갈라 놓는다.
왼쪽이 참여자 관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를 함께 사는 사람으로 대한다. 그리고 여기서 반응적 태도(reactive attitudes)가 나온다 — 분개, 원한, 감사, 용서, 죄책감. 이 태도들은 상대의 행위에 담긴 선의나 악의나 무관심에 대한 반응이다.
오른쪽이 객관적 관점이다. 여기서 상대는 다루고 관리할 대상이 된다. 치료하고 훈련하고 필요하면 격리한다. 분개는 자리를 잃는다.
스트로슨의 주장은 이렇다. "그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은 반응적 태도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고, 그 이상의 형이상학적 사실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참여자 관점에서 객관적 관점으로 넘어가는 것은 사례별 사정 때문이다 — 어린아이라서, 병 때문에, 강요당해서. 결정론이 참이라는 일반적 사실은 그런 종류의 사정이 아니다. 어느 한 사례를 면제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견해에 대한 강한 반론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서술일 뿐, 우리가 그렇게 해도 되는지에 대한 정당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반응적 태도를 버릴 수 없다는 사실에서 그 태도가 정당하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사실에서 당위로 건너가는 데는 따로 논증이 필요하고, 그 건너감을 정면으로 다루는 것이 17장이다.
운의 문제
마지막으로 운을 다룬다. 이 장에서 "운"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서로 다른 것이므로 갈라 두어야 한다.
| 무엇 | 어디서 나왔나 | 무슨 주장인가 |
|---|---|---|
| 운 논증의 운 | 자유지상론을 겨눌 때 | 비결정적인 갈림은 통제가 아니라 우연이다 |
| 도덕적 운 | 책임을 다룰 때 | 우리 통제 밖의 사정이 도덕적 평가를 실제로 좌우한다 |
도덕적 운(moral luck)은 네이글(Thomas Nagel)과 윌리엄스(Bernard Williams, 1929–2003)가 1970년대에 같은 제목의 글로 나란히 세운 문제다. 우리는 사람을 그의 통제 안에 있는 것만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 종류 | 무엇이 운에 달렸나 | 보기 |
|---|---|---|
| 결과 운 | 행위가 낳은 결과 | 똑같이 졸음운전을 했는데 한 사람은 무사히 도착하고 한 사람은 아이를 친다 |
| 상황 운 | 어떤 상황에 놓이는가 | 시험대에 오를 일이 없었던 사람은 비겁함을 드러낼 기회도 없다 |
| 구성적 운 | 어떤 성격과 기질을 갖게 되는가 | 태어나면서부터 겁이 많거나 참을성이 없다 |
| 인과적 운 | 무엇이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었는가 | 앞선 원인들이 지금의 내 결정을 낳았다 |
마지막 줄이 이 장의 앞부분과 곧바로 이어진다. 인과적 운의 문제는 자유의지 문제를 다른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도덕적 운이 새롭게 보여 주는 것은, 통제 조건을 엄격히 밀고 나가면 평가할 것이 거의 남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과를 빼고, 상황을 빼고, 성격을 빼고, 성격을 만든 원인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여기서 갈래가 둘로 난다. 하나는 우리 실천이 잘못되었다고 보고 통제 조건에 맞게 고치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통제 조건 자체가 지나치다고 보고,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이 원래 운에 노출된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길이다. 어느 쪽인지는 이 장에서 정하지 않는다. 그 결정은 도덕 판단이 무엇을 하는 말인가에 달려 있고, 그 물음은 17장의 것이다.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용어부터 모은다.
| 용어 | 뜻 |
|---|---|
| 결정론(determinism) | 한 시점의 세계 상태와 자연법칙이 함께 그 뒤 모든 상태를 하나로 정한다는 주장. 예측 가능성도 숙명론도 아니다 |
| 숙명론(fatalism) | 내가 무엇을 하든 결과가 같다는 주장. 결정론과 다르다 |
| 양립가능론(compatibilism) | 결정론이 참이어도 자유의지가 있을 수 있다는 입장. 오늘날의 다수설 |
| 비양립가능론(incompatibilism) | 결정론이 참이면 자유의지가 없다는 입장. 아래 둘을 포함한다 |
| 강한 결정론(hard determinism) | 결정론이 참이고 그러므로 자유의지가 없다는 입장 |
| 강한 비양립가능론(hard incompatibilism) | 결정론이 참이든 거짓이든 자유의지가 없다는 입장 |
| 자유지상론(libertarianism) | 자유의지가 있고 그러므로 결정론이 거짓이라는 입장. 20장의 정치철학 용어와 이름만 같다 |
| 결과 논증(consequence argument) | 비양립가능론의 표준 논증. 전제 넷 가운데 전이 원리가 다투는 자리다 |
| 전이 원리 |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서 따라 나오는 것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추론 원리 |
| 일차 욕구 / 이차 욕구 | 무엇을 하고 싶은가 / 그 욕구를 갖고 싶은가 |
| 이유 반응성(reasons-responsiveness) | 행위를 낳은 절차가 다른 이유에 다르게 반응했겠는가를 보는 조건 |
| 조작 논증(manipulation argument) | 설계된 사람과 보통 사람 사이에 양립가능론이 댈 차이가 없다는 반론 |
| 행위자 인과(agent causation) | 원인 자리에 사건이 아니라 행위자가 오는 인과. 자유지상론의 한 갈래 |
| 운 논증 | 비결정적인 갈림은 통제가 아니라 우연이라는 논증. 자유지상론을 겨눈다 |
| 대안 가능성 원리 | 책임이 있으려면 달리 할 수 있었어야 한다는 원리 |
| 프랭크퍼트 사례 | 대안 가능성 원리의 반례로 제시되는 사고실험. 개입자가 대안만 없애고 실제 계열에는 손대지 않는다 |
| 딜레마 반론 | 프랭크퍼트 사례가 논점을 선취하거나 대안을 다 없애지 못한다는 반론 |
| 반응적 태도(reactive attitudes) | 분개·원한·감사·용서·죄책감. 상대의 선의·악의·무관심에 대한 반응 |
| 참여자 관점 / 객관적 관점 | 상대를 함께 사는 사람으로 대하는 자리 / 다루고 관리할 대상으로 보는 자리 |
| 도덕적 운(moral luck) | 통제 밖의 사정이 도덕적 평가를 좌우한다는 문제. 결과·상황·구성·인과의 네 종류 |
사람은 이렇게 나왔다.
| 이름 | 이 장에서 맡은 자리 |
|---|---|
| 홉스 | 고전적 양립가능론 — 자유의 반대는 강제다 |
| 스피노자, 돌바크 | 근대의 강한 결정론 |
| 반 인와겐 | 결과 논증을 표준 형태로 다듬었다 |
| 프랭크퍼트 | 계층 이론, 그리고 대안 가능성 원리에 대한 반례 |
| 피셔, 라비자 | 이유 반응성으로 양립가능론을 다시 세웠다 |
| 케인 | 숙고 안쪽에 비결정성을 두는 자유지상론 |
| 치좀 | 행위자 인과 |
| 페레붐 | 강한 비양립가능론 |
| 피터 스트로슨 | 반응적 태도. 책임 물음의 순서를 뒤집었다 |
| 네이글, 윌리엄스 | 도덕적 운 |
무게를 다시 적어 둔다. 양립가능론이 다수설이고, 강한 결정론과 자유지상론이 소수설이다. 그러나 어느 논증이 결정적인지에 대한 합의는 없다. 특히 전이 원리가 참인가와 프랭크퍼트 사례가 성공했는가는 열려 있다. 더 읽을 곳으로는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의 Free Will 항목과 같은 백과의 Compatibilism 항목, Moral Luck 항목이 있다.
다음 장은 이 장이 계속 전제한 것을 뒤집어 본다. 지금까지 "그 사람이 달리 할 수 있었는가", "그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가"를 물었는데,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에 기대고 있는가. 10장이 배에 대해 물은 것을 13장이 사람에 대해 묻는다.
나는 왜 같은 사람인가
10장에서 배 한 척을 널빤지 하나씩 갈아 끼웠다. 그 배가 그 배인가. 이 장은 같은 물음을 사람에 대해 되풀이한다. 다만 두 가지가 달라진다. 첫째, 사람은 안에서 자기를 바라본다. 어느 쪽이 나인지가 내게는 남의 일이 아니다. 둘째, 답이 실천을 움직인다. 누구에게 책임을 묻고 누구의 앞날을 미리 걱정할지가 여기에 걸려 있다.
이 장에서 답할 질문은 셋이다.
- 무엇이 성립하면 지금의 내가 어제의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 몸인가, 기억인가, 그 밖의 무엇인가.
- 내가 둘로 갈라지면 어떻게 되는가. 이 물음이 이 장의 정점이다.
- 동일성이 정말로 우리가 신경 쓰던 것인가.
10장에서 가져오는 것은 시간을 통한 동일성이라는 물음의 모양과 테세우스의 배, 그리고 라이프니츠 법칙이다. 12장에서 가져오는 것은 도덕적 책임과 반응적 태도다. 반응적 태도는 사람을 향하는데, 그 사람이 계속 그 사람인지를 이 장이 묻는다.
미리 밝혀 둘 것이 있다. 이 장에는 결론이 없다. 인격 동일성의 기준은 지금도 정해지지 않았고, 이 문서는 후보 가운데 하나를 고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러 견해가 있다"로 끝내지도 않는다. 각 후보가 무엇을 지키려고 그렇게 말하는지, 그 대가로 무엇을 내놓는지를 적는 것이 이 장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무엇을 묻고 있는가
먼저 물음을 정확히 잡는다. 여기서 말 하나를 새로 도입한다. "같다"에는 두 뜻이 있다. 질적으로 같다는 것은 성질이 같다는 뜻이고, 수적으로 하나다는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10장이 라이프니츠 법칙으로 밀어붙인 물음은 언제나 뒤엣것이었다. 같은 공장에서 나온 컵 두 개는 질적으로 같지만 수적으로 둘이다. 이 장의 "같은 사람"은 언제나 뒤엣것이다. 스무 살의 나와 예순 살의 나는 질적으로 거의 닮지 않았는데도 수적으로 하나다.
물음을 이렇게 적는다. 어떤 시점의 사람과 다른 시점의 사람이 같은 한 사람이려면 무엇이 성립해야 하는가. 이것을 존속 물음이라 부르자.
이 물음과 자주 섞이는 것이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둘은 다르다. 앞의 물음은 시점 둘을 놓고 관계를 묻고, 뒤의 물음은 한 시점에서 내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묻는다. 그런데 뒤엣것에 대한 답이 앞엣것을 크게 제약한다. 뒤에 볼 동물주의가 정확히 그 길로 온다.
기준이라는 말의 두 뜻
"기준"이라는 말이 두 가지로 쓰인다. 섞으면 논쟁이 헛돈다.
| 무엇 | 무엇을 묻는가 | 보기 |
|---|---|---|
| 증거 기준 | 우리가 어떻게 알아내는가 | 지문, 얼굴, 신분증, 그 사람의 기억 |
| 성립 기준 | 무엇이 그것을 성립시키는가 | 이 장이 찾는 것 |
지문이 일치한다고 해서 지문이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지문은 우리가 알아내는 방법일 뿐이다. 이 장이 다투는 것은 전부 성립 기준이다. 어떤 반론이 "그렇게는 알 수 없다"에 그친다면 그것은 성립 기준에 대한 반론이 아니다.
신체 기준과 동물주의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답은 몸이다. 신체 기준 — 같은 몸이 이어지면 같은 사람이다.
몸의 물질이 계속 바뀐다는 것은 이 기준에 큰 문제가 아니다. 10장이 배에 대해 세운 답 가운데 하나를 그대로 쓰면 된다 — 조금씩 갈리는 것은 계속성을 끊지 않는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다른 데서 온다.
로크(John Locke, 1632–1704)가 만든 왕자와 구두장이 이야기다. 왕자의 의식이 기억을 그대로 지닌 채 구두장이의 몸에 들어가고, 구두장이의 의식은 사라졌다고 하자. 깨어난 그 사람은 궁전에서 자란 일을 기억하고 구두 만드는 법은 모른다. 우리는 그를 누구라고 부르고 싶어지는가. 이야기를 듣는 거의 모든 사람이 왕자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몸을 따라가지 않는다.
이 사례에 밀려 신체 기준은 뇌 기준으로 물러선다. 이어져야 하는 것은 몸 전체가 아니라 뇌라는 것이다. 뇌 기준은 사고실험을 잘 통과한다. 그런데 왜 하필 뇌인가를 물으면, 뇌가 심리를 담고 있어서라는 답이 나온다. 그러면 정작 일을 하는 것은 뇌가 아니라 심리라는 말이 된다.
동물주의 — 소수설이지만 약하지 않다
여기서 방향을 아예 바꾸는 입장이 동물주의(animalism)다. 올슨(Eric Olson)이 세운 형태가 널리 인용된다. 주장은 이렇다. 우리는 사람이기 이전에 하나의 동물이다. 그리고 하나의 동물이 언제까지 존속하는지는 생물학적 물음이다. 그 동물이 살아 있는 동안 내가 있다.
이 입장은 로크가 그어 놓은 선을 정면으로 되받는다. 로크는 사람과 인간이라는 동물을 다른 것으로 보고 각각의 동일성 조건을 따로 두었다. 동물주의는 그 분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한다.
그 논증이 생각하는 동물 논증이다. 가장 강한 형태로 적으면 이렇다.
- 지금 이 의자에는 인간이라는 동물이 하나 앉아 있다.
- 그 동물은 생각한다. 동물이 생각하지 못한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 지금 이 의자에는 나도 앉아 있고, 나도 생각한다.
- 내가 그 동물이 아니라면, 이 의자에는 생각하는 것이 둘 있다.
- 그렇다면 나는 내가 그 둘 가운데 어느 쪽인지 알 방법이 없다. 둘 다 똑같이 "나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나는 그 동물이다.
동물주의에는 다른 근거도 있다. 심리 쪽 기준을 따르면 태아였던 것은 내가 아니고, 지속적 식물 상태에 빠진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다. 심리 연속성이 거기서 끊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태어났다"고 말하고, 병상에 누운 사람을 여전히 그 사람으로 대한다.
동물주의가 치르는 대가도 크다. 뇌 이식 사례에서 이 입장은 나는 뇌를 잃은 몸 쪽에 남는다고 말해야 한다. 옮겨 간 뇌가 내 기억을 다 갖고 있어도 그렇다. 올슨 쪽은 이 결과를 받아들이고, 대신 그 경우 내가 신경 쓰는 것이 나의 존속이 아니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응수가 나중에 파핏의 결론과 뜻밖에 가까워진다.
기억에서 심리 연속성으로
로크가 『인간지성론』 2판(1694)에 더한 「동일성과 상이성」 장이 이 논쟁의 출발점이다. 그는 사람을 이성과 반성을 갖고 자기를 자기로 여길 수 있는 사고하는 존재로 정의하고, 인격 동일성이 의식이 뻗치는 데까지 미친다고 했다. 흔히 기억 기준이라 부르는 것이 이것이다.
이 기준이 값진 이유가 있다. 앞 장의 물음과 곧바로 맞물리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일을 안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그 일을 내 것으로 여긴다는 뜻이고, 책임과 후회와 자랑이 붙는 자리가 정확히 거기다. 로크 자신이 인격 동일성을 법정의 개념이라고 불렀다.
두 반론 — 연쇄와 순환
리드(Thomas Reid, 1710–1796)가 든 용감한 장교가 첫째 반론이다.
소년이 과수원에서 매를 맞는다. 자라서 장교가 되어 전투에서 깃발을 빼앗는데, 그때 매 맞던 일을 기억한다. 더 늙어 장군이 되어서는 깃발 빼앗던 일을 기억하지만 매 맞던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
직접 기억을 기준으로 삼으면 장교는 소년과 같은 사람이고, 장군은 장교와 같은 사람인데, 장군은 소년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동일성은 이렇게 끊길 수 없다. 이것이 10장의 라이프니츠 법칙과 함께 오는 동일성의 성질이다 — 같은 것의 같은 것은 같은 것이다.
고치는 방법은 사슬이다. 직접 기억으로 잇는 대신, 직접 기억의 마디들이 겹쳐 이어지면 같은 사람으로 친다. 소년과 장군 사이에 장교라는 마디가 있으므로 이어진다. 이 고침은 성공하지만 값이 있다. 사슬로 잇는 순간 기준의 이름이 바뀐다. 이제 이것은 기억 기준이 아니라 심리 연속성 기준이다.
둘째 반론은 버틀러(Joseph Butler, 1692–1752)의 순환 반론이다. 기억이 인격 동일성을 구성한다는 말은 순환이라는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기억한다고 말할 때, 그 말이 참이려면 그 일을 내가 겪었어야 한다. 겪지 않은 일을 기억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착각이다. 그러니 기억은 이미 동일성을 쓰고 있고, 동일성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이 반론에 대한 표준적 대응이 유사기억이다. 슈메이커(Sydney Shoemaker)가 도입한 말이다. 기억과 똑같이 생겼지만 "내가 겪었다"를 조건에 넣지 않은 상태를 하나 잡는다. 어떤 과거 경험에서 알맞은 방식으로 생겨난, 그 경험을 안에서 떠올리는 상태다. 그러면 순환이 풀린다 — 유사기억으로 동일성을 정의하고, 기억은 "같은 사람의 유사기억"으로 나중에 정의하면 된다.
값도 있다. 유사기억은 남의 경험에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으므로, 유사기억만으로는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는 무게가 나오지 않는다. 그 무게야말로 로크가 붙잡으려던 것이었다.
연결성과 연속성
파핏(Derek Parfit, 1942–2017)이 다듬은 구별 둘을 여기서 도입한다. 뒤에서 계속 쓴다.
| 무엇 | 뜻 | 성질 |
|---|---|---|
| 심리 연결성 | 기억·의도·믿음·성격 같은 직접적인 심리적 이음이 실제로 있는 것 | 정도를 갖는다.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다 |
| 심리 연속성 | 충분히 강한 연결성의 마디들이 겹쳐 이어지는 것 | 정도를 갖지 않는다. 이어지거나 끊기거나다 |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 사이에는 연결이 아주 많고, 오늘의 나와 다섯 살의 나 사이에는 거의 없다. 그런데 그 사이가 마디로 이어지므로 연속성은 있다. 연결성은 정도를 갖고 연속성은 갖지 않는다는 이 차이가 뒤에서 결정적인 일을 한다.
마지막으로 한 조건이 남는다. 연속성이 어떤 원인으로 유지되어야 하는가.
| 기준 | 요구하는 것 | 텔레포트를 어떻게 보는가 |
|---|---|---|
| 좁은 기준 | 평소의 원인으로 이어질 것. 같은 뇌가 계속 일할 것 | 그것은 죽음이고 복제다 |
| 넓은 기준 | 원인이 무엇이든 이어지기만 하면 될 것 | 그것은 이동이다 |
몸을 스캔해 없애고 먼 곳에서 원자 하나까지 같게 다시 만드는 장치를 생각해 보자. 좁은 기준은 그것을 죽음으로 보고 넓은 기준은 이동으로 본다. 어느 쪽인지 정하지 못한 채로 두어도 다음 절로 넘어갈 수 있다. 다음 절의 사례는 어느 기준을 잡든 똑같이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분열 — 하나가 둘이 될 때
이제 이 장의 정점이다.
사람의 뇌는 반구 둘로 되어 있고, 한쪽을 잃고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사고실험을 만든다. 내 뇌를 반구 둘로 나누어 각각을 다른 몸에 이식한다. 두 반구 모두 내 심리를 온전히 지탱한다고 하자. 수술이 끝나면 두 사람이 깨어난다. 둘 다 내 기억을 갖고 있고, 둘 다 내 성격과 계획을 갖고 있고, 둘 다 자기가 나라고 여긴다. 그들을 A와 B라 부르자.
이 사고실험이 무서운 이유는 한쪽만 이식했을 때와 견주어 보면 드러난다. 한쪽만 이식하고 다른 반구를 버렸다면, A가 나라는 데 다툴 것이 별로 없다. 심리 연속성 기준이 그렇게 판정하고 직관도 대체로 따른다. 그런데 버리는 대신 그것도 이식했다. 나와 A 사이의 관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전혀 다른 방에서 일어난 일뿐이다.
동일성의 성질과 충돌한다
여기서 형식적인 문제가 생긴다. 동일성에는 이런 성질이 있다. 어떤 것과 동일한 것은 하나뿐이다. 내가 A와 같고 내가 B와 같다면, A와 B가 서로 같아야 한다. 10장의 라이프니츠 법칙이 이것을 강제한다 — 같은 것이면 참인 것이 모두 같아야 하는데, A와 B는 서로 다른 방에 있고 서로 다른 것을 겪고 있다. 그러므로 A와 B는 같지 않다.
정리하면 이렇다. 심리 연속성 기준은 "나 = A"와 "나 = B"를 함께 내놓는데, 그 둘이 함께 참이면 "A = B"여야 하고, "A = B"는 거짓이다. 기준이 답을 못 맞힌 것이 아니라, 기준이 동일성 아닌 다른 것을 재고 있었다는 신호다.
동일성 관계의 논리적 성질을 형식으로 다루는 것은 논리학 문서 12장의 일이다. 이 장에서 쓰는 것은 방금 말로 적은 성질 하나뿐이다.
다섯 답과 그 대가
답할 수 있는 방식이 다섯 가지 있고, 다섯 모두 값을 치른다.
| 답 | 무엇을 말하는가 | 치르는 값 |
|---|---|---|
| 첫째 — A만 나다 | 한쪽만 내가 살아남았다 | 두 쪽이 완전히 대칭인데 한쪽을 고를 근거가 없다 |
| 둘째 — B만 나다 | 위와 같다 | 위와 같다 |
| 셋째 — 둘 다 나다 | 나는 두 사람이 되었다 | 동일성은 하나에 하나만 성립한다. A가 나이고 B도 나이면 A와 B가 같아야 하는데 둘은 다른 사람이다 |
| 넷째 — 둘 다 내가 아니다 | 나는 죽었다 | 한쪽만 이식했으면 살아남았을 것이다. 성공을 하나 더 보탰더니 죽었다는 말이 된다 |
| 다섯째 — 갈라지지 않을 때만 나다 | 비분지 조항을 붙인다 | 내 생존이 나와 아무 관계 없는 저쪽 수술실의 사실에 달리게 된다 |
마지막 답을 조금 더 보자. 비분지 조항을 붙이는 길이다. 기준을 이렇게 고친다 — 심리 연속성이 이어지고, 그 이어짐이 갈라지지 않을 때만 같은 사람이다. 그러면 한쪽만 이식했을 때는 A가 나이고, 양쪽을 이식하면 A도 B도 내가 아니다. 형식적 모순은 사라진다.
그런데 이 고침의 대가가 이상하다. 내가 살아남는지가 나와 A 사이의 관계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저쪽 수술실에서 두 번째 이식이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에 달린다.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가 나와 아무 인과적 관계도 없는 곳의 사실에 좌우되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여기서 갈린다.
넷째 답 — 둘 다 내가 아니다 — 도 같은 이상함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준다. 한쪽만 이식했으면 나는 살아남았을 것이다. 성공을 하나 더 보탰더니 죽었다는 말이 된다.
파핏 — 동일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파핏이 『이유와 인격』(Reasons and Persons, 1984)에서 내놓은 결론은 도발적이다. 그의 길을 따라가 보자.
첫걸음은 환원 견해다. 사람이 시간을 지나 존속한다는 사실은, 몸과 뇌가 이어진다는 사실과 심리가 이어진다는 사실로 이루어져 있고, 그 밖에 더 깊은 사실은 없다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그 사실들과 별도로 있어서 그것들 중 어느 쪽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둘째 걸음이 여기서 나온다. 환원 견해가 맞다면, 분열 사례에서 물리적·심리적 사실을 남김없이 알고도 "그래서 둘 중 누가 나인가"가 남는다면, 그 물음은 답이 숨어 있는 물음이 아니라 빈 물음이다. 답할 것이 없는 물음이라는 말이다.
셋째 걸음.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신경 쓰던 것은 무엇인가. 파핏의 답은 관계 R이다. 심리 연결성과 연속성, 그리고 그것이 올바른 방식으로 생겨났다는 것. 관계 R은 동일성과 달리 정도를 가질 수 있고 갈라질 수 있다. 그래서 분열 사례에서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 관계 R은 나에게서 A로도 이어지고 B로도 이어진다. 그뿐이다.
결론은 이렇게 적힌다. 동일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계 R이 중요하다. 그리고 분열은 죽음이 아니다. 관계 R이 두 갈래로 이어지는 것은 끊기는 것보다 낫고, 그것을 죽음이라 부르는 것은 동일성이라는 틀에 매인 탓이다.
받아들이는 쪽과 거부하는 쪽
이 결론에는 실천적 여파가 크다. 파핏 자신이 그것을 두려움이 줄어드는 일로 받아들였다고 썼다. 죽음이 특별히 나쁜 것은 그것이 나의 끝이어서인데, 나라는 것이 관계 R의 다발이라면 그 다발이 어디까지 이어지는가만 남는다.
거부하는 쪽도 강하다. 두 갈래가 있다.
- 단순 견해 — 인격 동일성은 더 이상 쪼개어 분석되지 않는 단순한 사실이다. 스윈번(Richard Swinburne)과 치좀이 이 길을 갔다. 근거는 이렇다. 분열 사례에서 "둘 중 하나가 나다. 다만 어느 쪽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일관되며, 그렇게 말하고 싶어지는 우리 반응 자체가 더 깊은 사실이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는 것이다. 파핏은 우리 반응을 틀로 보았지만, 이 쪽은 그것을 자료로 본다.
- 동물주의 — 물음에는 답이 있다. 그 동물이 어디 있는지를 물으면 된다. 반구를 나누어 이식하는 사례에서 동물주의는 답을 낼 수 있다. 이 입장에서 파핏의 논증은 사람을 심리로 잡은 데서 이미 잘못 출발했다.
여기가 미결이다. 3장이 예고한 미결 가운데 인격 동일성의 기준이 가리키는 자리가 여기다. 이 문서는 셋 가운데 하나를 고르지 않는다. 고르지 않는 것과 판단을 미루는 것은 다르다 — 각 입장이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내놓는지는 위에 적었고, 그 이상은 지금 아무도 확립하지 못했다.
실천적 함의
이 장의 물음이 왜 중요한지를 마지막으로 적는다.
처벌과 응보. 12장에서 본 반응적 태도는 사람을 향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원망할 때 원망의 대상은 그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이다. 그렇다면 사십 년 전에 죄를 지은 사람과 지금 감옥에 있는 사람 사이에 심리 연결이 거의 남지 않았을 때, 무엇이 달라지는가. 파핏의 틀을 받아들이면 연결성이 정도를 가지므로 책임도 정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런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미래의 나에 대한 배려. 나는 내일의 내 고통을 남의 고통보다 훨씬 무겁게 여긴다.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 특별한 무게의 근거가 "그가 나이기 때문"이라면, 동일성이 정도를 갖지 않으므로 무게도 정해진 값이어야 한다. 그런데 근거가 관계 R이라면 무게도 정도를 따라야 한다. 그러면 아주 먼 미래의 나에 대한 배려와 남에 대한 배려 사이의 선이 흐려진다.
약속과 책무. 어제의 내가 한 약속을 오늘의 내가 지고 있다. 그 짐이 옮겨 오는 통로가 무엇인지를 이 장의 후보들이 각각 다르게 답한다.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다. 이 세 자리에서 나오는 것은 결론이 아니라 물음이다. 심리 연결이 약하다는 사실에서 "그러니 처벌하지 말라"가 곧바로 나오지 않는다. 사실에서 당위로 건너가려면 따로 논증이 필요하고, 그 건너감 자체를 다루는 것이 17장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이론으로 세우는 것은 18장이고, 그 이론을 구체적 사례에 대어 보는 것은 19장이다. 분배를 누구들 사이에서 하는가라는 물음은 20장에서 다시 나온다.
이 장은 그 물음들에 답하지 않는다. 다만 그 물음들이 인격 동일성에 걸려 있다는 것을 보였다.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용어부터 모은다.
| 용어 | 뜻 |
|---|---|
| 인격 동일성(personal identity) | 어떤 시점의 사람과 다른 시점의 사람이 같은 한 사람인가의 문제 |
| 수적 동일성 / 질적 동일성 | 둘이 아니라 하나다 / 성질이 같다. 이 장의 같은 사람은 언제나 앞엣것이다 |
| 증거 기준 / 성립 기준 | 어떻게 알아내는가 / 무엇이 그것을 성립시키는가 |
| 신체 기준 / 뇌 기준 | 같은 몸이 이어지면 같은 사람이다 / 이어져야 하는 것은 뇌다 |
| 동물주의(animalism) | 우리는 하나의 동물이고, 그 동물이 존속하는 동안 우리가 존속한다 |
| 생각하는 동물 논증 | 내가 그 동물이 아니면 생각하는 것이 둘이 된다는 동물주의의 논증 |
| 기억 기준 | 과거의 그 일을 안에서 기억하면 그 사람이 나다. 로크의 착상 |
| 용감한 장교 | 직접 기억 관계가 이행적이지 않음을 보이는 리드의 사례 |
| 순환 반론 | 기억이 이미 동일성을 쓰고 있으므로 동일성을 만들 수 없다는 버틀러의 반론 |
| 유사기억(quasi-memory) | 내가 겪었다는 조건을 빼고 정의한 기억 비슷한 상태. 순환을 끊는다 |
| 심리 연결성 | 직접적인 심리적 이음. 정도를 갖는다 |
| 심리 연속성 | 겹치는 연결의 사슬. 정도를 갖지 않는다 |
| 좁은 기준 / 넓은 기준 | 연속성이 평소의 원인으로 이어질 것을 요구하는가 아닌가 |
| 분열(fission) | 한 사람에게서 심리 연속성이 둘로 갈라지는 사례. 반구 분할 이식이 표준 형태다 |
| 비분지 조항 | 갈라지지 않을 때만 같은 사람이라는 단서. 생존이 외부 사실에 좌우된다 |
| 환원 견해 | 사람의 존속은 몸과 심리의 사실들로 이루어지고 더 깊은 사실은 없다 |
| 더 깊은 사실 | 그 사실들과 별도로 있어야 할 동일성의 사실. 환원 견해는 그것이 없다고 본다 |
| 빈 물음 | 사실을 다 알고도 남는, 답할 것이 없는 물음 |
| 관계 R | 심리 연결성과 연속성, 그리고 그것이 올바르게 생겨났다는 것. 정도를 갖고 갈라질 수 있다 |
| 단순 견해 | 인격 동일성은 더 쪼개어 분석되지 않는 단순한 사실이다 |
사람은 이렇게 나왔다.
| 이름 | 이 장에서 맡은 자리 |
|---|---|
| 로크 | 기억 기준. 사람과 동물을 갈라 놓았다 |
| 리드 | 용감한 장교 — 이행성 반론 |
| 버틀러 | 순환 반론 |
| 슈메이커 | 유사기억 |
| 올슨 | 동물주의 |
| 파핏 | 환원 견해, 관계 R, 동일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
| 스윈번 | 단순 견해 |
이 장의 등급을 다시 적는다. 인격 동일성의 기준은 미결이다. 심리 연속성 쪽, 동물주의 쪽, 단순 견해 쪽이 모두 살아 있고 어느 쪽도 우세하지 않다. 파핏의 "동일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도 널리 읽히는 만큼 널리 논박된다. 더 읽을 곳으로는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의 Personal Identity 항목이 있다.
다음 장은 이 장이 계속 기대 온 것을 정면으로 다룬다. 심리 연속성이니 의식이니 하는 것을 여기서는 주어진 것처럼 썼는데,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이고 몸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14장의 물음이다.
마음과 몸
13장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내내 전제하고 썼다. 기억이니 심리 연속성이니 의식이니 하는 말을 주어진 것처럼 다루었다. 이 장은 그 전제를 걷어 낸다.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고, 몸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 장에서 답할 질문은 둘이다.
- 내가 지금 느끼는 아픔과 내 뇌에서 일어나는 일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다른 것이라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가.
- 마음을 물리적인 것으로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는가. 없다면 무엇이 남는가.
13장과의 경계를 먼저 긋는다. 13장은 마음의 동일성을 물었다 — 어제의 그 마음과 오늘의 이 마음이 왜 한 사람의 것인가. 이 장은 마음의 존재론을 묻는다 — 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종류의 것인가. 앞의 물음은 시점 둘을 놓고 관계를 묻고, 이 장의 물음은 한 시점만 놓고도 던져진다.
11장에서 가져오는 것이 셋이다. 수반은 마지막 절에서 물리주의를 정식화하는 데 쓴다. 후험적 필연과 필연·우연 교차표는 유형 동일론에 대한 크립키의 반론에서 그대로 쓴다. 가능세계는 15장의 좀비 논증에서 쓴다. 10장에서 가져오는 것은 라이프니츠 법칙, 오컴의 면도날, 그리고 유형과 사례의 구분이다. 마지막 것이 이 장의 중심에 놓인다.
미리 밝혀 둘 것이 있다. 이 분야는 입장이 가장 많은 분야다. 그래서 이 장은 입장 목록을 만들지 않는다. 각 입장은 바로 앞 입장이 걸려 넘어진 자리를 고치려고 나왔다. 그 사슬을 따라가는 것이 이 장의 뼈대이고, 사슬의 마지막 고리는 15장으로 넘어간다.
심신 문제는 무엇을 묻는가
물음을 정확히 세우는 데서 시작한다. 심신 문제가 문제로 보이는 이유는 두 목록이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것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방식은 이렇다. 그것은 공간의 어느 자리를 차지하고, 크기와 모양과 질량을 갖고, 누구나 볼 수 있고, 물리학과 화학과 생물학의 말로 기술된다. 뇌도 그렇다. 무게가 있고 자리가 있고 열어 보면 누구에게나 보인다.
마음에 대해 아는 방식은 다르다. 내 아픔에는 모양이 없고 무게가 없다. 그것이 내 머릿속 어느 세제곱센티미터에 있느냐는 물음은 이상하게 들린다. 그리고 내 아픔은 나에게만 이런 방식으로 주어진다. 남은 내 표정과 말과 뇌 영상을 볼 수 있지만, 내가 아픔을 겪는 방식으로 그것을 겪지는 못한다.
두 목록이 이렇게 어긋나는데도 둘은 촘촘히 붙어 있다. 마취제를 넣으면 아픔이 사라지고, 뇌의 어느 부위가 상하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붙어 있는데 종류가 달라 보인다는 것, 이것이 심신 문제다.
마음 상태에는 두 갈래가 있다
이 장과 다음 장이 계속 쓸 구분을 여기서 정해 둔다. 마음 상태를 크게 둘로 가른다.
| 갈래 | 무엇인가 | 보기 |
|---|---|---|
| 지향적 상태 | 무언가에 관한 상태. 관한 그 무엇을 내용이라 부른다 | 비가 온다는 믿음, 물을 마시고 싶다는 욕구, 시험에 붙기를 바람 |
| 감각적 상태 | 겪어지는 느낌이 있는 상태. 겪는 쪽에서 어떠함이 있다 | 치통, 빨강을 봄, 커피 냄새를 맡음 |
두 갈래가 깨끗이 갈리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무서워하는 것은 무언가에 관한 상태이면서 느낌이 있는 상태다. 그래도 이 구분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물리주의가 두 갈래에 대해 겪는 어려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지향적 상태 쪽의 어려움은 15장의 지향성 절에서, 감각적 상태 쪽의 어려움은 15장의 감각질 절에서 정면으로 다룬다. 이 장은 그 앞까지 간다.
이 장의 지형도
아래 그림이 이 장 전체다. 상자 하나하나를 외울 것이 아니라 화살표를 보면 된다. 화살표에 적힌 것이 앞 입장이 걸려 넘어진 자리다.
이원론 — 실체와 속성
사슬의 첫 고리다. 두 목록이 어긋난다면 종류가 정말 둘이라고 답하는 길이 있다.
실체 이원론
이원론(dualism)은 마음과 몸이 서로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견해다. 그 가운데 실체 이원론은 마음과 몸이 서로 다른 실체라고 본다. 실체란 다른 것에 붙어 있지 않고 그 자체로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그림에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실체가 있다. 공간을 차지하는 실체와 생각하는 실체다. 몸은 앞엣것이고 마음은 뒤엣것이며, 사람은 둘이 결합한 것이다.
이 견해를 뒷받침하려고 데카르트가 든 논증 가운데 널리 인용되는 것이 둘이다. 의심 논증. 나는 내 몸이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있다. 7장의 꿈 논증과 악령이 그것을 보였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과 몸은 같지 않다.
나눌 수 있음 논증. 몸은 부분으로 나뉜다. 팔을 잃어도 나는 남는다. 그런데 마음은 부분으로 나뉘지 않는다. 마음의 절반이라는 것은 없다. 나뉘는 것과 나뉘지 않는 것은 같을 수 없다.
첫 논증은 지금 서 있는 형태로는 통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아래 예제에서 다룬다. 둘째 논증은 13장의 분열 사례가 정면으로 되받는다 — 반구를 나누어 이식하는 사례가 성립한다면 마음도 어떤 뜻에서 나뉜다.
인과적 상호작용 문제
실체 이원론이 무너지는 자리는 논증의 결함이 아니라 결과다. 마음과 몸이 정말 다른 종류라면, 둘은 어떻게 서로를 움직이는가.
이 반론을 처음 날카롭게 제기한 사람은 보헤미아의 엘리자베스(Elisabeth of Bohemia, 1618–1680)다. 1643년 데카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물었다. 한 물체를 움직이려면 밀어야 하고, 밀려면 닿아야 하고, 닿으려면 넓이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생각하는 실체에는 넓이가 없다. 넓이 없는 것이 어떻게 팔을 들어 올리는가.
오늘날 이 반론은 더 강한 형태로 다시 적힌다. 물리적 영역의 인과적 폐쇄(causal closure)라 불리는 명제인데, 이렇게 적는다 — 어떤 물리적 사건에 원인이 있다면 그 원인은 물리적 사건이다.
이것은 물리학이 실제로 굴러가는 방식에 대한 관찰에 기댄다. 근육이 수축하는 일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경의 발화가 있고, 그 앞에 다른 신경의 발화가 있고, 어디까지 가도 물리적인 것만 나온다. 물리학이 완결된 학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물리적 사건의 원인을 찾을 때 비물리적인 것을 넣어야 했던 적이 없다는 뜻이다.
인과적 폐쇄가 참이면 실체 이원론은 곤란해진다. 내가 손을 드는 것은 물리적 사건이고, 그 원인은 물리적 사건이다. 비물리적인 마음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이원론 쪽 응수는 셋이다. 셋 다 살아 있는 선택지이되 셋 다 값을 치른다.
| 응수 | 무엇을 말하는가 | 치르는 값 |
|---|---|---|
| 상호작용론 | 마음과 몸이 정말로 서로를 움직인다. 인과적 폐쇄가 참이 아니거나, 물리 법칙이 열어 둔 틈에서 마음이 일한다 | 물리학과 부딪친다. 그 틈이 어디인지, 왜 아직 아무도 못 봤는지 말해야 한다 |
| 병행론 | 마음과 몸은 서로를 움직이지 않는다. 두 계열이 나란히 흐르도록 처음부터 맞춰져 있다 | 왜 맞춰져 있는지를 설명하려면 큰 것을 끌어와야 한다. 설명의 값이 문제보다 커진다 |
| 부수현상론 | 몸이 마음을 낳지만 마음은 아무것도 낳지 않는다. 마음은 기계에서 나는 소리 같은 것이다 | 아파서 소리쳤다는 말이 거짓이 된다. 그리고 아픔에 대해 말하는 일조차 아픔이 원인이 아니게 된다 |
마지막 값이 가장 아프다. 부수현상론이 참이면 내가 지금 감각질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각질이 설명하지 못한다. 이 자기 지시적 곤란은 15장에서 다시 나온다.
속성 이원론 — 살아 있는 소수설
여기서 이원론이 물러설 자리가 있다. 실체는 하나만 인정하되 속성이 두 종류라고 보는 것, 곧 속성 이원론이다. 그림은 이렇다. 세상에 있는 것은 물리적인 것뿐이다. 사람도 물질 덩어리다. 그런데 그 물질 덩어리가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면, 물리적 속성으로 남김없이 적히지 않는 속성이 나타난다. 무엇을 겪고 있는가라는 속성이다. 실체가 둘이 아니므로 "넓이 없는 것이 어떻게 미는가"라는 엘리자베스의 물음은 이 견해에 그대로 오지 않는다.
물리주의가 다수설이고 속성 이원론이 주요 소수설이다. 이 문서는 다수설을 먼저 쓰되 소수설을 약하게 요약하지 않는다. 속성 이원론이 살아 있는 이유를 지지자가 인정할 형태로 적으면 이렇다.
- 물리적 서술은 언제나 구조와 작동을 적는다. 무엇이 무엇과 어떻게 이어져 어떤 일을 하는가. 그런데 빨강을 볼 때 어떠한가는 구조와 작동에 대한 물음이 아니다. 그러니 물리적 서술을 아무리 늘려도 그 항목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료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종류의 문제일 수 있다.
- 다른 모든 곳에서는 과학적 환원이 성공했다. 열은 분자 운동으로, 유전은 분자 구조로 환원되었다. 그 성공의 방식이 언제나 같다 — 우리가 설명하려던 것을 그것이 하는 일로 다시 잡고, 그 일을 하는 메커니즘을 찾는다. 의식에서는 이 방식이 처음부터 막힌다. 의식을 그것이 하는 일로 다시 잡으면 설명하려던 것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 이 견해는 물리학을 건드리지 않는다. 자연법칙에 심리물리적 법칙을 더할 뿐 물리 법칙을 고치지 않는다. 이 형태를 차머스(David Chalmers, 1966– )는 자연주의적 이원론이라 부른다.
속성 이원론이 치르는 값도 크다. 물리적 사건의 원인이 물리적이라면 그 새로운 속성이 하는 일이 없어 보이고, 그러면 앞의 표에서 본 부수현상론의 곤란이 되돌아온다. 이 문제는 마지막 절의 배제 논증에서 정확한 형태로 나온다.
속성 이원론을 떠받치는 논증들은 15장에 있다 — 지식 논증, 뒤집힌 스펙트럼, 좀비 논증. 여기서 기억할 것은 하나다. 이원론이 실체를 포기하고도 살아남는 형태가 있다는 것.
논리적 행동주의와 그 실패
사슬의 둘째 고리다. 이원론이 걸린 자리는 비물리적인 것을 세상에 하나 더 들여놓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예 들여놓지 않는 길이 있다. 마음에 대한 말이 실은 다른 것에 대한 말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논리적 행동주의는 이렇게 주장한다. 마음 상태에 대한 문장은 행동과 행동 성향에 대한 문장으로 남김없이 옮겨 쓸 수 있다. "그는 목이 마르다"는 "물이 있으면 그가 마실 것이고, 물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답할 것이고 …"라는 길고 긴 조건문들의 묶음과 같은 뜻이다.
여기서 갈라 둘 것이 있다. 심리학의 방법론적 행동주의는 "마음 상태를 연구 대상으로 삼지 말고 관찰 가능한 행동만 다루자"는 연구 지침이다. 논리적 행동주의는 "마음 상태에 대한 말의 뜻이 행동에 대한 말이다"라는 의미론적 주장이다. 이 장의 대상은 뒤엣것이다. 라일(Gilbert Ryle, 1900–1976)의 『마음의 개념』(The Concept of Mind, 1949)과 헴펠의 1930년대 논문이 대표적인 진술이다.
라일이 이원론을 부르는 이름이 기계 속의 유령이다. 그가 보기에 이원론은 문법에 속은 결과다. "몸"과 "마음"이 둘 다 명사이므로 두 종류의 것을 가리킨다고 여긴 것이다. 그는 이것을 범주 오류라 부른다. 대학을 구경시켜 준 사람에게 "건물과 도서관과 학과는 봤는데 대학은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대학이 건물들 옆에 하나 더 있는 것이 아니듯, 마음이 몸 옆에 하나 더 있는 것이 아니다.
왜 실패했는가
논리적 행동주의는 실패했다. 이것은 이 장에서 다투지 않는 사항이다. 실패한 이유가 셋이다.
첫째, 옮겨 쓰기가 순환을 벗어나지 못한다. "목이 마르다"를 "물이 있으면 마신다"로 옮겼다고 하자.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액체가 물이라고 믿지 않으면 마시지 않는다. 독이 들었다고 믿으면 마시지 않는다.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여기면 참는다. 조건을 채우려면 다른 마음 상태를 끌어와야 하고, 그 마음 상태를 다시 옮기려면 또 다른 마음 상태가 필요하다. 어떤 마음 상태도 혼자서는 행동을 정하지 않는다.
둘째, 행동 성향 없이 마음 상태만 있는 경우가 생각될 수 있다. 퍼트넘이 든 슈퍼 스파르타인 사례가 이것이다. 아픔을 드러내지 않도록 완벽히 훈련된 사회를 상상하자. 그들은 아파도 찡그리지 않고 신음하지 않으며 아프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그들은 아프다. 여기에 더해,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자란 세대를 생각하면 "훈련으로 억눌렀다"는 설명조차 쓸 수 없다.
셋째, 안에서 아는 방식이 통째로 빠진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아는 방식은 내 행동을 관찰해서가 아니다. 나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할지 미리 살펴보고 나서 아프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행동주의는 마음에 대한 문장을 전부 삼인칭에서 다시 적으려 하는데, 일인칭이 그 서술에서 사라진다.
그래도 이 입장이 남긴 것이 있다. 마음 상태를 그것이 다른 것들과 맺는 관계로 잡는다는 발상이다. 그 발상은 버려지지 않고 기능주의가 이어받는다. 다만 그때 관계의 상대가 행동만이 아니라 다른 마음 상태까지로 넓어진다. 위의 첫째 이유가 요구한 것이 정확히 그것이다.
유형 동일론과 다수 실현
사슬의 셋째 고리다. 행동주의가 걸린 자리는 마음 상태를 다른 것에 대한 말로 옮기려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옮기지 말고, 마음 상태가 실제로 무엇인지를 말하면 된다.
유형 동일론
동일론(identity theory)은 마음 상태가 뇌 상태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1950년대에 플레이스(U. T. Place, 1924–2000)와 스마트(J. J. C. Smart, 1920–2012)가 세운 형태가 표준이다. 이 주장의 힘은 같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쓰는 데 있다. 마음 상태가 뇌 상태와 나란히 있으면서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둘이 아니다. 그러면 인과 문제가 통째로 사라진다. 아픔이 어떻게 뇌에 영향을 주느냐는 물음은, 아픔이 곧 그 뇌 상태라면 던져지지 않는다.
스마트가 든 근거가 둘이다. 첫째는 오컴의 면도날이다. 뇌 상태만으로 모든 일이 설명된다면 마음 상태를 따로 세울 이유가 없다. 둘째는 과학사에서 되풀이된 이론적 동일화다. 번개는 전기 방전이고, 열은 분자의 운동이고, 물은 H₂O 다. 이 동일성은 뜻을 분석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다. 11장의 어휘로 적으면 후험적이면서 필연적이다. 마음과 뇌의 동일성도 같은 종류의 발견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 장이 계속 쓰는 상투구 하나를 도입한다. 철학 문헌은 "고통은 C-섬유 발화다"라는 예를 습관처럼 쓴다. 이것은 신경생리학의 주장이 아니다. 실제로 통증에 관여하는 신경 구조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C-섬유는 그 일부일 뿐이다. 이 문구는 "어떤 특정한 신경 상태"를 대신하는 자리 표시로만 쓴다. 이 장도 그 관례를 따르되, 그것이 자리 표시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유형인가 사례인가
여기서 10장의 구분이 결정적으로 쓰인다. 동일론은 무엇과 무엇이 같다고 말하는가.
| 주장 | 무엇을 말하는가 | 세기 |
|---|---|---|
| 유형 동일론 | 마음 상태의 유형과 물리 상태의 유형이 같다. 고통이라는 유형이 곧 어떤 신경 상태라는 유형이다 | 강하다. 고통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그 신경 상태가 있어야 한다 |
| 사례 동일론 | 낱낱의 마음 사건이 낱낱의 물리 사건과 같다. 지금 내가 겪는 이 고통이 지금 내 뇌에서 일어나는 이 사건이다 | 약하다. 다른 고통이 다른 종류의 물리 사건이어도 된다 |
유형 동일론을 지지할 이유가 있다. 유형끼리 묶여야 법칙 같은 일반화를 세울 수 있고, 11장이 다룬 법칙 같은 일반화가 있어야 설명과 예측이 가능하다. 사례끼리만 묶으면 "고통은 무엇인가"에 대한 일반적인 답이 없다. 그러나 강한 주장에는 강한 반례가 오고, 두 반론이 온다.
크립키의 반론 — 필연적 동일성
첫째 반론은 11장의 도구를 그대로 쓴다. 크립키의 논증은 이렇게 간다.
- (P1) 동일성이 성립하면 필연적으로 성립한다. 어떤 것이 그것 아닌 세계는 없다.
- (P2) "고통"과 "C-섬유 발화"는 둘 다 고정지시어다. 어느 세계에서도 같은 것을 가리킨다.
- (P3) 그런데 C-섬유가 발화하는데 아프지 않은 상황, 그리고 C-섬유 없이 아픈 상황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 (C) 그러므로 고통은 C-섬유 발화가 아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P3)이 왜 물리치기 어려운가이다. 11장에서 같은 모양의 반론을 물/H₂O 에 대해 물리쳤던 것을 떠올려 보자. "물이 H₂O 가 아닌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은, 실은 "물처럼 보이고 물처럼 흐르는 다른 것이 있는 상황"을 생각한 것이었다. 우리가 상상한 것은 물이 아니라 물처럼 보이는 것이었으므로, 상상 가능성이 필연적 동일성을 흔들지 못했다.
이 수법이 고통에는 통하지 않는다. 물의 경우 우리는 물을 겉모습으로 붙잡고 있었고, 그래서 겉모습과 실체를 갈라 놓을 수 있었다. 고통의 경우에는 겉모습이 곧 실체다. 아픈 것처럼 느껴지는데 아프지 않은 것이란 없다. 그러니 "고통처럼 느껴지는 다른 것"이라는 재서술이 불가능하고, 상상 가능성을 설명해 없앨 길이 막힌다.
이 반론이 결정적인지에 대해서는 다툼이 있다. 물리주의 쪽 대응은 대개 (P3)에서 상상 가능성이 정말 가능성을 보증하는지를 되묻는 형태를 띤다. 그 되물음이 15장 좀비 논증의 핵심 쟁점과 같은 것이다.
다수 실현 가능성
둘째 반론이 실제로 유형 동일론의 자리를 무너뜨린 것이다. 퍼트넘이 1960년대에 제기했다. 다수 실현 가능성(multiple realizability)이란 같은 마음 상태 유형이 서로 다른 물리 상태 유형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논증은 이렇다.
- (P1) 고통은 사람에게도 있고, 문어에게도 있고, 신경계가 우리와 아주 다른 생물에게도 있을 수 있다. 신경계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진 존재에게도 있을 수 있다.
- (P2) 이들의 물리 상태는 서로 같은 유형이 아니다. 문어의 신경계는 사람의 것과 구조가 다르다.
- (P3) 유형 동일론이 참이면, 고통인 것은 모두 같은 물리 유형이어야 한다.
- (C) 그러므로 유형 동일론은 거짓이다.
이 논증의 힘은 (P1)이 공상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다. 화성인을 끌어오지 않아도 된다. 사람 안에서도 같은 마음 상태가 다른 신경 방식으로 실현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뇌 손상 뒤 다른 부위가 그 일을 떠맡는 사례가 그 방향을 가리킨다.
여기가 정설이다. 유형 동일론은 다수 실현 논증으로 곤란해졌다. 다만 무엇이 무너졌는지를 정확히 적어야 한다. 무너진 것은 유형끼리의 동일성이다. 사례 동일론은 그대로 살아 있다. 지금 내가 겪는 이 고통이 지금 내 뇌에서 일어나는 이 사건이라는 주장은 이 논증에 조금도 다치지 않는다. 문어의 고통이 다른 종류의 사건이어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사례 동일론의 대표적인 형태가 데이비드슨(Donald Davidson, 1917–2003)의 무법칙적 일원론이다. 낱낱의 사건은 물리적 사건이되 마음의 유형과 물리의 유형을 잇는 엄밀한 법칙은 없다는 견해다.
유형 동일론 쪽 되받음도 적어 둔다. 가장 강한 형태는 동일화를 종에 상대적으로 하는 것이다. "고통 일반"을 어떤 신경 상태와 동일시하지 말고, "사람의 고통"을 사람의 어떤 신경 상태와, "문어의 고통"을 문어의 어떤 신경 상태와 동일시하면 된다. 이 길에서는 (P3)이 부인된다. 대가는 "고통 그 자체"에 대한 일반적인 답이 없어진다는 것이고, 그러면 왜 이 모두를 고통이라 부르는지를 따로 설명해야 한다. 그 설명이 결국 다음 절의 기능주의를 부른다.
기능주의
사슬의 넷째 고리다. 지금까지 두 가지가 밝혀졌다. 행동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마음 상태를 행동하고만 묶으려 했기 때문이고, 유형 동일론이 곤란해진 이유는 마음 상태를 특정 물질하고만 묶으려 했기 때문이다. 두 실패를 함께 고치는 길이 기능주의(functionalism)다.
기능주의의 주장은 이렇다. 마음 상태는 그것이 하는 일로 정해진다. 그 일이란 입력에서 무엇을 받고, 다른 마음 상태들과 어떻게 주고받고, 출력으로 무엇을 내놓는가이다. 고통은 조직 손상이라는 입력에서 생겨나고, 그 상태를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를 낳고, 주의를 그쪽으로 끌고, 회피 행동과 신음을 출력으로 내놓는 상태다. 이 역할을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고통이다.
여기서 실현이라는 말을 정해 둔다. 어떤 물리 상태가 그 역할을 실제로 맡고 있을 때, 그 물리 상태가 그 마음 상태를 실현한다고 말한다. 역할은 하나여도 실현하는 것은 여럿일 수 있으므로, 다수 실현이 반례가 아니라 예측이 된다. 두 실패를 어떻게 고쳤는지 한 줄씩 적으면 이렇다.
| 앞 입장 | 무엇을 이어받았나 | 무엇을 고쳤나 |
|---|---|---|
| 논리적 행동주의 | 마음 상태를 관계로 잡는다는 발상 | 관계의 상대에 다른 마음 상태를 넣었다. 그래서 순환 문제가 순환이 아니게 된다 |
| 유형 동일론 | 마음 상태가 물리적으로 실현된다는 것 | 유형끼리 묶기를 그만두고 역할과 실현을 갈랐다 |
첫 줄을 좀 더 보자. 행동주의는 마음 상태를 다른 마음 상태로 설명하면 순환이라고 여겨 그것을 금지했고, 그 금지 때문에 번역이 끝나지 않았다. 기능주의는 금지를 푼다. 대신 마음 상태들을 한꺼번에 정의한다. 물리학이 질량과 힘을 따로따로 정의하지 않고 법칙들의 묶음 안에서 함께 정의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11장이 최선의 체계 분석에서 램지의 이름과 함께 다룬 기법이 여기서도 쓰인다 — 이론 전체를 하나의 긴 문장으로 적고, 마음 상태 이름들을 변항으로 바꾼 뒤 "이 관계망의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각각을 정의한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비유가 자주 쓰인다. 같은 프로그램이 서로 다른 기계에서 돌 수 있듯이 같은 마음이 서로 다른 물질에서 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다수 실현을 잡아내는 데는 좋지만 오도할 수 있다. 기능주의는 마음이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할 필요가 없다. 역할로 정의된다는 것과 계산으로 정의된다는 것은 다른 주장이고, 뒤엣것은 기능주의의 한 갈래일 뿐이다.
감각질이라는 문제
기능주의는 오늘날 심리철학의 기본 틀에 가깝다. 그런데 이 입장에 계속 되돌아오는 반론이 있고, 그 반론이 다음 장 전체를 이룬다. 중국 인민 논증이 그 예고편이다. 블록(Ned Block, 1942– )이 든 사례다. 아주 많은 사람에게 각자 간단한 규칙을 주고 무전기로 서로 신호를 주고받게 해서, 한 사람의 뇌가 하는 것과 똑같은 관계망을 구현했다고 하자. 입력도 출력도 사람의 것과 같다. 기능주의에 따르면 이 체계는 고통을 갖는다. 그런데 이 체계 전체가 무언가를 느낀다는 말이 그럴듯한가.
이 사례가 겨누는 것은 정확히 하나다. 역할을 다 채우고도 겪어지는 것이 없을 수 있지 않은가. 기능주의 쪽 응답도 강하다. 이 사례가 끌어내는 것은 논증이 아니라 낯섦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뉴런 하나하나에 대해서도 그것이 느낌을 만든다는 것을 그럴듯하게 여기지 않는다. 규모와 속도가 직관을 흔들 뿐이라면 그것은 자료가 아니다. 3장이 사고실험에 반론이 들어올 자리 셋을 적어 두었는데, 이 응답은 그중 "판단이 그 결론을 지지하지 않는다"에 해당한다.
여기가 이 장의 끝이자 다음 장의 시작이다. 사슬을 따라오며 남은 문제가 하나로 좁혀졌다. 마음 상태를 역할로 잡으면 지향적 상태는 상당히 잘 다뤄지는데, 감각적 상태에서는 "역할은 채웠는데 무언가 빠졌다"는 느낌이 계속 남는다. 그 빠진 것에 이름을 붙이고 정면으로 다루는 것이 15장이다.
물리주의를 어떻게 적는가
마지막 절이다. 지금까지 "물리주의"라는 말을 여러 번 썼는데 정확히 적지는 않았다. 물리주의(physicalism)는 세상에 있는 것이 결국 물리적인 것이라는 견해다. 유물론이라는 말은 이 문서에서 쓰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물질 덩어리와 그 운동을 뜻하던 말이라 장이나 파동 같은 것을 담기 어렵고, 오늘날의 논쟁은 "물질"이 아니라 "물리학이 다루는 것"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수반으로 적기
물리주의를 동일론으로 적으면 다수 실현에 걸린다. 그래서 11장의 수반을 쓴다. 11장이 정의한 대로, A 가 B 에 수반한다는 것은 B 에서 차이가 없으면 A 에서도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리주의를 이렇게 적는다. 마음의 사실은 물리적 사실에 수반한다 — 물리적 사실이 모두 같은 두 상황이 마음의 사실에서 다를 수는 없다.
이 정식화가 유용한 이유가 셋이다. 첫째, 다수 실현을 견딘다. 수반은 물리적으로 다르면서 마음이 같은 경우를 금지하지 않는다. 문어와 사람이 둘 다 아플 수 있다. 둘째, 유형끼리의 대응을 요구하지 않는다. 셋째, 11장이 강조한 대로 수반은 의존만 말하고 정체를 말하지 않으므로, 환원이 가능한지를 정하지 않은 채로 물리주의를 진술할 수 있다.
그런데 수반만으로는 부족하다. 수반은 함께 변한다는 것만 말하고 어느 쪽이 어느 쪽 때문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마음의 사실이 물리적 사실 위에 필연적으로 얹히기만 하면 수반은 성립하므로, 마음을 물리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견해 가운데도 수반을 만족하는 것이 있다. 그래서 물리주의자는 조항을 하나 더 붙인다. 우리 세계의 물리적 사실을 그대로 복제하되 그 이상은 아무것도 더하지 않은 세계는, 우리 세계의 완전한 복제다. 잭슨(Frank Jackson, 1943– )이 널리 쓰이는 형태로 적은 이 조항은 "그리고 그것이 전부다"를 명시적으로 넣는다.
환원적 물리주의와 비환원적 물리주의
물리주의 안에서 갈리는 자리가 있다.
| 갈래 | 무엇을 말하는가 | 부담 |
|---|---|---|
| 환원적 물리주의 | 마음의 속성은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된다. 원리적으로 물리학의 말로 다시 적을 수 있다 | 다수 실현을 처리해야 한다. 종 상대적 환원이 표준 대응이다 |
| 비환원적 물리주의 | 있는 것은 물리적인 것뿐이지만 마음의 속성은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 환원되지 않는 속성이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해야 한다. 아래의 배제 논증이 이것을 묻는다 |
비환원적 물리주의가 오랫동안 기본 입장이었다. 다수 실현을 받아들이면서 물리주의를 지킬 수 있고, 심리학이 신경과학으로 흡수되지 않는 이유도 설명하기 때문이다.
배제 논증
김재권(Jaegwon Kim, 1934–2019)이 다듬은 논증이 비환원적 물리주의를 정면으로 압박한다. 이 논증은 앞에서 이원론을 압박한 것과 같은 도구를 쓴다.
- (P1) 어떤 마음 사건이 어떤 물리적 결과를 일으킨다. 아픔이 신음을 일으킨다.
- (P2) 인과적 폐쇄에 따라 그 물리적 결과에는 충분한 물리적 원인이 있다.
- (P3) 마음 속성이 물리 속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면, 마음 원인과 물리 원인은 서로 다른 둘이다.
- (P4) 하나의 결과에 충분한 원인이 둘 있는 것은 과잉결정이다. 11장이 다룬 과잉결정은 특별한 경우이지 일상이 아니다.
- (C) 그러므로 마음 사건이 물리적 결과를 일으킨다는 (P1)이 위태롭다.
남는 선택지가 셋이다. (P3)을 끊고 환원을 받아들이거나, (P4)를 끊고 이런 종류의 겹침은 문제가 아니라고 논증하거나, (P1)을 포기하고 부수현상론으로 가거나. 셋째 길은 이원론이 걸렸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므로, 물리주의자에게도 정신적 인과 문제가 그대로 있다는 것이 이 논증의 요점이다. (P4)를 끊는 길이 오늘날 가장 활발하다. 마음 원인과 물리 원인이 경쟁하는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각상의 모양이 유리창을 깨는 것과 그 조각상을 이루는 청동 덩어리가 유리창을 깨는 것이 두 개의 인과가 아니듯, 수반하는 속성과 수반의 기초가 되는 속성도 경쟁하지 않는다는 논지다. 이 응답이 성공했는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제거주의 — 가장 멀리 간 형태
물리주의를 끝까지 밀면 다른 결론이 나온다. 제거주의다. 폴 처칠랜드(Paul Churchland, 1942– )와 패트리샤 처칠랜드(Patricia Churchland, 1943– )가 대표적으로 옹호한다. 주장은 이렇다. 우리가 믿음이니 욕구니 하며 마음을 설명하는 방식은 하나의 이론이다. 그것을 통속 심리학이라 부르자. 그리고 그것은 나쁜 이론이다. 나쁜 이론이 가리키던 것은 다른 것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없어진다. 플로지스톤은 산소로 환원되지 않았다. 그냥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믿음과 욕구도 그럴 수 있다.
가장 강한 형태로 적으면 근거가 셋이다. 첫째, 통속 심리학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 잠과 꿈, 정신 질환, 기억이 어떻게 저장되고 무너지는지, 배우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 거의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둘째, 이 이론은 오래되었는데 진보하지 않았다. 9장의 어휘로 적으면 퇴행적 연구 프로그램의 특징을 보인다. 셋째, 신경과학이 성숙하면서 통속 심리학의 범주와 잘 맞지 않는 그림이 나오고 있는데, 다른 과학사에서 그런 경우에 옛 범주는 대개 흡수되지 않고 버려졌다.
반론 가운데 널리 인용되는 것이 자기 논박이다. "믿음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것이 참이라고 믿고 있으므로 자기 주장을 어긴다는 것이다. 이 반론은 겉보기만큼 강하지 않다. 제거주의자는 자기 주장을 믿음이라는 말 없이 다시 적으면 된다고 답할 수 있고, 지금 그렇게 적을 수 없다는 것이 그렇게 적힐 수 없다는 뜻은 아니라고 덧붙일 수 있다. 생기론자를 반박할 때도 "당신은 살아 있으면서 생기를 부정한다"는 말은 반박이 아니었다.
실제 다툼은 다른 데 있다. 통속 심리학이 정말 하나의 이론인가, 그리고 이론이 나쁘다는 것에서 그것이 가리키던 것이 없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는가이다. 이 문서는 제거주의를 소수설로 적는다. 다만 그것이 논증이 약해서가 아니라 결론이 감당하기 어려워서라는 점은 밝혀 둔다.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용어부터 모은다.
| 용어 | 뜻 |
|---|---|
| 지향적 상태 / 감각적 상태 | 무언가에 관한 상태 / 겪어지는 어떠함이 있는 상태. 15장이 각각을 이어받는다 |
| 이원론(dualism) | 마음과 몸이 서로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견해 |
| 실체 이원론 | 마음과 몸이 서로 다른 실체라는 견해. 데카르트 |
| 속성 이원론 / 자연주의적 이원론 | 실체는 하나이되 물리 속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속성이 있다 / 물리 법칙을 고치지 않고 심리물리적 법칙을 더하는 그 형태. 차머스 |
| 인과적 폐쇄 | 원인을 가진 물리적 사건의 원인은 물리적 사건이다 |
| 상호작용론 / 병행론 / 부수현상론 | 이원론이 인과 문제에 답하는 세 길 |
| 논리적 행동주의 | 마음 상태에 대한 문장이 행동과 성향에 대한 문장으로 남김없이 옮겨진다는 견해. 실패했다 |
| 범주 오류 / 기계 속의 유령 | 서로 다른 범주의 것을 같은 범주에 놓고 세는 잘못 / 라일이 실체 이원론을 부르는 이름 |
| 슈퍼 스파르타인 | 아픔이 있어도 아무 행동 성향을 보이지 않는 사례. 퍼트넘 |
| 동일론(identity theory) | 마음 상태가 뇌 상태와 같은 것이라는 견해 |
| 유형 동일론 | 마음 상태의 유형이 물리 상태의 유형과 같다. 다수 실현으로 곤란해졌다 |
| 사례 동일론 | 낱낱의 마음 사건이 낱낱의 물리 사건과 같다. 살아 있다 |
| 무법칙적 일원론 | 사례 동일론을 받아들이되 마음과 물리를 잇는 엄밀한 법칙은 없다는 견해. 데이비드슨 |
| C-섬유 발화 | ‘어떤 특정한 신경 상태’ 를 대신하는 철학 문헌의 자리 표시. 신경생리학의 주장이 아니다 |
| 다수 실현 가능성(multiple realizability) | 같은 마음 유형이 서로 다른 물리 유형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 |
| 종 상대적 동일화 | 고통 일반이 아니라 사람의 고통·문어의 고통 수준에서 동일화하는 되받음 |
| 기능주의(functionalism) | 마음 상태는 입력·다른 마음 상태·출력의 관계망에서 차지하는 역할로 정해진다. 그 역할을 맡은 물리 상태를 실현자라 하고, 맡고 있음을 실현이라 한다 |
| 중국 인민 논증 | 역할을 다 채워도 겪어지는 것이 없을 수 있다는 블록의 사례 |
| 물리주의(physicalism) | 있는 것은 결국 물리적인 것이라는 견해. 다수설 |
| 환원적 / 비환원적 물리주의 | 마음의 속성이 물리 속성으로 환원되는가에서 갈린다 |
| 배제 논증 | 환원되지 않는 마음 속성은 할 일이 없어 보인다는 김재권의 논증 |
| 통속 심리학 / 제거주의 | 믿음·욕구로 행동을 설명하는 일상의 틀 / 그것이 나쁜 이론이고 그것이 가리키던 것은 없다는 견해. 소수설 |
사람은 이렇게 나왔다.
| 이름 | 이 장에서 맡은 자리 |
|---|---|
| 데카르트 | 실체 이원론. 의심 논증과 나눌 수 있음 논증 |
| 보헤미아의 엘리자베스 | 인과적 상호작용 문제를 처음 날카롭게 제기했다 |
| 라일 · 헴펠 | 논리적 행동주의. 라일에게서 범주 오류와 기계 속의 유령이 나왔다 |
| 플레이스 / 스마트 | 유형 동일론 |
| 퍼트넘 | 슈퍼 스파르타인, 다수 실현 논증, 기능주의 |
| 크립키 | 동일성의 필연성을 써서 유형 동일론을 겨눈 반론 |
| 데이비드슨 | 무법칙적 일원론 — 사례 동일론 |
| 블록 | 중국 인민 논증 |
| 김재권 | 배제 논증 |
| 처칠랜드 부부 | 제거주의 |
| 잭슨 | 물리주의의 최소 복제 정식화. 15장에서 지식 논증으로 다시 나온다 |
| 차머스 | 자연주의적 이원론. 논증은 15장에 있다 |
등급을 다시 적는다. 논리적 행동주의가 실패했다는 것과 유형 동일론이 다수 실현 논증으로 곤란해졌다는 것은 정설이다. 사례 동일론은 곤란해지지 않았다. 물리주의가 다수설이고 속성 이원론이 주요 소수설이다. 제거주의는 소수설이다. 기능주의가 물리주의의 표준적인 뼈대 노릇을 하지만, 감각질을 다룰 수 있는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더 읽을 곳으로는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의 Physicalism 항목과 같은 백과의 Multiple Realizability 항목이 있다.
다음 장은 사슬의 마지막 고리다. 기능주의가 역할을 다 채우고도 남는다고들 하는 그것, 감각질과 지향성을 정면으로 다룬다. 그리고 그 논쟁이 기계의 마음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까지 간다.
의식·지향성·기계의 마음
14장의 사슬은 기능주의에서 멈췄다. 마음 상태를 그것이 하는 일로 잡으면 이원론의 인과 문제도, 행동주의의 순환도, 유형 동일론의 다수 실현도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두 가지가 계속 남았다. 역할을 다 채웠는데도 겪어지는 것이 빠진 듯하다는 느낌, 그리고 마음 상태가 어떻게 무언가에 관한 것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14장이 마음 상태를 지향적 상태와 감각적 상태로 갈라 둔 것이 정확히 이 두 남은 것에 대응한다.
이 장에서 답할 질문은 셋이다.
- 물리적 설명을 다 마치고도 남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논증하는가.
- 내 머릿속의 상태가 어떻게 저 바깥의 무언가에 관한 것이 되는가.
-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물음은 정확히 무엇을 묻는 것인가.
11장에서 가져오는 것이 셋째 절의 뼈대다. 가능세계, 필연과 우연, 그리고 상상 가능함과 가능함이 갈라진 그 사례다. 좀비 논증은 양상 논증이므로 그 도구가 그대로 쓰인다. 양상 논리의 형식 체계는 논리학 문서 18장의 일이고 이 장은 그리로 들어가지 않는다. 14장에서 가져오는 것은 기능주의, 물리주의의 수반 정식화, 속성 이원론, 그리고 지향적 문맥에 대한 경고다.
미리 밝혀 둔다. 이 장의 중심 물음은 미결이고, 문제 자체가 있는지부터 갈린다. 어려운 문제가 실재하는 문제라고 보는 쪽과 잘못 세워진 물음이라고 보는 쪽이 모두 살아 있다. 이 문서는 어느 쪽도 고르지 않고, 특히 뒤쪽을 "이해를 못 한 것"으로 그리지 않는다.
감각질과 두 종류의 문제
먼저 이름을 붙인다. 감각질(qualia)은 어떤 마음 상태를 겪을 때 겪는 쪽에서 느껴지는 그 어떠함이다. 잘 익은 토마토를 볼 때의 그 빨감, 치통의 그 쑤심, 커피의 그 냄새. 낱말이 가리키는 것을 정의로 붙잡기 어렵다는 것 자체가 이 장의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다.
네이글이 이것을 붙잡는 방법을 하나 주었다. 어떤 존재가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그 존재로 있다는 것이 어떠한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박쥐를 예로 든다. 박쥐는 초음파를 쏘고 그 반향으로 세상을 잡는다. 우리는 박쥐의 신경계를 남김없이 알아낼 수 있고, 반향으로 세상을 잡는 일이 어떤 계산인지도 알아낼 수 있다. 그래도 박쥐로 있다는 것이 어떠한지는 알아내지 못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사람이 박쥐처럼 사는 것이 어떠할지이지 박쥐로 있는 것이 어떠할지가 아니다.
네이글이 무엇을 주장하고 무엇을 주장하지 않는지 갈라 두어야 한다. 그는 물리주의가 거짓이라고 결론짓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물리주의를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서술은 관점에서 떨어져 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의식은 관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
차머스가 의식에 관한 물음들을 두 무더기로 가른 것이 이 분야의 표준 어휘가 되었다.
쉬운 문제는 의식과 관련된 능력과 기능을 설명하는 문제들이다. 자극을 어떻게 갈라내는가, 주의가 어떻게 옮겨 가는가, 정보가 어떻게 여러 체계에 쓸 수 있게 되는가, 사람이 어떻게 자기 내부 상태를 보고하는가, 잠과 깸이 어떻게 갈리는가. 쉽다는 말은 풀기 쉽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을 하면 풀리는지 안다는 뜻이다. 어떤 메커니즘이 그 기능을 수행하는지 찾아내면 그 물음은 닫힌다.
어려운 문제(the hard problem)는 하나다. 왜 그 모든 처리에 겪어짐이 따라붙는가. 기능이 다 수행되고도 아무것도 겪어지지 않을 수 있어 보이는데, 실제로는 겪어진다. 이 물음은 메커니즘을 찾는 방식으로 닫히지 않는다. 어떤 메커니즘을 가리켜도 "그런데 왜 그것이 겪어지는가"가 다시 물어지기 때문이다.
같은 사태를 레바인(Joseph Levine)은 설명적 간극이라 불렀다. "고통은 C-섬유 발화다"를 참으로 받아들여도, 물이 H₂O 라는 것을 받아들였을 때와 달리 왜 그런지가 이해되지 않는다. 물의 경우에는 H₂O 의 성질에서 물의 행동이 따라 나오는 것이 보인다. 고통의 경우에는 신경 상태의 성질에서 아픔이 따라 나오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레바인은 이것이 곧바로 존재론적 결론을 주지는 않는다고 조심스럽게 적었다. 간극은 우선 설명의 간극이다.
문제가 있기는 한가
여기가 이 장의 미결 지점이다. 어려운 문제를 잘못 세워진 물음으로 보는 쪽이 있고, 그 견해는 약하지 않다. 데닛(Daniel Dennett, 1942–2024)이 대표적이다. 그쪽의 논거를 지지자가 인정할 형태로 적으면 이렇다.
- 감각질이라는 개념이 검사를 견디지 못한다. 감각질은 보통 그 자체로 있고, 말로 옮길 수 없고, 사적이고, 겪는 이에게 직접 주어지는 성질로 정의된다. 그런데 어떤 상태의 기능적·성향적 성질을 모두 덜어 낸 뒤에 무엇이 남는지 구체적으로 적어 보라고 하면, 정해진 것이 남지 않는다. 남는 것이 없다면 설명해야 할 별도의 항목도 없다.
- "그런데 왜 그것이 겪어지는가"라는 되물음은 언제든 던질 수 있는 형태의 물음이다. 생명에 대해서도 한때 같은 되물음이 있었다. 대사와 번식과 항상성을 다 설명해도 "그런데 왜 그것이 살아 있음인가"가 남는 듯했다. 설명이 충분히 쌓이자 그 물음이 사라졌다. 의식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이다.
- 사고실험이 결론을 만들어 낸다. 좀비나 뒤집힌 스펙트럼 같은 장치는 "기능은 같은데 겪어짐이 다르다"를 이야기 안에 미리 넣어 두고 그것을 결론으로 꺼낸다. 3장이 사고실험에 반론이 들어올 자리로 적어 둔 셋 가운데 첫째 — 상황이 실은 가능하지 않다 — 를 그대로 지적하는 것이다.
- 이 쪽에도 설명해야 할 것이 남는다는 것을 이 견해는 인정한다. 다만 그 남은 것이 "왜 겪어지는가"가 아니라 "왜 겪어짐이라는 별도의 것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보이는가"라고 본다. 이 방향을 환상주의라 부른다.
반대쪽 응답도 강하다. 감각질 개념이 흐릿하다는 것과 가리키는 것이 없다는 것은 다르고, 생명과의 유비는 논점 선취라는 것이다. 생명의 경우에는 설명해야 할 것이 처음부터 기능이었으므로 기능을 설명하자 물음이 닫혔다. 의식의 경우에 그렇게 말하려면 설명해야 할 것이 처음부터 기능이었다는 것을 보여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다투는 지점이다.
이 문서는 어느 쪽도 고르지 않는다. 어려운 문제는 미결이고, 그 문제가 있기는 한지부터 갈린다.
세 논증 — 뒤집힌 스펙트럼·메리의 방·좀비
어려운 문제가 실재한다고 보는 쪽은 그냥 그렇게 느낀다고 말하지 않는다. 논증을 세운다. 널리 논의된 것이 셋이고, 셋이 겨누는 자리가 조금씩 다르다.
뒤집힌 스펙트럼
나와 당신이 색에 대해 하는 모든 일이 똑같다고 하자. 같은 것을 빨갛다고 부르고, 같은 신호등에서 서고, 같은 색을 따뜻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빨강을 볼 때 겪는 것을 당신은 초록을 볼 때 겪는다고 하자. 우리 둘 다 이 사실을 알아낼 방법이 없다.
이 사례가 겨누는 것은 기능주의다. 기능적 역할이 같은데 감각질이 다르다면, 마음 상태는 역할로 정해지지 않는다.
기능주의 쪽 대응 가운데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비대칭 논거다. 색 공간은 대칭이 아니다. 노랑은 밝고 파랑은 어둡게 보이며, 빨강과 초록은 심리적으로 대비되는 정도가 파랑과 노랑의 그것과 다르다. 그러므로 실제로 스펙트럼을 뒤집으면 "이 색이 저 색보다 밝다" 같은 판단이 어긋나고, 그 어긋남은 행동으로 드러난다. 곧 진짜로 기능이 같으면서 감각질이 뒤집힌 경우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대응이 무엇을 보이고 무엇을 못 보이는지 정확히 적어야 한다. 보이는 것은 사람의 색 경험에 대해서는 뒤집기가 실제로는 어렵다는 것이다. 못 보이는 것은 그런 뒤집힘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색 공간이 우연히 대칭이 아닌 것이라면, 대칭인 감각 차원을 가진 존재에게는 뒤집기가 성립한다. 그러면 논증은 사람에게서만 막힌 것이 된다.
지식 논증 — 메리의 방
잭슨이 든 사례다. 메리는 색에 관한 물리적 사실을 전부 아는 과학자인데, 태어나서 한 번도 색을 본 적이 없다. 흑백으로만 된 방에서 흑백 화면으로 공부했다. 그가 아는 것에는 빛의 파장, 망막의 수용체, 시각 피질에서 일어나는 일, 사람이 색을 볼 때 뇌에서 벌어지는 모든 물리적 사실이 들어 있다.
어느 날 메리가 방을 나와 처음으로 빨간 것을 본다. 그는 무언가를 새로 알게 되는가.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고 답한다. 논증은 그 판단에서 출발한다.
- (P1) 메리는 방 안에서 색에 관한 물리적 사실을 모두 알았다.
- (P2) 방을 나온 뒤 메리는 새로운 것을 안다 — 빨강을 보는 것이 어떠한지를.
- (C1) 그러므로 색에 관한 사실 가운데 물리적 사실이 아닌 것이 있다.
- (C) 그러므로 물리주의는 거짓이다.
물리주의 쪽 응답이 크게 둘이다.
능력 가설. 메리가 얻은 것은 사실이 아니라 능력이라는 것이다. 상상하고, 기억하고, 다시 알아보는 능력.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히는 것이 새로운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듯, 빨강을 겪는 것도 새 사실을 얻는 것이 아니다. (P2)를 이렇게 다시 읽으면 (C1)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
옛 사실을 새 방식으로. 메리가 알게 된 사실은 이미 알던 그 사실인데, 그것을 붙잡는 개념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11장의 헤스페루스와 포스포러스가 같은 모양이다. 하나의 사실을 두 이름으로 붙잡을 수 있고, 두 이름이 같은 것을 가리킨다는 것을 모를 수 있다. 겪음으로만 얻어지는 개념이 있다면 그 개념으로 옛 사실을 새로 붙잡는 일이 일어난다. 이 방향을 현상 개념 전략이라 부른다.
덧붙일 사실이 하나 있다. 잭슨 자신이 나중에 이 논증을 거부하고 물리주의 쪽으로 옮겼다. 논증을 만든 사람이 논증을 버렸다는 것이 논증을 반박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논증이 어디서 다투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자료로는 쓸 만하다.
좀비 논증
셋 가운데 가장 야심 찬 것이다. 차머스가 다듬은 형태를 쓴다. 이것은 양상 논증이므로 11장의 도구가 그대로 필요하다.
철학적 좀비란 나와 물리적으로 낱낱까지 똑같으면서 아무것도 겪지 않는 존재다. 같은 뇌, 같은 신경 발화, 같은 행동, 같은 말.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감각질에 대해 강의도 한다. 그런데 안쪽이 캄캄하다. 영화의 좀비가 아니다 — 겉으로는 아무 차이도 없다.
- (P1) 좀비 세계는 생각할 수 있다. 모순 없이 정합적으로 그려진다.
- (P2)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다. 즉 그런 가능세계가 있다.
- (P3) 물리적 사실이 우리 세계와 똑같은데 의식의 사실이 다른 세계가 있다면, 의식은 물리적인 것에 수반하지 않는다.
- (C) 그러므로 14장이 적은 형태의 물리주의는 거짓이다.
(P3)은 14장의 수반 정식화를 그대로 뒤집은 것이므로 다툴 것이 적다. (P1)도 상당히 많은 사람이 인정한다. 좀비 이야기를 들으면 대개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듣고, 알아듣는다는 것이 정합성의 표시라는 것이다.
다투어지는 것은 (P2)다. 생각할 수 있음에서 가능함으로 가는 걸음. 11장이 그 걸음을 막는 사례를 이미 다루었다. 물이 H₂O 가 아닌 상황을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은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가 실제로 생각한 것은 물처럼 보이는 다른 것이 있는 상황이었고, 겉모습과 실체를 갈라 놓자 상상 가능성이 설명되어 없어졌다.
차머스의 대응은 의식의 경우에는 그 갈라 놓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의 경우 우리는 물을 겉모습으로 붙잡고 있었으므로 재서술의 여지가 있었다. 의식의 경우에는 겪어짐 자체가 우리가 붙잡는 것이므로 "겪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겪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재서술이 없다. 그러므로 물의 사례가 이 사례에 그대로 옮겨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논지를 정밀하게 세우려고 그는 두 종류의 가능성을 가르는 장치를 쓰는데, 그것이 2차원 의미론이다. 이 문서는 그 장치로 들어가지 않는다.
물리주의 쪽 반박도 강하다. 크게 둘이다. 첫째, 우리가 좀비를 정합적으로 그렸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착각일 수 있다. 물리적 세부를 실제로는 하나도 채우지 않은 채 "나와 물리적으로 똑같은데"라는 문구만 붙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상상 가능성은 우리 개념의 성질이고 가능성은 세계의 성질인데, 이 논증은 앞엣것에서 뒤엣것으로 건너간다. 크립키 이후 우리는 그 다리가 언제나 놓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서 부수현상론이 되돌아온다. 좀비 논증이 성공하면 의식은 물리적 사실에 수반하지 않는데, 인과적 폐쇄를 지키려면 의식이 물리적 결과를 낳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나의 좀비 쌍둥이도 지금 나와 똑같이 감각질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내가 감각질에 대해 말하는 이유가 감각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14장에서 이원론의 값으로 적은 자기 지시적 곤란이 여기서 가장 날카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지향성
이제 남은 한 갈래다. 감각질이 감각적 상태 쪽의 어려움이라면, 지향성(intentionality)은 지향적 상태 쪽의 어려움이다.
브렌타노(Franz Brentano, 1838–1917)가 이 말을 오늘의 뜻으로 되살렸다. 지향성이란 무언가에 관함이다. 내 믿음은 창밖의 날씨에 관한 것이고, 내 욕구는 물 한 잔에 관한 것이다. 브렌타노는 이것이 마음의 표징이라고 보았다 — 마음의 것만이 무언가에 관하고, 물리적인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 이것이 물리주의에 문제가 되는가. 두 성질 때문이다.
- 없는 것에 관할 수 있다. 나는 유니콘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물리적 관계는 양쪽 항이 다 있어야 성립한다. 무게가 두 배인 관계는 없는 것과 맺어지지 않는다. 관함은 그 규칙을 어긴다.
- 관점 아래에서 관한다. 나는 샛별이 밝다고 믿으면서 개밥바라기가 밝다고는 믿지 않을 수 있다. 둘은 같은 금성인데도 그렇다. 14장이 데카르트의 의심 논증을 다루며 지향적 문맥이라 부른 것이 이 성질이다. 물리적 관계에는 이런 일이 없다. 어떤 것이 금성보다 무거우면 그것은 샛별보다 무겁고 개밥바라기보다 무겁다.
원초적 지향성과 파생적 지향성
설(John Searle)이 세운 구별이다. 책에 적힌 "고양이"라는 글자는 고양이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그 종이가 스스로 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읽기 때문에 관한다. 온도계의 눈금도 그렇고, 지도의 선도 그렇다. 이것을 파생적 지향성이라 부른다. 반면 내 믿음은 남이 그렇게 읽어 주어서 무언가에 관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원초적 지향성이다.
이 구별이 왜 중요한가. 파생적 지향성만 갖는 것에 마음을 돌리면 순환이 된다. 종이가 무언가에 관하는 것은 우리가 관하기 때문이므로, 종이의 관함으로 우리의 관함을 설명할 수 없다. 이 구별이 뒤 절의 중국어 방 논증에서 곧바로 쓰인다.
자연에서 관함을 끌어낼 수 있는가
물리주의자는 원초적 지향성을 자연적인 것으로 설명해야 한다. 두 방향이 있다.
정보와 인과. 연기는 불에 관한 것이라 할 만하다. 불이 없으면 연기가 나지 않으므로 연기는 불에 대한 정보를 나른다. 드레츠키가 이 착상을 다듬었다. 마음의 상태가 무언가에 관한다는 것은, 그 상태가 그것에 대한 정보를 나르도록 알맞게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기능과 목적. 개구리의 어떤 신경 상태는 지나가는 작은 검은 점에 반응한다. 그 상태가 파리에 관한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장치가 파리를 잡는 일을 하도록 자연선택이 다듬어 놓았기 때문이다. 루스 밀리컨(Ruth Millikan)이 이 방향을 목적론적 의미론으로 세웠다.
두 방향 모두 같은 시험대에 오른다. 오표상 문제다. 지향적 상태는 틀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보 쪽 이야기는 틀림을 담기 어렵다. 개구리가 던져진 작은 돌에 혀를 뻗었다면 그 상태는 "파리"에 관한 것이면서 틀린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파리 또는 작은 검은 점"에 관한 것이라 틀리지 않은 것인가. 뒤엣것으로 읽으면 오표상이 원리적으로 일어나지 않게 되고, 그러면 관함의 핵심 성질 하나가 사라진다. 목적론 쪽은 "이 장치가 원래 하도록 되어 있던 일"을 끌어와 틀림을 담으려 하는데, 그 "원래"를 자연적 사실로 정확히 적는 것이 다시 부담이 된다.
이 문제는 열려 있다. 지향성을 자연화하는 어떤 안도 아직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
마지막 절이다. 앞의 두 절이 세운 것 — 감각질과 지향성 — 이 여기서 한꺼번에 시험된다.
튜링 검사
튜링(Alan Turing, 1912–1954)이 1950년 논문에서 한 일을 정확히 적어야 한다. 그는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에 답하지 않았다. 그 물음을 다른 물음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가 보기에 원래 물음은 "생각한다"와 "기계"의 뜻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결판낼 수 없는 물음이었다.
바꾼 물음은 흉내 놀이다. 심문자가 보이지 않는 두 상대와 글로만 대화한다. 한쪽은 사람이고 한쪽은 기계다. 심문자가 어느 쪽이 기계인지 믿을 만하게 가려내지 못한다면, 그때 기계가 검사를 통과한 것이다. 튜링은 세기말쯤이면 짧은 대화에서 평균적인 심문자가 잘 가려내지 못하게 되리라고 내다보았다.
이 제안에 대한 반론 셋을 적어 둔다.
- 행동만 잰다. 14장에서 논리적 행동주의가 걸린 자리가 그대로 온다. 완벽한 배우가 아픈 사람의 행동을 다 할 수 있다면, 완벽한 흉내꾼도 생각하는 자의 대화를 다 할 수 있다.
- 사람 흉내를 요구한다. 검사를 통과하려면 사람처럼 굴어야 한다. 그래서 정말로 생각하지만 사람과 다르게 생각하는 기계는 떨어지고, 생각하지 않지만 사람 말투를 잘 흉내 내는 기계는 붙는다. 재는 것과 재려던 것이 어긋나 있다.
-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이 아니다. 튜링 자신이 검사 통과를 생각의 정의로 삼지 않았다. 통과하면 생각한다고 볼 좋은 이유가 생긴다는 것이 그가 말한 전부다.
그래도 이 제안에는 남는 힘이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있다고 여기는 근거도 결국 행동과 말이다. 기계에게만 더 엄한 것을 요구한다면 그 이유를 대야 한다.
중국어 방
설이 1980년 논문에서 내놓은 사고실험이다. 무엇을 겨냥하고 무엇을 겨냥하지 않는지를 먼저 못 박아야 한다.
방 안에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있다. 문틈으로 중국어 문장이 적힌 종이가 들어온다. 방 안에는 아주 두꺼운 규칙집이 있는데, 들어온 기호의 모양만 보고 어떤 기호를 내보낼지 적혀 있다. 그는 규칙집대로 기호를 골라 내보낸다. 바깥에서 보면 방은 중국어로 유창하게 대화한다. 그런데 방 안의 사람은 중국어를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한다.
논증을 정리하면 이렇다.
- (P1) 프로그램은 형식적이다. 기호를 모양으로만 다룬다.
- (P2) 마음에는 내용이 있다. 마음 상태는 무언가에 관한다.
- (P3) 모양을 다루는 것만으로는 내용이 생기지 않는다. 방 안의 사람이 그것을 보인다.
- (C) 그러므로 프로그램을 돌리는 것만으로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겨냥하는 것. "알맞게 프로그램된 컴퓨터는 문자 그대로 마음을 갖는다"는 명제다. 설은 이것을 강한 인공지능이라 불렀다. 다르게 적으면 계산이 이해에 충분한가라는 물음이고, 그의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겨냥하지 않는 것.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설은 이 물음에 그렇다고 답한다. 뇌는 하나의 기계이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부정하는 것은 어떤 프로그램을 돌리기만 하면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으로는 마음을 낳는 것은 형식적 구조가 아니라 뇌가 가진 어떤 인과적 힘이고, 그런 힘을 가진 기계를 만들 수 있다면 그 기계는 생각한다. 이 두 물음을 섞으면 논쟁 전체가 헛돈다.
주요 응답과 그 되받음을 적는다.
| 응답 | 무엇을 말하는가 | 설의 재반박 | 그에 대한 되받음 |
|---|---|---|---|
| 체계 응답 | 이해하는 것은 방 안의 사람이 아니라 사람·규칙집·종이를 합친 체계 전체다 | 규칙집을 다 외우고 밖으로 나오면 체계가 곧 그 사람인데, 그래도 이해하지 못한다 | 외운 규칙을 돌리는 그 사람 안에 별개의 체계가 구현된 것이고, 그 체계에 대해 사람의 보고는 권위를 갖지 않는다 |
| 로봇 응답 | 방을 로봇에 넣어 감각기와 팔다리를 붙이면 기호가 세상에 이어진다 | 로봇의 카메라에서 오는 것도 결국 기호일 뿐이라 방 안 사람에게는 달라지는 것이 없다 | 이어짐이 문제라는 것을 설도 인정한 셈이므로, 남은 물음은 어떤 이어짐이 원초적 지향성을 낳는가이다. 그것이 앞 절의 자연화 계획이다 |
| 뇌 시뮬레이터 응답 | 중국어 화자의 뇌에서 일어나는 일을 뉴런 하나하나까지 흉내 내는 프로그램이면 어떤가 | 수도관과 밸브로 같은 구조를 만들어도 물이 흐를 뿐 이해는 없다 | 뉴런과 수도관을 나누는 기준을 대야 하는데, 그 기준을 물리적 재료로 적으면 14장의 유형 동일론으로 되돌아간다 |
논증에 대한 방법론적 비판도 있다. 이 사고실험은 방을 느리고 작게 그려 놓는다. 종이 한 장, 사람 하나, 규칙집 한 권. 그 그림에서 "이해가 없다"는 판단이 쉽게 나오는 것이 규모의 낯섦 때문이라면, 14장의 중국 인민 논증에 대한 응답이 여기에도 그대로 온다.
이 논쟁은 열려 있다. 설의 논증이 결정적이라고 보는 쪽과 체계 응답이 이미 답했다고 보는 쪽이 모두 살아 있다.
오늘의 인공지능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이 절을 읽는 사람 대부분이 오늘의 언어 모델을 떠올린다. 그것을 피하지 않되, 지금 무엇이 결판났다고 적지 않는다. 이 장의 도구가 실제로 하는 일은 물음을 가르는 것이다.
| 물음 | 누구의 물음인가 | 지금 상태 |
|---|---|---|
| 대화로 가려낼 수 있는가 | 튜링 | 검사의 설계와 심문자에 크게 좌우된다. 그리고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하든 아래 두 물음이 그대로 남는다 |
| 계산이 이해에 충분한가 | 설 | 중국어 방 논증이 참이면 성능이 아무리 올라가도 답은 그대로다. 논증이 참인지가 다투어진다 |
| 겪어지는 것이 있는가 | 차머스 · 네이글 | 어려운 문제가 그대로 온다. 사람에 대해서도 풀리지 않은 물음이므로 여기서 먼저 풀릴 이유가 없다 |
세 물음이 서로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요점이다. 어떤 체계가 첫째 물음을 통과해도 둘째와 셋째는 그대로 남는다. 반대로 둘째 물음에 "충분하지 않다"가 참이어도 그것은 계산으로 만든 체계에 대한 판정일 뿐, 다른 방식으로 만든 기계에 대한 판정은 아니다. 설 자신이 그렇게 못 박았다.
한 가지 비대칭을 적어 둔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있다고 여길 때 비슷한 몸과 비슷한 뇌라는 근거를 함께 쓴다. 8장의 유비 논증이 그 형태다. 기계에 대해서는 그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행동이 같아도 결론이 같아지지 않는다. 다만 이것을 결정적인 근거로 쓰려면 왜 재료가 중요한가를 말해야 하고, 그 말을 하는 순간 14장의 다수 실현 논증이 되돌아온다.
마지막으로 이 문서가 하지 않는 것을 적는다. 특정 제품이나 모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사실처럼 적지 않는다. 그런 서술은 금방 낡고, 낡은 뒤에는 문서 전체의 신뢰를 깎는다. 그리고 이 절의 물음들은 성능이 얼마나 올라가는가로 결판나는 물음이 아니다. 기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다시 다른 층의 물음이고, 그것은 19장에서 다룬다.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용어부터 모은다.
| 용어 | 뜻 |
|---|---|
| 감각질(qualia) | 어떤 상태를 겪을 때 겪는 쪽에서 느껴지는 그 어떠함 |
| 그 존재로 있다는 것이 어떠한지 | 의식을 붙잡는 네이글의 정식. 박쥐 사례가 이것을 보인다 |
| 쉬운 문제 / 어려운 문제(the hard problem) | 메커니즘을 찾으면 닫히는 물음 / 메커니즘을 다 찾고도 다시 던져지는 물음. 차머스 |
| 설명적 간극 | 동일성을 받아들여도 왜 그런지가 이해되지 않는 자리. 레바인 |
| 환상주의 | 설명해야 할 것은 겪어짐이 아니라 겪어짐이라는 별도의 것이 있어 보이는 그 보임이라는 견해 |
| 뒤집힌 스펙트럼 | 기능은 같은데 감각질이 뒤집힌 두 사람. 기능주의를 겨눈다 |
| 비대칭 논거 | 색 공간이 대칭이 아니어서 실제로 뒤집으면 기능적 차이가 난다는 대응 |
| 지식 논증 / 메리의 방 | 물리적 사실을 다 알고도 새로 아는 것이 있다면 물리적이지 않은 사실이 있다는 논증. 잭슨 |
| 능력 가설 | 메리가 얻은 것은 사실이 아니라 상상하고 알아보는 능력이라는 응답 |
| 현상 개념 전략 | 메리가 얻은 것은 옛 사실을 붙잡는 새 개념이라는 응답 |
| 철학적 좀비 | 나와 물리적으로 똑같으면서 아무것도 겪지 않는 존재 |
| 좀비 논증 | 좀비가 생각될 수 있고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의식은 물리적인 것에 수반하지 않는다는 양상 논증. 차머스 |
| 생각할 수 있음에서 가능함으로 | 좀비 논증의 둘째 걸음이자 이 논쟁의 중심. 11장이 이 걸음이 막히는 사례를 다루었다 |
| 지향성(intentionality) | 무언가에 관함. 브렌타노는 이것을 마음의 표징으로 보았다 |
| 원초적 지향성 / 파생적 지향성 | 스스로 관함 / 해석하는 이가 있어서 관함. 설의 구별 |
| 오표상 문제 | 내용을 정보로만 정하면 틀림이 사라진다는 문제. 지향성 자연화의 시험대 |
| 목적론적 의미론 | 내용을 그 장치가 하도록 다듬어진 일로 정하는 자연화 시도. 밀리컨 |
| 튜링 검사 / 흉내 놀이 | 글로만 대화해 기계와 사람을 가려내는 검사. 생각의 정의가 아니라 물음의 대체다 |
| 중국어 방 | 기호를 모양으로만 다뤄도 대화가 되지만 이해는 없다는 설의 사고실험 |
| 강한 인공지능 | 알맞게 프로그램된 컴퓨터는 문자 그대로 마음을 갖는다는 명제. 중국어 방이 겨냥하는 것 |
| 체계 응답 / 로봇 응답 / 뇌 시뮬레이터 응답 | 중국어 방에 대한 세 응답. 각각에 설의 재반박과 그에 대한 되받음이 있다 |
사람은 이렇게 나왔다.
| 이름 | 이 장에서 맡은 자리 |
|---|---|
| 네이글 | 박쥐 — 그 존재로 있다는 것이 어떠한지 |
| 차머스 |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 좀비 논증 |
| 레바인 | 설명적 간극 |
| 데닛 | 어려운 문제가 잘못 세워진 물음이라는 견해 |
| 잭슨 | 지식 논증. 뒤에 스스로 이 논증을 거부했다 |
| 브렌타노 | 지향성을 마음의 표징으로 세웠다 |
| 드레츠키 / 밀리컨 | 정보와 인과 / 목적과 기능 — 지향성 자연화의 두 방향 |
| 튜링 | 흉내 놀이 — 물음의 대체 |
| 설 | 중국어 방, 원초적 지향성과 파생적 지향성의 구별 |
등급을 다시 적는다. 어려운 문제는 미결이고, 문제 자체가 있는지부터 갈린다. 좀비 논증의 성패도, 지식 논증에 대한 두 응답의 성패도 미결이다. 지향성의 자연화는 널리 받아들여진 안이 없다. 중국어 방 논쟁도 열려 있다. 이 장에서 다투지 않는 것은 하나뿐이다 — 중국어 방 논증이 겨냥하는 것은 계산의 충분성이지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더 읽을 곳으로는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의 Consciousness 항목과 같은 백과의 The Chinese Room Argument 항목이 있다.
다음 장은 이 장이 계속 기대 온 것을 정면으로 다룬다. 지향성을 말하면서 "관한다"와 "가리킨다"를 나란히 썼는데, 말이 무언가를 가리킨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성립하는가. 16장의 물음이다.
말은 어떻게 무언가를 가리키는가
'금성'이라고 적힌 두 글자는 잉크 자국이다. 그런데 이 자국이 먼 곳의 행성 하나를 붙든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답이 뻔해 보인다 — 이름은 그것이 가리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답에 곧바로 걸리는 문장들이 있고, 그 문장들에서 이 장의 논의가 시작한다.
이 장에서 답할 질문은 다섯이다.
- 두 이름이 같은 것을 가리키는데 두 문장이 왜 서로 다른 정보를 주는가
- '현재 프랑스의 왕' 처럼 가리킬 것이 없는 표현이 든 문장은 참인가 거짓인가
- 이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무엇이 정하는가 — 우리가 그 이름에 대해 아는 것인가, 다른 것인가
- 낱말의 뜻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가
- 말한 것과 말하지 않고 전한 것은 어떻게 갈리는가
앞 장에서 가져오는 것이 많다. 이 장은 앞 장들이 뿌려 둔 것을 거두는 자리다. 11장의 가능세계를 도구로 그대로 쓰고, 11장이 "고정지시어는 16장 몫"이라며 이름만 대고 넘긴 장치를 여기서 세워 11장의 필연×선험 교차표로 돌아간다. 10장의 존재론적 개입과 콰인의 기준, 플라톤의 수염이 둘째 절의 배경이다. 3장의 사고실험 다섯 단계로 넷째 절의 쌍둥이 지구를 소개한다. 4장의 자비의 원리와 숨은 전제가 마지막 절에서 다시 나온다.
논리학 문서와의 경계를 먼저 그어 둔다. 논리학 문서 12장이 러셀의 확정 기술 분석을 술어논리로 적는다. 존재·유일성·주장 세 조각의 논리곱으로 적고, 부정이 어디에 붙느냐에 따라 두 갈래가 갈리는 것까지 기호로 보인다. 이 문서는 그 형식화를 하지 않는다. 여기서 할 일은 왜 그 분석인가, 그것이 무엇을 해결하는가, 무엇이 반론인가다. 표기도 맞춰 둔다 — 그 문서는 확정기술이라 붙여 쓰고 이 문서는 확정 기술이라 띄어 쓴다. 같은 말이다.
이름의 뜻은 그것이 가리키는 것인가
가장 단순한 그림부터 세우자. 이름의 의미는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다. 이 그림을 소박한 그림이라 부르겠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이름을 가르칠 때 우리가 실제로 하는 일이 그것이다.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이름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이름이 문장에 보태는 것은 대상 하나뿐인 것처럼 보인다.
프레게(Gottlob Frege, 1848–1925)가 1892년 논문 "뜻과 지시체에 대하여"에서 이 그림에 세 가지를 들이댄다.
첫째 — 같은 것을 가리키는 두 이름
새벽에 동쪽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것을 샛별이라 하고 저녁에 서쪽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것을 개밥바라기라 한다. 둘 다 금성이다. 이제 두 문장을 견준다. "샛별은 샛별이다" 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다. "샛별은 개밥바라기다" 는 알려 준다. 이것을 알아내는 데는 관측이 필요했다.
소박한 그림에서 두 문장은 같은 것을 말한다. 두 이름이 문장에 보태는 것이 금성뿐이라면 둘 다 "금성은 금성이다" 를 말하는 셈이다. 그런데 하나는 정보를 주고 하나는 주지 않는다.
11장이 이 문장을 이미 썼다. 겹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문장을 다른 물음으로 보는 것이다. 11장이 물은 것은 그 동일성이 필연인가였고 답은 "필연이면서 후험적" 이었다. 여기서 묻는 것은 왜 정보를 주는가다. 11장의 물음은 세상 쪽을 향하고 이 장의 물음은 말 쪽을 향한다. 둘은 셋째 절에서 만난다.
둘째 — 바꿔 넣으면 값이 바뀐다
10장의 라이프니츠 법칙을 가져온다. 같은 것에 대해 참인 것은 이름을 바꿔 넣어도 참이다. 그런데 이런 문장이 있다. "영수는 샛별이 새벽에 뜬다고 믿는다." 참이라 하자. 이름을 바꾸면 "영수는 개밥바라기가 새벽에 뜬다고 믿는다" 가 되는데, 영수가 둘이 같은 것인 줄 모른다면 이 문장은 거짓이다.
소박한 그림에서는 이 일이 일어날 수 없다. 두 이름이 보태는 것이 금성뿐이라면 바꿔 넣어도 문장이 하는 말이 그대로여야 한다.
셋째 — 가리킬 것이 없는 이름
"페가수스는 날개가 있다" 를 우리는 이해한다. "페가수스는 없다" 는 참인 것 같다. 그런데 페가수스는 없다. 소박한 그림에서 이름의 의미는 지시체이니, 지시체가 없으면 의미도 없어야 하고 저 문장들은 뜻 없는 소리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
10장이 이 매듭을 플라톤의 수염이라 부르고 존재론의 물음으로 다루었다.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참인 문장이 있다는 것. 여기서는 같은 매듭이 의미론의 물음으로 나온다.
프레게의 답 — 뜻과 지시체
프레게는 표현에 층을 하나 더 준다. 표현이 가리키는 것을 지시체(reference)라 하고, 그것이 제시되는 방식을 뜻(sense)이라 한다. '샛별' 과 '개밥바라기' 는 지시체가 같고 뜻이 다르다. 하나는 금성을 새벽에 밝은 것으로 붙들고 다른 하나는 저녁에 밝은 것으로 붙든다. 뜻이 지시체를 정한다. 방향은 한쪽이다 — 지시체가 같다고 뜻이 같아지지는 않는다.
세 수수께끼가 각각 이렇게 풀린다.
- 동일성 진술. 두 이름의 뜻이 다르므로 두 문장이 하는 말이 다르다. 두 뜻이 한 지시체에서 만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발견이다
- 대체 실패. 믿음을 보고하는 문맥에서는 낱말이 평소의 지시체가 아니라 평소의 뜻을 가리킨다. 그것을 간접 지시체라 한다. 두 이름은 뜻이 다르므로 간접 지시체가 다르고, 그러면 애초에 같은 것을 바꿔 넣은 것이 아니다. 라이프니츠 법칙은 깨지지 않는다
- 지시체 없는 이름. 뜻은 있고 지시체가 없는 표현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문장은 이해된다. 다만 프레게 자신은 그런 문장이 참값을 갖지 못한다고 보았고, 이 수를 스트로슨이 뒤에서 확정 기술에 그대로 쓴다
갈라 둘 것이 하나 있다. 뜻은 머릿속의 그림이 아니다. 프레게는 셋을 나눈다. 지시체는 하나이고, 뜻은 여럿이 같이 붙들 수 있는 객관적인 것이며, 관념은 각자의 머릿속에 있어 사람마다 다르다. 망원경으로 달을 보는 장면에 비유하면 달이 지시체, 렌즈에 맺힌 상이 뜻, 각자의 망막에 맺힌 상이 관념이다. 이 구분을 흘려보내면 넷째 절이 엉킨다. 퍼트넘이 "의미는 머릿속에 있지 않다" 고 할 때 겨누는 것은 뜻을 각자의 머릿속 상태로 읽었을 때의 그림이고, 프레게 자신은 뜻을 객관적인 것으로 두었으므로 그 논증이 프레게까지 무너뜨리는지는 따로 따져야 한다.
확정 기술 — 러셀의 분석
'현재 프랑스의 왕', '웨이벌리의 저자', '이 방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 처럼 대상 하나를 특정해 지목하는 표현을 확정 기술(definite description)이라 한다. 겉모습이 이름과 같은 자리에 온다.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 1905년 논문 "지칭에 관하여"(On Denoting)에서 든 문장이 이것이다.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다." 프랑스에 왕이 없다. 이 문장은 참인가 거짓인가. 네 갈래가 다 곤란하다.
| 답 | 무엇이 곤란한가 |
|---|---|
| 참이다 | 대머리인 왕이 있어야 한다. 없다 |
| 거짓이다 | 그러면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가 아니다’ 가 참이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것도 왕이 있어야 참인 것처럼 들린다 |
| 참도 거짓도 아니다 | 문장에 두 값만 준다는 전제를 버려야 한다 |
| 없는 왕이 어떤 방식으로 있다 | 10장이 막아 둔 길이다. 있음에 등급을 두면 무엇이 있느냐는 물음 자체가 흐려진다 |
세 조각으로 푼다
러셀의 답은 이렇다. 확정 기술은 이름이 아니다. "그 F 는 G 다" 는 겉모습과 달리 주어와 술어로 된 문장이 아니라 세 주장의 묶음이다. 존재(F 인 것이 있다), 유일성(F 인 것은 그것 하나뿐이다), 주장(그것이 G 다). 왕이 없으면 첫 조각이 거짓이고 묶음이므로 전체가 거짓이다. 참도 거짓도 아닌 것이 아니다. 논리학 문서 12장이 이 세 조각을 기호로 적는다.
하나. 존재론적 부담을 없앤다. 10장에서 개입이 부담스러울 때 길이 둘이라고 했다. 받아들이거나 다시 쓰거나. 러셀의 분석이 다시 쓰기의 본보기다. 확정 기술이 이름이 아니라면 가리킬 대상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고, 콰인의 기준을 걸어 보면 이 문장은 왕에 개입하지 않는다. 콰인이 자기 기준을 세울 때 이 분석을 모범으로 든 것도 그래서다.
둘. 부정이 두 갈래로 갈리는 까닭을 설명한다.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가 아니다" 는 존재 주장까지 부정하는 넓은 읽기와, 존재 주장은 남기고 대머리라는 것만 부정하는 좁은 읽기로 갈린다. 왕이 없을 때 앞엣것은 참이고 뒤엣것은 거짓이다. 한 문장이 두 값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 문장이 애매했던 것이다. 이것을 범위 애매성이라 한다.
셋. 이름으로 확장한다. 러셀은 일상의 고유명도 위장된 확정 기술이라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 는 '알렉산더를 가르친 그 사람' 의 줄임이라는 식이다. 그러면 프레게의 세 수수께끼가 한꺼번에 처리된다. 다만 두 주장을 갈라 두어야 한다. 확정 기술이 한정사 뭉치라는 분석과, 이름이 확정 기술이라는 주장은 다른 주장이다. 셋째 절이 무너뜨리는 것은 뒤엣것뿐이다.
스트로슨의 반론
8장에서 흄의 문제에 응답하고 12장에서 반응적 태도를 말한 그 스트로슨이 1950년 논문 "지시에 관하여"(On Referring)에서 러셀을 정면으로 친다. 제목이 러셀의 것과 닮았지만 다른 논문이다.
첫째, 문장과 그 문장의 쓰임을 갈라야 한다.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다" 라는 문장은 그 자체로 참도 거짓도 아니다. 17세기에 쓰였다면 값을 가졌을 것이고 지금 쓰면 그렇지 않다. 문장은 그대로인데 값이 달라진다면 값이 붙는 자리는 문장이 아니라 그것을 쓴 자리다. 둘째, 지시는 표현이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표현을 써서 하는 일이다. '그 왕' 이라는 표현 자체는 아무도 가리키지 않는다.
셋째, 그래서 '그 F' 를 쓰는 사람은 F 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제한다. 전제가 어긋나면 참·거짓의 물음이 아예 생기지 않고 문장은 진리값 공백에 빠진다. 근거는 우리가 실제로 하는 반응이다. 저 문장을 들으면 우리는 "거짓이다" 라고 하지 않고 "무슨 소리냐, 프랑스에 왕이 없다" 고 한다. 판정하기를 거부한다.
낱말 하나를 조심해야 한다. 4장의 '전제' 는 논증의 전제였다. 결론을 떠받치는 문장을 그렇게 불렀다. 스트로슨이 쓰는 전제(presupposition)는 어떤 말을 하려면 미리 성립해 있어야 하는 것을 가리킨다. 같은 한국어를 쓰지만 겹치지 않는다.
러셀 쪽의 응답은 셋이다. 진리값 공백을 인정하면 값이 둘뿐이라는 전제를 버려야 하고 대가가 크다는 것이 하나다(논리학 문서 19장이 그런 논리를 다룬다). 둘째로, 스트로슨의 관찰은 옳지만 그것이 문장의 뜻에 관한 사실인지 대화에 관한 사실인지는 다른 물음이다. 여섯째 절의 함축이 그 갈래를 준다. 셋째로, 러셀의 목표는 한국어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논증을 다룰 언어를 만드는 것이었다.
스트로슨이 옳은 대목도 분명하다. 러셀이 문장이 뜻하는 것과 그 문장으로 사람이 하는 일을 한 층에 놓았다는 지적은 그대로 남았고, 다섯째·여섯째 절 전체가 그 지적에서 자라 나왔다. 이 문서는 어느 쪽도 고르지 않는다. 확정 기술의 분석에서는 러셀이 여전히 출발점이지만 스트로슨 쪽 진단도 살아 있고, 전제라는 개념은 언어학에 자리를 잡았다. 논리학 문서가 러셀 쪽을 택한 것은 그 문서가 값이 둘인 논리를 세우고 있기 때문이며 그 문서도 "정의로 고른 것이지 증명한 것이 아니다" 라고 밝혀 두었다.
도넬란 — 두 가지 쓰임
도넬란(Keith Donnellan)이 1966년에 가른 두 쓰임이 이 다툼에 한 겹을 더한다. 속성적 쓰임은 이렇다. 살해된 사람을 발견하고 시신의 상태를 보며 "이 사람을 죽인 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라고 한다. 범인이 누구인지 모른다. 이 말은 그 조건을 만족하는 자가 누구든 그에 대해 하는 말이다. 지시적 쓰임은 다르다. 재판정에서 피고를 보며 같은 말을 한다. 이때 말하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이고, 설령 그가 진범이 아니어도 우리가 무엇에 대해 말했는지는 분명하다.
러셀의 분석은 속성적 쓰임에 잘 맞고 지시적 쓰임에는 어색하다. 지시적 쓰임에서는 기술이 틀려도 말이 통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크립키의 응답은 여섯째 절에서 도구를 갖춘 뒤에 본다.
이름은 고정지시어다
무너뜨릴 상대를 정확히 세운다. 고유명에 대한 기술 이론은 이렇게 말한다. 이름 N 에는 화자가 결부시키는 기술이 있고, N 이 가리키는 것은 그 기술을 유일하게 만족하는 것이다. 기술 하나로는 무리라는 것이 곧 드러났으므로 기술 다발 판본이 나왔다 — 결부된 기술들 가운데 충분히 많은 것을 만족하는 것이 지시체다. 약한 이론이 아니다. 프레게의 세 수수께끼를 전부 처리하고, 우리가 이름을 어떻게 배우고 쓰는지에 대한 그럴듯한 그림까지 준다. 크립키가 1970년 강연에서 이 이론을 세 방향에서 친다.
양상 논증. '아리스토텔레스' 가 '알렉산더를 가르친 사람' 과 뜻이 같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를 가르쳤다" 는 필연적 참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가 정치에 뛰어들어 알렉산더를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 세계에서도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다. 두 표현은 뜻이 같지 않다.
인식 논증. 두 표현의 뜻이 같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를 가르쳤다" 를 총각이 미혼임을 아는 것처럼 경험 없이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역사가들이 알아낸 것이다. 11장이 필연과 선험을 두 축으로 갈라 놓았기 때문에 이것이 앞의 논증과 다른 논증이 된다. 두 축이 하나였다면 하나의 논증을 두 번 적은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의미론 논증. 대부분의 사람이 '괴델' 에 결부시키는 기술은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 하나다. 그런데 실은 슈미트라는 사람이 그것을 증명했고 괴델(Kurt Gödel, 1906–1978)이 그 원고를 가로챘다고 하자. 기술 이론대로라면 우리가 '괴델' 이라고 할 때 가리키는 것은 슈미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괴델을 가리키고 다만 그에 대해 틀린 것을 믿고 있을 뿐이다.
셋의 무게가 다르다. 앞의 둘은 이름과 기술의 뜻이 같지 않음을 보이고, 셋째는 기술이 지시체를 정하지도 못함을 보인다. 그래서 셋째가 가장 세다. 앞의 둘을 막는 수선책이 있어도 셋째는 남는다.
고정지시어
양상 논증이 기대고 있는 개념에 이름을 붙인다. 어떤 표현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은 것을 가리키면 그것을 고정지시어(rigid designator)라 한다. 정확히는, 그 대상이 있는 세계에서는 언제나 그 대상을 가리키고 다른 것을 가리키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은 표현이 비고정지시어다. 11장의 가능세계를 여기서 도구로 쓴다. 다시 세우지 않는다.
확정 기술이라고 다 비고정지시어인 것은 아니다. '가장 작은 소수' 는 확정 기술이지만 어느 세계에서나 2를 가리킨다. 갈리는 것은 표현의 문법이 아니라 그 표현이 세계마다 다른 것을 골라내느냐다.
이제 후험적 필연이 왜 생기는지가 나온다. '샛별' 과 '개밥바라기' 가 둘 다 고정지시어이고 실제로 같은 것을 가리킨다면 둘은 모든 세계에서 같은 것을 가리키고, 그러니 그 동일성은 필연이다. 그런데 알아내는 데는 관측이 필요했으니 후험적이다. 11장 교차표의 왼쪽 아래 칸이 이렇게 떠받쳐진다. 11장은 이 장치를 이름만 대고 넘겼고 여기가 그 자리다.
첫째 절의 첫 수수께끼로도 돌아간다. 두 이름이 고정지시어이고 동일성이 필연이라면 "샛별은 개밥바라기다" 는 왜 정보를 주는가. 크립키의 답은 그 필연을 아는 일이 후험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보값의 차이를 뜻의 차이가 아니라 인식의 차이로 옮긴 것이고, 이 답으로 충분한지가 아래의 다툼거리다.
그러면 지시체는 무엇이 정하는가
기술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크립키가 내놓은 것은 인과-역사적 그림이다. 어떤 대상에 이름을 처음 붙이는 자리가 있고(최초의 명명), 그 뒤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서로에게서 물려받으며 쓴다(전달의 사슬). 물려받는 사람은 앞 사람이 가리키던 것을 그대로 가리키려는 의도로 그 이름을 쓴다. 그래서 '괴델' 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그 이름으로 괴델을 가리킬 수 있다. 그를 붙들고 있는 것은 그가 아는 기술이 아니라 그가 이어받은 사슬이다.
크립키 자신은 이것을 이론이 아니라 그림이라고 불렀다. 필요충분조건을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반례가 있다. '마다가스카르' 는 원래 아프리카 본토의 어느 지역을 가리키던 말인데 전달 과정의 착오로 섬을 가리키게 되었고, 지금 이 이름이 가리키는 것은 섬이지 사슬 끝의 그 지역이 아니다. 사슬을 어떻게 하나로 셀 것인지, '이어받으려는 의도' 를 적을 때 기술이 몰래 들어오는 것은 아닌지도 열린 물음이다.
지금 어디까지 왔는가
다수설은 직접지시다. 이름이 문장에 보태는 것은 대상 자체이고, 이름은 고정지시어이며, 지시체는 기술이 아니라 화자가 놓인 인과-역사적 관계가 정한다. 표준 교과서가 크립키 이후를 이렇게 정리한다. 소수설도 살아 있다. 가장 강한 형태로 적으면 이렇다.
- 직접지시는 프레게의 세 수수께끼를 다시 열어 둔다. 특히 대체 실패가 그렇다. 이름이 보태는 것이 대상뿐이라면 믿음 문맥에서 값이 갈리는 일을 설명할 길이 다시 없어진다. 크립키 자신이 이 빚을 알고 있었고 뒤에 대체를 쓰지 않고도 같은 수수께끼가 생긴다는 것을 보이는 논문을 따로 썼다. 그러나 문제가 더 넓다는 것을 보인 것이 문제를 푼 것은 아니다
- 고정화된 기술. '실제로 알렉산더를 가르친 사람' 은 확정 기술이면서 고정지시어다. 어느 세계를 보든 실제 세계에서 그 일을 한 사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수를 쓰면 양상 논증이 정면으로 막힌다
- 사슬을 기술 안에 넣기. "내가 이 이름을 물려받은 바로 그 사람" 도 하나의 기술이다. 이렇게 적으면 의미론 논증까지 막힌다. 크립키는 이 수를 예상하고 순환이라고 답했지만 순환인지에 대해서는 다툼이 있다
- 이차원 의미론. 표현에 두 종류의 뜻을 주어 하나로는 후험적 필연을, 다른 하나로는 우리가 그 표현을 이해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크립키의 사례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설명하려는 시도다
직접지시가 다수설이고 기술 이론의 개량형이 소수설이다. 이 문서는 어느 쪽이 옳은지 고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러셀의 확정 기술 분석은 이 다툼에서 살아남는다. 크립키가 무너뜨린 것은 이름이 기술이라는 주장이지 기술이 한정사 뭉치라는 분석이 아니다. 크립키 자신이 뒤엣것을 받아들이고 여섯째 절에서 옹호하기까지 한다.
쌍둥이 지구 — 의미는 머릿속에 있지 않은가
퍼트넘이 1975년 논문 "'의미' 의 의미"에서 사고실험을 하나 내놓는다. 3장이 세운 다섯 단계로 소개한다.
| 단계 | 쌍둥이 지구 |
|---|---|
| ① 상황 | 지구와 모든 면에서 같은 행성이 있다. 다른 것은 하나뿐이다 — 그곳에서 강과 바다를 채우고 사람들이 마시는 액체는 H₂O 가 아니라 XYZ 라는 다른 화합물이다. 겉보기 · 맛 · 쓰임이 지구의 물과 똑같다. 때는 1750년, 아직 아무도 물의 조성을 모른다. 지구의 오스카와 쌍둥이 지구의 쌍둥이 오스카는 분자 하나까지 서로 같은 상태에 있다 |
| ② 물음 | 두 사람이 ‘물’ 이라는 낱말로 같은 것을 뜻하는가 |
| ③ 판단 | 아니라는 쪽으로 기운다. 오스카의 ‘물’ 은 H₂O 를 가리키고 쌍둥이 오스카의 ‘물’ 은 XYZ 를 가리킨다. 1750년의 두 사람이 그 차이를 몰랐다는 것은 상관없다 |
| ④ 전제로 삼는다 | 두 사람의 머릿속은 같은데 낱말의 외연은 다르다 |
| ⑤ 지지하는 주장 | 두 가지를 함께 잡을 수 없다. 하나는 ‘낱말의 뜻을 안다는 것은 어떤 심리 상태에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뜻이 외연을 정한다’ 이다. 퍼트넘은 앞엣것을 버린다 |
무엇을 뜻하는가. 낱말의 외연은 화자의 머릿속만으로 정해지지 않고 화자가 놓인 환경이 함께 정한다. 이것을 의미 외재주의라 한다. 자연종을 가리키는 이름에는 "이것과 같은 종류의 것" 이라는 지시가 들어 있어서, 무엇이 그 종류인지는 세상이 정한다. 그래서 자연종 이름도 고정지시어가 되고 여기서 크립키와 만난다. "물은 H₂O 다" 가 후험적 필연인 이유가 이것이다.
6장의 외재주의와 구별해야 한다. 6장의 외재주의는 정당화에 대한 주장이었다. 무엇이 믿음을 정당화하는지가 믿는 사람의 시야 밖에 있을 수 있다는 것. 여기는 의미에 대한 주장이다. 두 주장은 논리적으로 독립이지만 중요한 것이 머릿속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모양이 닮았다.
무엇을 뜻하지 않는가 셋이다.
- 머릿속이 아무 몫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오스카가 물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다면 그는 '물' 이라는 낱말을 쓸 수 없다. 머릿속이 외연을 혼자서는 정하지 못한다는 것이 주장이다
- 화자가 자기 말뜻을 모른다는 말이 아니다. 1750년의 오스카는 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다만 그것이 H₂O 라는 것을 몰랐다.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는 것과 미세 구조를 아는 것은 다르다
- 모든 낱말에 걸치는 주장이 아니다. '총각' 이나 '그리고' 에는 잘 걸리지 않는다. 논증이 힘을 쓰는 곳은 자연종 이름 쪽이다
퍼트넘이 함께 내놓은 것이 언어적 노동의 분업이다. 나는 느릅나무와 너도밤나무를 구별하지 못하고 내 머릿속에서 두 낱말에 붙어 있는 것은 사실상 같다. 그런데도 내 '느릅나무' 는 느릅나무를 가리킨다. 구별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 있고 나는 그들에게 기대어 그 말을 쓰기 때문이다. 낱말의 외연을 붙들고 있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다.
7장이 넘긴 것을 여기서 갚는다. 외재주의가 옳다면 통 속의 뇌가 쓰는 '나무' 는 나무를 가리키지 못한다. 그 뇌는 나무와 아무 인과적 접촉이 없고 접촉이 있는 것은 전기 신호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뇌가 "나는 통 속의 뇌다" 라고 말할 때 '통' 도 '뇌' 도 우리가 뜻하는 것을 뜻하지 않으므로 그 말은 참일 수 없다. 이 논증이 회의주의를 실제로 물리치는지는 다투어진다. 7장이 그렇게 적어 두었고 여기서도 그대로 둔다.
콰인과 데이비드슨 — 번역과 해석
콰인이 1960년 저서에서 원초적 번역이라는 상황을 만든다. 아무 실마리 없는 언어를 처음부터 번역해야 한다. 토끼가 지나갈 때 원주민이 "가바가이" 라고 한다. 이것을 '토끼' 로 옮길 수 있다. 그런데 '아직 떼어내지 않은 토끼의 부분' 으로 옮겨도, '토끼임이 나타나는 국면' 으로 옮겨도 관찰되는 언어 행동은 하나도 어긋나지 않는다. 어느 문장에 동의하고 어느 문장에 반대하는지가 전부 같아지도록 번역 매뉴얼 여럿을 짤 수 있다. 이것이 번역 미결정성이다.
9장의 미결정성과 같은 구조다. 증거를 다 맞히는 후보가 여럿이고 증거가 그중 하나를 골라 주지 않는다. 다른 점은 콰인이 한 걸음 더 간다는 것이다. 이론의 경우에는 "우리가 아직 모른다" 고 말할 여지가 있지만 번역의 경우에 콰인은 고를 사실 자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사실이 언어 행동 너머에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마지막 걸음이 콰인의 주장 가운데 가장 널리 반박된 부분이다.
4장의 자비의 원리도 여기서 다시 나온다. 데이비드슨은 남의 말을 해석하는 일에 그 원리가 요령이 아니라 조건으로 들어간다고 보았다. 상대가 무엇을 믿는지와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우리는 동시에 알아내야 하는데, 어느 한쪽을 붙들어 두지 않으면 둘 다 정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해석은 상대가 대체로 참인 것을 믿는다고 놓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 문서는 여기서 멈춘다.
말로 하는 일 — 화행
여기까지 물어 온 것은 문장이 무엇을 말하는가였다. 오스틴(J. L. Austin, 1911–1960)은 다른 것을 묻는다. 말하면서 무엇을 하는가. 1955년 강연을 묶어 1962년에 나온 "말로 일을 하는 법"이 출발점이다.
"내일 갚겠다고 약속한다." "이 배를 무궁화호라 명명한다." 이 문장들은 무엇을 서술하지 않는다. 이 말을 하는 것이 곧 약속하는 것이고 이름 붙이는 것이다. 이런 문장을 수행문(performative)이라 한다. 수행문에는 참·거짓이 걸리지 않고 적정 조건(felicity conditions)이 걸린다. 그런 절차가 있어야 하고, 절차를 밟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알맞은 자리에서, 절차를 제대로 밟아야 한다. 지나가던 사람이 남의 배에 이름을 붙이면 이름이 붙지 않는다.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어그러진 것이다.
그런데 이 구분이 오래가지 못한다. 진술하는 것도 하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비가 온다" 고 말하는 것은 진술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여기에도 적정 조건이 있다 — 근거 없이 단언하면 어그러진다. 그래서 오스틴은 수행문과 진술문을 가르는 대신 모든 발화를 세 층으로 갈랐다.
| 층 | 무엇인가 | 예 — ‘저기 개가 있다’ |
|---|---|---|
| 발화행위 | 어떤 뜻과 지시를 지닌 소리를 내는 것 | ‘개’ 가 개를 가리키고 ‘저기’ 가 저쪽을 가리키는 한국어 문장을 발음했다 |
| 발화수반행위 | 그 말을 함으로써 하는 것 | 경고했다. 또는 알렸다. 또는 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권했다 |
| 발화효과행위 | 그 말을 함으로써 일으킨 것 | 상대가 겁을 먹었다. 또는 걸음을 멈췄다 |
가운데 층이 하는 일을 발화수반력이라 한다. 같은 발화행위가 자리에 따라 다른 힘을 가질 수 있다. "여기 춥다" 는 온도에 대한 진술일 수도 있고 창문을 닫아 달라는 요청일 수도 있다. 뒤엣것처럼 한 종류의 꼴로 다른 종류의 일을 하는 것을 간접 화행이라 한다. "소금 좀 건네주실 수 있나요" 는 물음의 꼴이지만 능력을 묻는 물음이 아니다. 설이 이 갈래를 정리하고 적정 조건을 규칙의 꼴로 적었다.
셋째 층은 다른 둘과 성격이 다르다. 겁을 먹느냐는 듣는 사람 쪽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말하는 사람이 정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너를 설득한다" 는 수행문이 되지 않는다.
말하지 않고 전한 것 — 함축
우리는 말하지 않은 것을 자주 전한다. 추천서에 "그는 글씨가 반듯하고 수업에 늘 나왔습니다" 라고만 적혀 있으면 읽는 사람은 추천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 읽는다. 그런 말은 적혀 있지 않은데도 전해진다.
그라이스(H. P. Grice, 1913–1988)가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정리했다. 출발점은 협력 원리다. 대화에 끼어 있는 사람은 그 대화가 지금 향하는 목적에 맞게 자기 몫을 한다고 서로 가정한다. 이 가정 아래 네 가지 격률이 따라 나온다.
| 격률 | 내용 | 대놓고 어기면 |
|---|---|---|
| 양 | 필요한 만큼 정보를 주되 그 이상은 주지 마라 | 추천서에서 할 말을 줄이면 나머지가 전해진다 |
| 질 | 거짓이라 여기는 것을 말하지 마라. 증거 없는 것을 말하지 마라 | 뻔한 거짓을 말하면 반어로 읽힌다 |
| 관계 | 지금 문제되는 것과 관련 있는 것을 말하라 | 엉뚱한 대답은 그 화제를 피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
| 방식 | 모호하지 않게, 애매하지 않게, 간결하게, 순서대로 말하라 | 길게 돌려 말하면 평범하지 않은 일이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
격률을 어기는 방식이 둘이다. 슬쩍 어기는 것은 그냥 거짓말이거나 불성실한 대화다. 대놓고 어기는 것은 다르다. 상대가 협력 원리는 지키고 있다고 우리가 계속 가정한다면, 겉으로 격률을 어긴 그 말이 무엇을 뜻해야 앞뒤가 맞는지를 우리는 계산해 낸다. 그렇게 계산되어 나오는 것이 함축(implicature)이다. 차가 멈춘 사람에게 "모퉁이에 주유소가 있다" 고 답한다면, 관계의 격률을 지키고 있다고 보는 한 그 주유소가 열려 있고 기름을 판다는 것이 함축된다.
함축과 함의를 가른다
낱말을 못 박아 둔다. 논리학 문서는 함의를 다른 뜻으로 쓴다. 전제가 참이면 결론이 반드시 참인 관계, 그리고 조건문의 뜻을 정할 때 쓰는 실질함의가 그것이다. 그러니 이 문서에서 그라이스의 implicature 는 함축이고 함의라 부르지 않는다. 둘을 섞으면 다툼이 엉킨다. 가르는 방법은 취소 가능성이다. 뒤에 한마디를 붙여 취소해 보면 된다.
| 함의 | 함축 | |
|---|---|---|
| 무엇이 정하는가 | 문장의 뜻만으로 정해진다 | 문장의 뜻에 맥락과 협력 가정이 더해져 정해진다 |
| 취소하면 | 모순이 된다 | 모순이 되지 않는다. 어색할 수는 있다 |
| 예 | ‘학생 셋이 왔다’ 는 학생이 왔음을 함의한다. ‘셋이 왔다, 사실은 아무도 안 왔다’ 는 모순이다 | ‘어떤 학생이 왔다’ 는 전부는 아님을 함축한다. ‘어떤 학생이 왔다, 사실은 전부 왔다’ 는 모순이 아니다 |
| 말을 바꾸면 | 같은 것을 함의하는 다른 문장을 만들 수 있다 | 대개 따라온다. 방식의 격률에서 생긴 함축은 예외다 |
예외 하나를 적어 둔다. "그는 가난하지만 정직하다" 에서 '그러나' 계열의 낱말이 실어 나르는 것 — 가난함과 정직함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 은 취소되지 않는다. 이런 것을 관습적 함축이라 하고 낱말의 뜻에 붙박여 있다. 취소 가능성 검사는 대화상 함축에 대한 것이다.
4장으로, 그리고 둘째 절로 돌아간다
4장에서 논증을 재구성할 때 "글에 없는 전제" 를 찾았다. 그 일이 실은 함축을 읽는 일이었다. 숨은 전제 후보에 걸었던 두 관문 가운데 둘째 — 글쓴이가 이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 가 정확히 함축을 묻는 물음이고, 자비의 원리도 협력 원리를 읽는 사람 쪽에서 적은 것에 가깝다. 4장의 허수아비 오류도 여기서 다시 읽힌다. 상대가 함축한 것을 함의한 것처럼 붙들고 공격하는 것이 그 오류의 흔한 모양이다. 함축은 취소할 수 있으므로 상대에게는 물러설 자리가 있고, 그 자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허수아비다.
둘째 절에서 미뤄 둔 것도 여기서 처리한다. 첫째, 스트로슨이 전제라 부른 것이 사실은 함축일 수 있다.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가 아니다. 프랑스에 왕이 없으니까." 어색하지만 모순은 아니다. 취소된다. 그렇다면 존재 주장은 문장의 뜻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대화에서 딸려 나오는 것이고, 러셀의 분석은 그대로 두고 우리의 반응만 화용론으로 설명하면 된다. 반대편의 대답도 있다. 언어학이 다루는 전제는 부정·물음·조건문 아래에서 살아남는 성질이 있고 그 행동은 함축과 다르다. 이 다툼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둘째, 도넬란의 두 쓰임에 대한 크립키의 응답이다. 화자 지시와 의미론적 지시를 가르면 된다는 것이다. 문장이 뜻에 따라 골라내는 것이 의미론적 지시이고, 화자가 그 문장을 써서 실제로 붙들려 한 것이 화자 지시다. 마티니 잔을 든 사람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면 의미론적 지시는 빗나가고 화자 지시는 지도교수에게 간다. 우리가 정보를 주고받는 데 성공한 것은 화자 지시 덕분이고 그것은 함축이 굴러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일이다. 그러므로 도넬란의 구분은 러셀의 의미론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이 응답이 성공했는지도 다투어진다 — 지시적 쓰임이 워낙 규칙적이어서 화용론으로 넘기기에는 너무 체계적이라는 반론이 있다.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 말 | 뜻 |
|---|---|
| 뜻 / 지시체 | 표현이 대상을 붙드는 방식(제시되는 방식) / 그 대상. 뜻이 지시체를 정하고 그 역은 아니다 |
| 간접 지시체 | 믿음 등을 보고하는 문맥에서 낱말이 가리키는 것. 평소의 뜻이 그 자리에 온다 |
| 관념 | 각자의 머릿속에 있는 것. 뜻과 다른 층이며 사람마다 다르다 |
| 확정 기술 | ‘그 F’ 처럼 대상 하나를 지목하는 표현. 논리학 문서는 확정기술이라 붙여 쓴다 |
| 러셀의 분석 | ‘그 F 는 G 다’ 를 존재 · 유일성 · 주장 세 조각의 묶음으로 읽는다. 형식은 논리학 문서 12장 |
| 범위 애매성 | 부정이 존재 주장까지 삼키느냐에 따라 한 문장이 두 가지로 읽히는 것 |
| 전제 (presupposition) | 어떤 말을 하려면 미리 성립해 있어야 하는 것. 어긋나면 진리값 공백에 빠진다는 것이 스트로슨의 견해. 4장의 논증의 전제와 다른 말이다 |
| 지시적 쓰임 / 속성적 쓰임 |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려고 기술을 쓰는 것 / 조건을 만족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 |
| 고유명에 대한 기술 이론 | 이름의 지시체를 화자가 결부시킨 기술이 정한다는 견해. 기술 다발 판본이 있다 |
| 고정지시어 / 비고정지시어 |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은 것을 가리키는 표현 / 세계마다 다른 것을 가리키는 표현 |
| 인과-역사적 그림 | 최초의 명명과 전달의 사슬이 지시체를 정한다는 크립키의 설명. 이론이 아니라 그림이라 불렀다 |
| 직접지시 | 이름이 문장에 보태는 것은 대상 자체라는 견해. 크립키 이후의 다수설 |
| 기술 이론의 개량형 | 고정화된 기술(‘실제로 …한 사람’), 사슬을 기술 안에 넣기, 이차원 의미론 |
| 의미 외재주의 | 낱말의 외연이 화자의 심리 상태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견해. 자연종 이름이 그 본보기다. 6장의 외재주의와 다른 주장이다 |
| 쌍둥이 지구 | 물이 XYZ 인 행성을 놓고 같은 머릿속과 다른 외연을 대비시키는 사고실험 |
| 언어적 노동의 분업 | 낱말의 외연을 붙드는 일을 공동체가 나눠 맡는다는 것. 느릅나무와 너도밤나무 |
| 번역 미결정성 | 언어 행동을 다 맞히는 번역 매뉴얼이 여럿이라는 것. 원초적 번역과 가바가이. 9장의 미결정성과 같은 구조 |
| 화행 | 말로 하는 행위. 발화행위 · 발화수반행위 · 발화효과행위 세 층으로 갈린다 |
| 수행문 | 말하는 것이 곧 그 일을 하는 것이 되는 문장. 참 · 거짓 대신 적정 조건 — 절차 · 자격 · 자리 · 이행 — 이 걸린다 |
| 발화수반력 | 발화수반행위가 무엇인지를 정하는 것. 한 꼴로 다른 일을 하면 간접 화행이다 |
| 협력 원리 | 대화에 낀 사람은 그 대화의 목적에 맞게 자기 몫을 한다는 가정. 양 · 질 · 관계 · 방식 네 격률이 여기서 나온다 |
| 함축 | 말하지 않았으나 협력 원리를 가정하면 계산되어 나오는 내용. 함의라 부르지 않는다 |
| 취소 가능성 | 함축을 가리는 검사. 같은 화자가 이어서 취소해도 모순이 되지 않으면 함축이다. 관습적 함축은 예외다 |
| 화자 지시 / 의미론적 지시 | 화자가 붙들려 한 것 / 문장이 뜻에 따라 골라내는 것 |
| 사람 | 이 장에서 한 일 |
|---|---|
| 프레게 | 뜻과 지시체를 갈랐다. 세 수수께끼로 소박한 그림을 무너뜨렸다 |
| 러셀 | 확정 기술을 세 조각으로 분석했다. 이름도 위장된 기술이라고 보았다 |
| 스트로슨 | 지시를 사람이 하는 일로 보고 전제와 진리값 공백을 내세워 러셀에 반대했다. 8 · 12장에 나온 그 사람이다 |
| 도넬란 | 확정 기술의 지시적 쓰임과 속성적 쓰임을 갈랐다 |
| 크립키 | 기술 이론에 세 논증을 걸고 고정지시어와 인과-역사적 그림을 내놓았다. 11장이 넘긴 장치가 이것이다 |
| 퍼트넘 | 쌍둥이 지구로 의미 외재주의를 세웠다. 언어적 노동의 분업. 7장이 넘긴 통 속의 뇌 논증 |
| 콰인 · 데이비드슨 | 번역 미결정성 / 자비의 원리를 해석의 조건으로 삼았다. 뒤엣것은 한 문단만 다뤘다 |
| 오스틴 | 수행문과 적정 조건, 화행의 세 층을 세웠다 |
| 그라이스 | 협력 원리와 네 격률로 함축이 어떻게 생기는지를 설명했다 |
| 사안 | 이 문서가 어떻게 다루는가 |
|---|---|
| 프레게의 세 수수께끼가 소박한 그림을 무너뜨린다 | 정설. 무엇으로 대신할지는 아래 두 줄이 다룬다 |
| 고유명에 대한 기술 이론 vs 직접지시 | 다수설은 직접지시. 개량형 기술 이론이 소수설로 살아 있다 |
| 확정 기술에 대한 러셀의 분석 vs 스트로슨의 전제 | 미결. 러셀이 출발점이지만 전제라는 개념도 자리를 잡았다 |
| 후험적 필연을 고정지시어로 설명한다 | 널리 받아들여진다. 11장이 넘긴 빚을 이 장이 갚았다 |
| 의미 외재주의 | 자연종 이름에 대해서는 널리 받아들여진다. 어디까지 걸치는지는 다투어진다 |
| 통 속의 뇌에 대한 퍼트넘의 논증이 성공했는가 | 미결. 7장이 그렇게 적어 두었다 |
| 도넬란의 구분이 의미론의 것인가 화용론의 것인가 | 미결. 크립키의 화자 지시 응답과 그에 대한 반론이 맞서 있다 |
이 장의 출처
아래는 이 장을 쓰면서 확인한 자료다. 이 문서는 어느 것도 옮기지 않았다.
- SEP — Gottlob Frege (뜻과 지시체)
- SEP — Descriptions (러셀과 스트로슨)
- SEP — Rigid Designators
- SEP — Speech Acts
- SEP — Implicature
도덕 판단은 무엇을 하는 말인가
12장과 13장이 같은 말로 끝났다. 사실에서 당위로 건너가려면 따로 논증이 필요하고, 그 건너감을 정면으로 다루는 것은 17장이라고. 이 장이 그 빚을 갚는다.
이 장에서 답할 질문은 둘이다.
- "그것은 나쁘다"고 말할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세상에 대해 무언가를 보고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일을 하는 것인가.
- 그 말이 참일 수 있는가. 참일 수 있다면 무엇이 그것을 참으로 만드는가.
이것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아니다. 그 물음은 18장이 받는다. 이 장은 그보다 한 층 위에서, 그 물음에 사실 같은 답이 있기는 한가를 묻는다. 순서가 이렇게 잡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답을 찾고 있는지 모르면 답을 찾았는지도 알 수 없다.
앞 장에서 가져오는 것이 셋 있다. 11장의 수반을 그대로 쓴다. 11장의 후험적 필연도 한 번 쓴다. 3장의 개념 분석과 분석안의 반례, 그리고 4장의 논증 재구성 표기 (P1)·(C) 도 계속 쓴다.
미리 밝혀 둘 것이 있다. 이 장에는 결론이 없다. 도덕 실재론과 반실재론의 다툼은 미결이고, 그 차이는 근소하다. 어느 쪽을 다수설이라 부를 수도 없다. 이 장이 할 수 있는 일은 각 입장이 무엇을 설명하려고 그렇게 말하는지, 그 대가로 무엇을 내놓는지를 적는 것이다.
메타윤리는 무엇을 묻는가
윤리학의 물음을 세 층으로 갈라 보면 이 장의 자리가 보인다.
응용윤리(applied ethics)는 구체적 사례를 판정한다. 규범윤리(normative ethics)는 그 판정의 근거가 되는 원리를 세운다. 메타윤리(metaethics)는 그 원리들이 하는 말이 어떤 종류의 말인지를 묻는다.
메타윤리의 물음은 네 갈래로 나오는데, 서로 얽혀 있다.
| 갈래 | 무엇을 묻는가 |
|---|---|
| 의미론 | 도덕 문장은 무슨 일을 하는가. 사실을 적는가, 태도를 드러내는가, 명령하는가 |
| 존재론 | 그 문장을 참으로 만들 도덕 사실이 세상에 있는가 |
| 인식론 |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
| 심리학 | 도덕 판단을 하는 것과 그렇게 행동할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떤 관계인가 |
마지막 갈래에 이름을 하나 붙여 둔다. 동기 내재주의(motivational internalism)는 어떤 행위가 옳다고 진심으로 판단하면 그렇게 할 동기가 반드시 따라 나온다는 견해다. 동기 외재주의는 판단과 동기가 따로 놀 수 있다고 본다. 6장에서 만난 인식적 내재주의·외재주의와는 다른 구별이다. 이름만 같다.
이 구별이 왜 중요한지는 곧 드러난다. 도덕 판단이 태도의 표현이라면 동기가 따라 나오는 것이 당연하고, 세상에 대한 보고라면 당연하지 않다. 사실 보고는 사람을 움직이지 않는다. 저 방에 의자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지지는 않는다.
입장을 두 물음으로 가른다
메타윤리의 입장 이름은 많지만, 두 물음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첫째 물음 — 도덕 문장은 믿음을 적는 문장인가. 그렇다고 보는 쪽이 인지주의이고, 아니라고 보는 쪽이 비인지주의(non-cognitivism)다. 인지주의를 받아들이면 도덕 문장에 참·거짓을 물을 수 있다.
둘째 물음 — 그 문장을 참으로 만들 도덕 사실이 있는가. 있다고 보고 그 사실이 우리 태도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보는 쪽이 도덕 실재론(moral realism)이다. 사실이 아예 없다고 보면서 인지주의를 유지하면 오류 이론(error theory)이 된다.
여기서 흔한 오해 하나를 미리 끊는다. 비인지주의는 "도덕은 취향의 문제다"가 아니다. 취향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도덕 판단은 화자의 취향을 보고하는 참인 문장이다"라는 인지주의 주장이고, 이것은 왼쪽 위 칸에 속한다. 비인지주의는 아예 보고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에서 당위로 — 두 개의 다른 논점
여기서 자주 뭉개지는 두 논증을 갈라 적는다. 흄의 논점과 무어의 논점은 같은 편에 서는 일이 많지만 다른 논증이고, 겨누는 곳이 다르고, 결론도 다르다.
흄의 논점 — 추론의 형식
흄이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A Treatise of Human Nature, 1739–1740) 3권에서 짧게 적은 관찰이다. 도덕에 대해 쓰는 사람들이 한동안 "…이다"로 된 문장을 늘어놓다가, 어느 순간부터 아무 예고 없이 "…해야 한다"로 된 문장을 잇는다는 것이다. 흄은 그 건너감이 설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을 사실-당위 간극(is–ought gap)이라 부른다. 요점은 논증의 짜임에 있다. 전제가 모두 서술 문장인데 결론에 규범 문장이 나오면, 그 논증은 그대로는 타당하지 않다. 결론에 있는 것이 전제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4장의 말로 하면 숨은 전제가 하나 필요하고, 그 숨은 전제는 규범 문장일 수밖에 없다.
예를 보자.
- (P1) 이 약을 주면 그는 고통 없이 죽는다.
- (P2) <글에 없음> 고통 없는 죽음이 더 낫다면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
- (C) 그러므로 이 약을 주어야 한다.
(P1) 만으로는 (C) 이 나오지 않는다. (P2) 를 채워 넣어야 나오고, 그것을 채워 넣는 순간 논쟁은 (P2) 로 옮겨 간다. 흄의 논점이 하는 일은 논쟁의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도덕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이 논점에 대한 반론이 둘 있다. 첫째는 논리적인 것이다. 프라이어(Arthur Prior, 1914–1969)가 지적했듯이, 서술 문장 하나에서 선언 도입만으로 규범 문장을 결론에 넣을 수 있다. "영국에서는 차를 많이 마신다"에서 "영국에서 차를 많이 마시거나, 모든 사람이 약속을 지켜야 한다"가 타당하게 따라 나온다. 결론에 규범 문장이 들어 있다. 이 반례가 보여 주는 것은 "규범 문장을 포함한다"를 문법으로 정의하면 안 된다는 것이지, 간극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흄의 논점을 살리려면 "참으로 규범적인 결론"이 무엇인지 더 다듬어야 한다.
둘째는 설의 논증이다. 약속을 했다는 것은 사실인데, 약속을 했다면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 사실에서 따라 나온다는 것이다. 약속이라는 제도가 이미 규범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표준적 응수는, 그 논증이 실제로 보인 것은 "약속이라는 제도 안에서 그렇게 하기로 되어 있다"까지이고, "그 제도를 따라야 한다"는 여전히 채워 넣어야 할 규범 전제라는 것이다.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어의 논점 — 개념 분석의 실패
무어가 『윤리학 원리』(Principia Ethica, 1903)에서 낸 것은 전혀 다른 논증이다. 그는 좋음을 어떤 자연적 성질로 정의하려는 시도가 모두 실패한다고 주장했다.
검사는 이렇다. 어떤 자연적 성질 하나를 골라 "좋음이란 그것이다"라고 해 보자. 그러면 "이것은 그 성질을 갖는다. 그런데 이것은 좋은가?"라는 물음을 던져 본다. 이 물음이 여전히 물을 것이 남아 있는 물음으로 들리면, 두 말의 뜻이 같지 않다는 뜻이다. 뜻이 같다면 "그는 결혼하지 않은 성인 남자다. 그런데 총각인가?"처럼 물을 것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열린 물음 논증(open question argument)이다.
무어는 좋음을 자연적 성질과 같은 것으로 놓는 일에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라는 이름을 붙였다. 결론은 좋음이 자연적 성질이 아니고 더 쪼갤 수 없는 단순한 것이라는 것이다. 3장의 말로 하면 분석안에 반례를 대는 작업인데, 다만 어떤 특정 분석안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자연주의적 분석안에 한꺼번에 대는 반례다.
오늘의 표준 평가는 이 논증이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두 자리에서 새어 나간다.
- 분석의 역설. 옳은 분석이라 해도 그것이 말하는 사람에게 곧바로 보이리라는 보장이 없다. 보이면 그 분석은 시시하고, 보이지 않으면 물음이 열려 보인다. 그러면 열린 물음 검사는 어떤 흥미로운 분석도 통과시키지 못한다. 검사가 너무 셌던 것이다.
- 후험적 필연. 11장에서 본 것처럼, 참인 동일성인데도 선험적으로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물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르는 사람에게 "이것은 물이다. 그런데 그 화학적 구성을 갖는가?"는 열린 물음이다. 그래도 동일성은 참이다. 도덕 속성도 그런 식으로 자연적 속성과 같을 수 있다.
그렇다고 자연주의가 이겼다는 뜻은 아니다. 무어의 논증이 증명에 실패했다는 것과, 그가 가리킨 현상이 사라졌다는 것은 다르다. 물음이 왜 그렇게 끈질기게 열려 보이는지는 자연주의 쪽이 여전히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비자연주의는 지금도 지지자를 가진 살아 있는 입장이다.
마지막으로 두 논점의 관계를 한 줄로 적는다. 사실-당위 간극은 흄의 것이고 자연주의적 오류는 무어의 것이다. 두 이름을 바꿔 쓰면 논쟁이 헛돈다. 흄의 논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연주의적 실재론자일 수 있다. 도덕 속성이 자연적 속성이라 해도, 서술 전제만으로 규범 결론을 연역할 수 없다는 것은 그대로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 실재론 — 도덕 사실이 있다는 쪽
도덕 실재론은 세 가지를 함께 주장한다. 도덕 문장은 참·거짓을 가질 수 있다. 그중 참인 것이 실제로 있다. 그 참은 누가 무엇을 인정하느냐에 의존하지 않는다.
세 번째가 핵심이다. 모두가 노예제를 인정하던 사회에서도 노예제는 그른 것이었다 — 실재론은 이 말을 그대로 참으로 받는다. 이것이 실재론의 가장 큰 매력이고, 도덕 개혁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자리다.
자연주의적 실재론은 도덕 속성이 자연적 속성이라고 본다. 다만 짧은 정의로 갈아 끼울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건강이나 생물학의 종이 그렇듯, 자연적이면서도 간단한 정의를 갖지 않는 속성이 있다. 이 갈래의 강한 근거 하나는 도덕 사실이 실제로 무언가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어떤 제도가 잔인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에 저항했다는 설명은 자연스럽게 들리고, 여기서 잔인함은 설명을 하는 자리에 있다.
하먼이 이 자리를 파고들었다. 8장에서 본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을 도덕에 대어 보면 결과가 다르다는 것이다. 물리학의 대상은 우리가 관찰하는 것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지만, 도덕 사실은 우리가 어떤 도덕 판단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것을 설명하려면 우리가 그렇게 길러졌다는 것만 있으면 된다. 이에 대한 자연주의 쪽 응수는, 도덕 사실을 빼면 설명이 실제로 나빠지는 사례들이 있다는 것이다.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비자연주의적 실재론은 도덕 속성이 있지만 자연적 속성이 아니라고 본다. 무어가 이 길을 냈고, 지금도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근거는 규범성이 자연 사실로 다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자연적 사실을 아무리 많이 늘어놓아도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가 남는다는 느낌이 이 입장의 출발점이다.
그 대가는 인식론에서 나온다. 자연적이지 않은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표준적인 답은 어떤 것들은 선험적으로 그리고 자명하게 알려진다는 것인데, 이 답은 도덕적 불일치를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자명하다면 왜 이렇게 갈리는가.
반실재론 — 세 갈래
반실재론도 한 입장이 아니다. 서로 아주 다른 세 갈래가 있다.
비인지주의 — 도덕 문장은 사실을 적는 말이 아니다
가장 이른 형태가 정서주의(emotivism)다. 에이어(A. J. Ayer, 1910–1989)가 『언어, 진리, 논리』(Language, Truth and Logic, 1936)에서 낸 형태는 강했다. "도둑질은 나쁘다"는 "도둑질"이라는 말에 반감의 어조를 얹은 것과 다르지 않고, 사실을 하나도 보태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티븐슨(C. L. Stevenson, 1908–1979)이 이것을 다듬었다. 도덕 문장은 태도를 표현할 뿐 아니라 듣는 사람의 태도에 영향을 주려 하고, 도덕 논쟁의 상당 부분은 사실 다툼이 아니라 태도 다툼이라는 것이다.
다음 형태가 규정주의(prescriptivism)다. 헤어(R. M. Hare, 1919–2002)가 『도덕의 언어』(The Language of Morals, 1952)에서 낸 것으로, 도덕 문장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보편화 가능한 명령이라고 본다. "이것은 그르다"는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이렇게 하지 말라"에 가깝다. 이 형태는 도덕 논증이 왜 일관성의 제약을 받는지를 정서주의보다 잘 설명한다. 명령에도 앞뒤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살아 있는 형태는 표현주의(expressivism)다. 블랙번(Simon Blackburn)의 준실재론(quasi-realism)과 기바드(Allan Gibbard)의 규범 표현주의가 대표적이다. 이 형태의 목표가 재미있다. 도덕 문장이 태도의 표현이라는 출발점을 지키면서, 도덕 담론이 실재론처럼 보이는 겉모습을 하나씩 되찾아 오는 것이다. 참·거짓이라 부르는 것도, 도덕적 사실이라 말하는 것도, 표현주의 안에서 다시 설명해 준다.
비인지주의가 무엇을 설명하려고 나왔는지는 분명하다.
- 동기. 도덕 판단이 태도라면 동기가 따라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인지주의는 이것을 따로 설명해야 한다.
- 사실-당위 간극. 서술 전제만으로 규범 결론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곧바로 나온다. 사실을 아무리 늘어놓아도 태도가 생기지는 않는다.
- 존재론의 절약. 세상에 이상한 종류의 사실을 하나 더 두지 않아도 된다.
대가는 프레게-기치 문제(Frege–Geach problem)다. 이 문서 전체에서 가장 기술적인 자리 가운데 하나이므로 그림으로 본다.
문제를 한 줄로 적으면 이렇다. 도덕 문장의 뜻이 태도의 표현이라면, 조건문의 앞부분처럼 주장되지 않는 자리에 놓였을 때 그 문장은 무슨 뜻인가. 아무 태도도 표현되지 않으므로 뜻이 달라지고, 뜻이 달라지면 전건 긍정 추론이 애매어의 오류가 된다. 그런데 그 추론은 분명히 타당하다.
응답이 있다. 준실재론은 논리적 일관성을 태도들 사이의 일관성으로 다시 잡는다. 첫째 전제의 태도를 갖고 둘째 전제의 태도를 가지면서 결론의 태도를 갖지 않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반론은 이렇게 온다 — 태도의 앞뒤가 맞지 않는 것과 문장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은 다른 일이고, 뒤엣것을 앞엣것으로 갈아 끼우면서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이다. 이 자리는 아직 결판나지 않았다.
오류 이론 — 사실을 적으려 하지만 전부 거짓이다
매키(J. L. Mackie, 1917–1981)가 『윤리학: 옳고 그름을 발명하기』(Ethics: Inventing Right and Wrong, 1977)에서 세운 입장이다. 구조가 독특하다. 인지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실재론을 거부한다. 도덕 문장은 세상에 대한 주장을 하고 있고, 그 주장이 참이려면 객관적이고 사람을 구속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므로 전부 거짓이라는 것이다.
두 논증이 이 결론을 받친다.
| 논증 | 무엇을 말하는가 |
|---|---|
| 상대성 논증 | 도덕이 사회마다 크게 다르고, 그 차이는 사실에 대한 오해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떤 삶의 방식을 살고 있어서 도덕이 그렇게 된 것이지, 도덕을 알아내어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
| 기묘함 논증 | 형이상학 쪽 — 객관적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우주의 다른 어떤 것과도 종류가 다른 것이 된다. 인식론 쪽 — 그것을 알아채려면 다른 어떤 것에도 쓰지 않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 |
기묘함 논증의 힘은 규정성에 있다. 객관적 가치는 그것을 알아보기만 하면 곧바로 그렇게 할 이유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도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가는 크다. 우리 도덕 담론 전체가 조직적으로 거짓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다음에 무엇을 할지 정해야 한다. 도덕 담론을 버리자는 길, 참이 아님을 알면서 계속 쓰자는 길, 도덕 문장을 참·거짓이 아닌 다른 것으로 다시 읽자는 길이 있다. 매키 자신은 마지막에 가까웠다. 그는 도덕을 발명하는 것으로 보았고, 그래서 책 제목이 그렇다.
오류 이론에 대한 표준적 반론은 두 가지다. 첫째, 도덕 문장이 정말 그렇게 강한 것을 주장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보통 사람이 "고문은 나쁘다"고 말할 때 우주에 객관적 규정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둘째, 같은 논법이 다른 데도 적용된다. 이유와 합리성 일반이 기묘함 논증에 걸리는데, 그것까지 버릴 수는 없다.
상대주의
여기서 갈라 두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섞으면 논쟁이 시작도 못 한다.
| 무엇 | 무엇을 주장하는가 | 어떤 종류의 주장인가 |
|---|---|---|
| 기술적 상대주의 | 사회마다 도덕 규범이 실제로 다르다 | 경험적 사실 주장. 인류학이 다룬다 |
| 메타윤리적 상대주의 | 도덕 문장의 참·거짓이 어떤 틀에 상대적으로만 정해진다 | 철학적 주장 |
앞엣것에서 뒤엣것이 곧바로 나오지 않는다. 그 건너감이 정확히 이 장 앞부분의 사실-당위 간극과 같은 모양이다. 사회마다 다르다는 사실에서 어느 쪽도 옳지 않다는 결론이 나오려면, "오래 다르면 사실이 없는 것이다"라는 전제를 채워 넣어야 한다. 천문학에서도 사회마다 믿음이 달랐다.
메타윤리적 상대주의가 무엇을 설명하려고 나왔는지는 분명하다. 도덕적 불일치가 왜 그렇게 잘 안 풀리는지를 설명하고, 다른 사회를 우리 잣대로 재는 일에 제동을 건다.
대가도 분명하다.
- 관용을 끌어낼 수 없다. "다른 틀을 존중해야 한다"는 그 자체로 틀을 넘어선 요구다. 상대주의자가 이 말을 하면 자기 입장을 어긴다. 상대주의는 관용을 지지하는 근거가 아니라 관용을 근거 없게 만드는 입장에 가깝다.
- 개혁가를 정의상 틀린 사람으로 만든다. 자기 사회의 규범을 비판하는 사람은, 그 사회의 틀을 기준으로 삼는 한 그냥 틀린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옳았다고 평가한다.
- 어느 틀인가를 정할 수 없다. 한 사람이 여러 집단에 속한다. 어느 집단의 틀이 그의 도덕 문장의 참을 정하는지 대야 하는데, 그 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가장 강한 형태의 상대주의는 이 반론들을 알고 있고, 틀을 사회가 아니라 더 추상적인 것 — 어떤 평가 기준들의 묶음 — 으로 잡아 대응한다. 그 길에서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다시 다투어진다.
불일치와 수반 — 양쪽이 함께 서는 자리
이 절은 논쟁의 두 축을 정리한다. 하나는 반실재론 쪽의 가장 강한 무기이고, 다른 하나는 양쪽이 함께 받아들이는 자리다.
도덕적 불일치 논증
논증은 세 전제로 선다. 도덕에는 깊고 오래가는 불일치가 있다. 그 불일치는 무지나 오류나 비합리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객관적 사실이 있는 영역이라면 이런 불일치가 이렇게까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객관적 도덕 사실은 없다.
실재론 쪽은 둘째나 셋째를 끊는다. 둘째를 끊는 길은 불일치의 상당 부분이 도덕 아닌 사실에 대한 불일치에서 온다는 것이다. 무엇이 실제로 일어나는지, 누가 무엇을 겪는지가 갈리면 판정도 갈린다. 이해관계가 판단을 굽히는 것도 설명이 된다. 셋째를 끊는 길은 다른 분야를 끌어오는 것이다. 수학의 기초와 형이상학에도 오래가는 불일치가 있는데 거기서 반실재론을 끌어내는 사람은 드물다.
반실재론 쪽 재반론은 이렇다. 그 설명들을 다 걷어내도 남는 불일치가 있고, 그것이 문제다. 그리고 수렴이 있었다 해도 그것이 도덕적 수렴인지 힘과 제도의 수렴인지 구별해야 한다.
이 자리는 미결이다. 같은 사실이 오류 이론의 상대성 논증에도, 상대주의의 근거에도 쓰인다.
수반 — 심판이 아니라 숙제
11장이 정의한 수반을 여기서 그대로 쓴다. 다시 정의하지 않는다.
도덕에 대어 보면 이런 주장이 된다. 도덕 속성은 자연적 속성에 수반한다. 자연적 사실에서 차이가 없으면 도덕적 사실에서도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주장이 흥미로운 이유는 거의 모두가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자연주의적 실재론자도, 비자연주의적 실재론자도, 표현주의자도, 오류 이론가도 대체로 여기에 선다. 왜 그런가. "이 두 경우는 모든 면에서 똑같은데 하나만 그르다"는 말이 뜻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도덕 판단이라는 것을 하고 있지 않다고 여겨진다.
거의 모두가 받아들이므로 수반은 논쟁의 심판이 되지 못한다. 대신 각 입장이 설명해야 하는 숙제가 된다.
| 입장 | 수반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
|---|---|
| 자연주의적 실재론 | 도덕 속성이 자연적 속성이면 저절로 따라 나온다. 설명할 것이 거의 없다 |
| 비자연주의적 실재론 | 가장 무거운 숙제를 진다. 다른 종류의 속성이 왜 그렇게 딱 붙어 다니는가를 대야 한다 |
| 표현주의 | 우리 태도가 자연적 특징에 반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블랙번은 이것을 표현주의를 지지하는 증거로 썼다 |
하나만 다시 못 박아 둔다. 수반은 환원이 아니다. 11장의 예제가 이미 다룬 것이다. 도덕 속성이 자연적 속성에 수반한다는 것에서 도덕 속성이 자연적 속성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다리를 놓으려면 전제를 하나 더 놓아야 하고, 그 전제가 곧 논쟁거리다.
정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다음 장으로 가는가
이 장이 미결로 끝난다. 그런데 다음 장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정면으로 다룬다. 앞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뒤로 갈 수 있는가.
갈 수 있다. 이유가 셋이다.
첫째, 도덕 실천은 메타윤리적 합의를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판단하고 있고, 이미 다투고 있고, 이미 서로에게 이유를 대고 있다. 메타윤리는 그 실천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굴러가는 실천을 설명하려는 작업이다. 실천이 설명을 기다려야 한다면 순서가 뒤집힌 것이다.
둘째, 메타윤리의 입장과 규범윤리의 입장이 서로를 별로 결정하지 않는다. 공리주의자 가운데 실재론자도 있고 비인지주의자도 있다. 매키는 오류 이론가이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제안을 내놓았다. 칸트를 따르는 사람 가운데도 메타윤리적 입장은 여러 갈래다. 짝이 이렇게 자유롭다는 것 자체가 두 층이 서로 독립적임을 보여 준다.
셋째, 규범 논의의 도구가 어느 메타윤리에서도 작동한다. 일관성을 요구하는 것, 사례를 만들어 원리를 시험하는 것, 3장의 반성적 평형으로 판단과 원리를 서로 고치는 것 — 이 도구들은 도덕 문장이 사실을 적든 태도를 드러내든 그대로 쓸 수 있다. 표현주의가 프레게-기치 문제에 그토록 공을 들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 도구를 잃지 않으려는 것이다.
다만 메타윤리가 규범윤리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오류 이론이 참이라면 "당신은 틀렸다"라는 말의 지위가 달라진다. 상대주의가 참이라면 다른 사회를 비판하는 일의 지위가 달라진다. 영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영향이 규범윤리의 내부 논쟁을 결정할 만큼 강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다음 장은 이렇게 진행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세 이론을 나란히 놓고, 각각이 무엇을 설명하려고 나왔고 무엇을 대가로 치르는지를 본다. 그 작업에는 이 장의 다툼이 어느 쪽으로 결판나든 달라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용어부터 모은다.
| 용어 | 뜻 |
|---|---|
| 메타윤리(metaethics) | 도덕 판단이 어떤 종류의 말인지, 그것을 참으로 만들 것이 있는지를 묻는 층 |
| 규범윤리(normative ethics) / 응용윤리(applied ethics) | 무엇이 옳은 행위를 옳게 만드는가 / 구체적 사례를 어떻게 판정하는가 |
| 인지주의 / 비인지주의(non-cognitivism) | 도덕 문장이 믿음을 적는가 / 태도를 드러내는가 |
| 도덕 실재론(moral realism) | 참인 도덕 문장이 있고 그 참이 우리 태도에 의존하지 않는다 |
| 동기 내재주의(motivational internalism) | 도덕 판단을 하면 그에 맞는 동기가 반드시 따라 나온다. 6장의 인식적 내재주의와 다른 구별이다 |
| 사실-당위 간극(is–ought gap) | 서술 전제만으로 규범 결론이 연역되지 않는다. 흄의 논점이며 추론의 형식에 대한 것이다 |
| 열린 물음 논증(open question argument) | 어떤 자연적 성질을 넣어도 좋은가라는 물음이 열려 있다는 무어의 논증. 개념 분석에 대한 것이다 |
|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 | 좋음을 자연적 성질과 같은 것으로 놓는 일에 무어가 붙인 이름 |
| 자연주의적 실재론 / 비자연주의적 실재론 | 도덕 속성이 자연적 속성인가 아닌가 |
| 정서주의(emotivism) | 도덕 문장은 태도를 표현하고 남의 태도에 영향을 주려 한다 |
| 규정주의(prescriptivism) | 도덕 문장은 보편화 가능한 명령이다 |
| 표현주의(expressivism) / 준실재론(quasi-realism) | 태도의 표현이라는 출발점에서 도덕 담론의 겉모습을 되찾아 온다 |
| 프레게-기치 문제(Frege–Geach problem) | 주장되지 않는 자리에 놓인 도덕 문장의 뜻을 비인지주의가 어떻게 주는가 |
| 오류 이론(error theory) | 도덕 문장은 사실을 적으려 하지만 적을 사실이 없어 전부 거짓이다 |
| 상대성 논증 / 기묘함 논증 | 오류 이론을 받치는 두 논증. 뒤엣것의 핵심은 규정성이다 |
| 기술적 상대주의 / 메타윤리적 상대주의 | 사회마다 규범이 다르다는 사실 주장 / 참이 틀에 상대적이라는 철학적 주장 |
| 도덕적 불일치 논증 | 깊고 오래가는 불일치에서 객관적 도덕 사실의 부재를 끌어내는 논증 |
사람은 이렇게 나왔다.
| 이름 | 이 장에서 맡은 자리 |
|---|---|
| 흄 | 사실-당위 간극. 추론의 형식에 대한 논점이다 |
| 무어 | 열린 물음 논증, 자연주의적 오류, 비자연주의적 실재론 |
| 프라이어 | 사실-당위 간극에 대한 논리적 반례 |
| 설 | 약속에서 사실-당위를 건넌다는 논증 |
| 하먼 | 도덕 사실이 설명에 필요한가라는 도전 |
| 에이어, 스티븐슨 | 정서주의 |
| 헤어 | 규정주의 |
| 블랙번, 기바드 | 표현주의와 준실재론 |
| 매키 | 오류 이론, 상대성 논증과 기묘함 논증 |
이 장의 등급을 다시 적는다. 도덕 실재론과 반실재론의 다툼은 미결이고 차이는 근소하다. 어느 쪽도 다수설이라 부를 수 없다. 실재론 안의 두 갈래도, 반실재론 안의 세 갈래도 미결이다. 결정된 것에 가까운 것은 둘뿐이다. 무어의 열린 물음 논증이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 그리고 도덕 속성이 자연적 속성에 수반한다는 것. 앞엣것은 논증에 대한 평가이지 결론에 대한 평가가 아니고, 뒤엣것은 양쪽이 함께 서는 자리라 논쟁을 가르지 못한다.
더 읽을 곳으로는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의 Metaethics 항목과 같은 백과의 Moral Anti-Realism 항목이 있다.
다음 장은 한 층 아래로 내려간다. 이 장의 다툼을 정하지 않은 채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세 이론을 나란히 놓는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세 이론
17장은 결론 없이 끝났다. 도덕 판단이 사실을 적는 말인지 태도를 드러내는 말인지, 그것을 참으로 만들 것이 세상에 있는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장의 마지막 절이 문 하나를 열어 두었다. 도덕 실천은 메타윤리적 합의를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판단하고 이미 다투고 이미 서로에게 이유를 대고 있으며, 그 이유를 검사하는 도구 — 일관성을 요구하는 것, 사례를 만들어 원리를 시험하는 것, 반성적 평형 — 는 도덕 문장이 사실을 적든 태도를 드러내든 그대로 쓸 수 있다. 이 장은 그 문으로 들어간다.
이 장에서 답할 질문은 하나다. 무엇이 옳은 행위를 옳게 만드는가. 어떤 행위가 옳은지를 낱개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정을 떠받치는 원리를 묻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규범윤리의 물음이고, 구체적 사례에 이 원리들을 대어 보는 일은 19장이 한다.
앞 장에서 가져오는 것이 셋이다. 3장의 사고실험 다섯 단계와 반성적 평형을 계속 쓴다. 4장의 논증 재구성 번호 표기 (P1)(P2)(C)와 평가 다섯 관문도 쓴다. 12장의 도덕적 책임 논의는 이 장이 아니라 19장 마지막 절에서 되살아난다.
미리 못 박아 둘 것이 있다. 이 장에도 결론이 없다. 결과주의·의무론·덕 윤리는 셋 다 살아 있고, 어느 하나가 다수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 문서는 셋 가운데 하나를 고르지 않는다. 다만 고르지 않는 것과 판단을 미루는 것은 다르다. 각 이론이 무엇을 설명하려고 나왔고 무엇을 대가로 치르는지는 적을 수 있고, 그것이 이 장이 하는 일 전부다. 그 이상을 확립한 사람은 아직 없다.
세 이론은 어디에서 갈리는가
세 이론을 "같은 물음에 대한 세 가지 답"으로 소개하면 처음부터 잘못 잡힌다. 셋은 같은 물음에 다르게 답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개념을 먼저 놓는가에서 갈린다.
규범윤리에는 서로 얽힌 세 물음이 있다. 어떤 행위가 옳은가. 무엇이 좋은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 결과주의(consequentialism)는 좋음을 먼저 놓는다. 무엇이 좋은지를 먼저 정하고, 옳은 행위를 "좋음을 가장 많이 낳는 행위"로 정의한다.
- 의무론(deontology)은 옳음을 먼저 놓는다. 옳음이 좋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 결과가 더 좋아져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이 이 입장의 뼈대다.
- 덕 윤리(virtue ethics)는 성품을 먼저 놓는다. 어떤 성품이 좋은 성품인지를 먼저 말하고, 옳은 행위를 "유덕한 사람이 그 상황에서 할 행위"로 잡는다.
이름을 하나 붙여 둔다. 의무론은 좋음이 옳음을 정하지 않는다고 보므로 비결과주의라고도 불린다. 다만 "결과를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결과가 유일한 기준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오해가 의무론에 대한 반론의 상당 부분을 헛돌게 만든다.
갈림이 어디서 드러나는지는 행위를 칸으로 나눠 보면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세 낱말을 정의한다. 제약(constraint)은 결과가 아무리 좋아져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다. 선택지(option)는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데도 하지 않아도 되는 여지다. 초과 의무(supererogation)는 하면 칭찬받지만 하지 않아도 비난받지 않는 행위다. 그림의 첫째 줄이 보여 주듯, 엄격한 행위 공리주의에는 이 셋이 모두 없다. 최선이 아닌 것은 모두 금지이므로 선택지도 초과 의무도 들어설 칸이 없다.
이 칸 없음이 이론의 흠인지 아니면 우리 판단 쪽을 고쳐야 할 자리인지가 19장 기근 구제 절의 다툼이다.
결과주의 — 좋음을 먼저 놓는다
결과주의의 뼈대는 한 줄이다.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가 낳는 결과가 정한다. 이 한 줄만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무엇이 좋은 결과인지, 누구의 좋음을 세는지, 무엇을 평가 대상으로 삼는지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주의는 한 이론이 아니라 부품의 조합이다.
고전 공리주의
가장 이른 형태가 공리주의(utilitarianism)다.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An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 1789)에서 세운 형태는 세 부품이 모두 채워져 있다. 좋음은 쾌락이고 나쁨은 고통이다. 누구의 쾌락이든 같은 무게로 센다. 그리고 개별 행위를 그 총합으로 평가한다. 이것을 최대 행복 원리라 부른다. 행복을 늘리는 만큼 옳고 그 반대를 낳는 만큼 그르다.
이 이론이 무엇을 설명하려고 나왔는지가 중요하다. 공평성이다. 누구의 고통도 원래부터 더 가볍지 않다. 신분이나 출신이나 소속이 계산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것은 당시에 급진적인 주장이었고 지금도 이 이론의 가장 큰 힘이다. 시지윅(Henry Sidgwick, 1838–1900)이 이 요구를 가장 분명하게 적었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어느 개인의 좋음도 다른 개인의 좋음보다 더 중요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이 『공리주의』(Utilitarianism, 1863)에서 부품 ①을 손본다. 쾌락에는 질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두 쾌락을 다 겪어 본 사람이 한쪽을 일관되게 택한다면 그쪽이 더 높은 쾌락이다. 널리 알려진 문장은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취지다. 이 수선은 이론을 우리 판단에 가깝게 만들지만 대가가 있다. 질을 들여오면 쾌락 하나로 모든 것을 재던 단순함이 깨지고, 무엇이 더 높은지를 정하는 다른 기준이 몰래 들어온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
부품을 갈아 끼운다
부품 ①을 가장 세게 흔든 것이 경험 기계 사고실험이다. 노직이 낸 것으로, 원하는 경험은 무엇이든 넣어 주지만 그것이 실제 일이 아닌 기계가 있다고 하자. 들어가면 남은 평생 원하는 것을 다 겪는다. 들어가겠는가. 대개 아니라고 답한다. 3장의 다섯 단계로 읽으면 이렇다. 상황은 기계다. 판단은 "들어가지 않겠다"다. 그 판단이 지지하는 주장은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것에 경험 아닌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품 ①을 갈아 끼운 형태들이 나왔다.
| 좋음의 이론 | 무엇을 좋음으로 놓는가 | 무엇에 걸리는가 |
|---|---|---|
| 쾌락주의 | 겪는 즐거움과 괴로움 | 경험 기계. 경험 밖의 것을 좋음에 넣지 못한다 |
| 선호 만족설 | 그 사람이 실제로 바라는 것이 이루어짐 | 나쁜 정보에서 나온 선호, 적응된 선호, 죽은 뒤에 이루어지는 선호 |
| 객관적 목록설 | 앎·우정·성취처럼 좋다고 볼 만한 것들의 목록 | 목록을 무엇으로 정하는가. 본인이 전혀 원하지 않아도 좋은 것인가 |
부품 ③을 갈아 끼우면 행위 공리주의에서 규칙 공리주의로 간다. 앞엣것은 낱개 행위의 결과를 보고, 뒤엣것은 "모두가 이 규칙을 따르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를 보고 규칙을 고른 뒤 그 규칙에 따른다. 규칙 공리주의가 무엇을 설명하려고 나왔는지는 분명하다. 약속·신뢰·권리처럼 낱개 계산으로는 무너지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다. 한 번의 거짓말이 결과를 조금 낫게 만들 때도 규칙 공리주의는 거짓말을 금지할 수 있다.
대가는 붕괴 반론이다. 규칙에 예외를 허용하면 예외 조항을 계속 붙일 수 있고, 끝까지 붙이면 규칙은 "그때그때 최선을 하라"가 되어 행위 공리주의와 같아진다. 예외를 허용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더 나쁜 결과가 나올 것을 알면서 규칙을 지키는 일이 생기고, 결과주의자가 왜 그래야 하는지 대기 어려워진다. 이 딜레마를 빠져나가려는 시도가 여럿 있으나 합의된 해법은 없다.
결과주의가 받는 큰 반론 둘을 여기서 미리 적어 둔다. 하나는 요구 과잉이다. 좋음을 최대로 만들라는 요구는 내 삶 전체를 남의 필요에 종속시킬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총합이 개인을 삼킨다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아무리 큰 부담을 지워도 총합이 늘어나면 정당해진다. 앞엣것은 19장 기근 구제 절이 정면으로 다루고, 뒤엣것은 분배 정의의 물음으로 이어져 20장이 받는다.
의무론 — 옳음을 먼저 놓는다
의무론은 옳음이 좋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본다. 결과가 더 좋아지는데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 입장이 무엇을 설명하려고 나왔는지는 분명하다. 사람에게 값을 매길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이다.
정언명령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윤리형이상학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에서 세운 형태가 이 전통의 중심이다. 출발점은 명령을 두 종류로 가르는 데 있다.
- 가언명령 — "건강해지고 싶다면 운동하라." 조건이 붙어 있고, 그 목적을 버리면 명령도 사라진다.
-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 — 조건 없이 구속한다. 무엇을 원하든 상관없이 적용된다.
칸트가 보기에 도덕의 명령은 뒤엣것이다. "남을 속이지 말라"는 "평판을 지키고 싶다면"이 붙는 순간 도덕의 명령이기를 그친다.
첫째 정식이 보편 법칙의 정식이다. 절차는 세 걸음이다. 준칙(maxim) — 내가 지금 따르고 있는 행위 규칙 — 을 행위와 상황과 목적이 다 들어가게 적는다. 그 준칙이 모두가 따르는 법칙이라고 상상한다. 무엇이 무너지는지 본다.
무너지는 방식이 두 가지다. 개념에서의 모순은 그 준칙이 보편화되면 준칙 자체를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경우다. 갚을 뜻 없이 약속하는 준칙을 모두가 따르면 약속이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고, 그러면 거짓 약속도 할 수 없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예외를 두지 않는 완전한 의무다. 의욕에서의 모순은 보편화된 세상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내가 그것을 의욕할 수 없는 경우다. 아무도 남을 돕지 않는 세상은 상상할 수 있으나, 도움이 필요할 자리에 있게 될 내가 그 세상을 바랄 수는 없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언제 어떻게 할지가 내게 남는 불완전한 의무다.
둘째 정식이 인간성의 정식이다. 칸트는 정식을 둘보다 많이 내놓고 그것들이 결국 같은 것을 말한다고 보았는데, 그 주장 자체가 다투어진다. 여기서는 논의에 실제로 쓰이는 둘만 본다. 둘째 정식은 이렇다. 너 자신과 다른 사람 안의 인간성을 언제나 목적으로도 대하고 결코 수단으로만 대하지 마라. ‘만’이 이 정식의 전부다. 사람을 수단으로 쓰는 것 자체는 금지되지 않는다. 우리는 늘 서로를 수단으로 쓰며 산다. 금지되는 것은 상대가 그 대함에 동의할 수 있는 자리를 아예 지워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정식이 겨누는 것은 거짓말과 강제와 조작이다. 셋 다 상대의 판단을 우회한다.
이 검사가 어디서 새는지도 적어 둔다. 준칙을 어떻게 적느냐로 결과가 바뀐다. 같은 행위도 좁게 적으면 통과하고 넓게 적으면 걸린다. 칸트 쪽 응답은 준칙에 진짜 목적을 정직하게 적어야 한다는 것인데, 무엇이 진짜 목적인지는 다시 판단해야 한다. 검사가 판단을 대신해 주기를 바랐다면 그 바람은 채워지지 않는다.
제약, 그리고 의무끼리의 충돌
의무론의 핵심 장치가 제약이다. 결과가 좋아져도 넘지 말아야 할 선. 그런데 여기서 유명한 물음이 생긴다. 제약의 역설이다. 살인이 그렇게 나쁜 것이라면, 살인 다섯을 막기 위한 살인 하나는 왜 금지인가. 살인의 나쁨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살인의 수를 줄이는 쪽을 택해야 하지 않는가.
의무론 쪽의 표준적 답은 제약이 목표가 아니라 제약이라는 것이다. "살인을 최소화하라"는 목표이고, "살인하지 말라"는 나에게 주어진 금지다. 도덕은 세상의 상태를 좋게 만들라는 지시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각자에게 무엇을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부분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행위자 상대적 이유라 부른다 — 내가 무엇을 하는가가 내게 특별한 무게를 갖는다는 뜻이다. 결과주의 쪽은 이 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 내가 저지르는 살인이 남이 저지르는 살인보다 더 나쁜지를 결국 대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자리는 미결이다.
의무론이 감당해야 할 다른 문제는 의무끼리의 충돌이다. 거짓말하지 말라와 무고한 사람을 넘기지 말라가 한 자리에서 부딪칠 수 있다. 완전한 의무를 예외 없는 것으로 잡으면 이 자리에서 답이 나오지 않는다.
로스(W. D. Ross, 1877–1971)가 『옳음과 좋음』(The Right and the Good, 1930)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받는다. 그는 의무를 하나의 원리에서 끌어내지 않고 여럿을 나란히 놓았다. 약속을 지킬 의무, 해를 끼치지 않을 의무, 감사할 의무, 남을 이롭게 할 의무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각각을 조건부 의무(prima facie duty)라 불렀다. 이것은 "겉보기 의무"라는 뜻이 아니라, 다른 의무와 부딪치지 않는 한 실제로 해야 할 일이라는 뜻이다. 부딪치면 그 상황에서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를 판단해야 하고, 그 판단을 대신해 줄 상위 규칙은 없다.
로스의 길이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분명하다. 얻는 것은 충돌하는 자리에서 이론이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우리 도덕 경험 — 두 의무 사이에서 찢기고, 어느 쪽을 택하든 남는 것이 있다는 느낌 — 을 그대로 담는다는 것이다. 잃는 것은 체계다. 목록이 왜 그 목록인지, 부딪칠 때 무엇으로 재는지에 대해 그는 판단력에 맡긴다고 답한다. 이 답을 이론의 미완성으로 볼지 정직함으로 볼지가 갈린다.
이중효과
의무론이 결과의 무게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으면서 제약을 지키려고 쓰는 장치가 이중효과 원리(doctrine of double effect)다. 나쁜 결과를 예견하는 것과 의도하는 것을 가르고, 앞엣것만 허용한다. 이 원리는 가톨릭 자연법 전통에서 다듬어졌고, 뿌리는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년경–1274)가 정당방위를 논한 대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흔히 말한다.
표준 보기는 이렇다. 통증을 없애려고 약을 늘리는데 그것이 죽음을 앞당기리라는 것을 예견한다. 의도한 것은 통증의 제거이고 죽음은 예견된 부작용이다. 죽음을 수단으로 쓴 것이 아니므로 셋째 조건도 통과한다.
반론이 두 자리에서 온다. 폐쇄 문제는 셋째 조건을 친다.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다시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의 몸이 전차를 막는 것"을 의도했다고 적으면 조건을 통과해 버린다. 기술을 바꿔 답이 바뀌면 그것은 원리가 아니다. 톰슨(Judith Jarvis Thomson, 1929–2020)의 지적은 둘째 조건을 친다. 같은 일을 같은 방식으로 하는 두 사람이 마음속 의도만 다를 때 한 사람만 허용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이것은 이상하다. 의도는 행위자를 평가할 뿐 행위의 허용성을 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장이 이 장치를 트롤리 변형으로 시험한다.
덕 윤리 — 성품을 먼저 놓는다
20세기 중반에 앤스컴(G. E. M. Anscombe, 1919–2001)이 「Modern Moral Philosophy」(1958)에서 도발적인 진단을 내놓는다. 근대 도덕철학이 쓰는 말들 — 의무, 당위, 도덕적으로 옳음 — 이 법의 틀에서 나온 말인데, 그 틀을 떠받치던 것이 사라진 뒤에도 말만 남아 헛돌고 있다는 것이다. 법이 있으려면 법을 놓는 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 자리가 비었다면, 남은 것은 뜻을 잃은 명령형이다. 그의 제안은 그 말들을 잠시 내려놓고 심리학과 성품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그 제안에서 덕 윤리가 되살아났다. 뿌리는 아리스토텔레스다. 물음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로 옮겨 간다.
성품, 중용, 실천지
출발점은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다. 흔히 행복으로 옮기지만 기분을 뜻하지 않는다. 사람으로서 잘 살고 있음에 가깝고, 한때의 상태가 아니라 삶 전체에 대한 평가다. 덕(virtue)은 그 잘 삶을 이루는 성품의 상태다. 한 번 용감하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안정되게 그렇게 판단하고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행동하는 상태다.
여기가 다른 두 이론과 크게 갈리는 자리다. 덕 윤리에서는 감정이 평가 안에 들어온다. 마지못해 도운 사람과 기꺼이 도운 사람은 같지 않다. 유덕한 사람은 옳은 일을 하면서 그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결과주의와 의무론에서는 이 차이를 담기가 어렵고, 담더라도 행위 평가가 아니라 행위자 평가로 따로 떼어 두어야 한다.
덕의 자리를 잡는 장치가 중용이다. 각 덕은 부족과 과잉 사이에 있다. 두려움과 자신감에 대해서는 비겁과 무모 사이에 용기가 있고, 몸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무감각과 방종 사이에 절제가 있다.
중용에 대해 두 가지를 못 박아 둔다. 첫째, 산술적 중간이 아니다. 어디가 중용인지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르다. 둘째, 모든 것에 중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잔인함이나 시기에는 알맞은 양이 없다.
그러면 어디가 중용인지 누가 정하는가. 여기서 실천지(phronesis)가 들어온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알맞은지를 짚어 내는 능력이다. 규칙을 아는 것과 다르다. 규칙은 어떤 상황이 그 규칙이 적용되는 상황인지를 스스로 말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덕 윤리가 무엇을 설명하려고 나왔는지가 여기서 드러난다. 규칙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우리가 실제로 하는 판단이다.
받는 반론 셋
가장 자주 오는 것이 지침을 주지 않는다는 반론이다. 지금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유덕한 사람이 할 일을 하라"는 답이 되지 않는다. 무엇이 유덕한 사람의 일인지 알려면 이미 답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허스트하우스(Rosalind Hursthouse)의 응답이 널리 인용된다. 덕과 악덕의 이름 하나하나가 이미 지침이라는 것이다. 정직하게 하라, 잔인하게 굴지 말라, 인색하게 굴지 말라. 이 지침들은 결과주의나 의무론이 내놓는 규칙보다 덜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어떤 규칙 체계든 마지막에는 이 규칙이 이 상황에 적용되는지를 판단해야 하므로, 판단을 요구한다는 것이 덕 윤리만의 흠은 아니다. 반론 쪽 재반박은 이 응답이 덕 윤리를 규칙 체계에 가깝게 만들었고, 그러면 애초의 차별점이 흐려진다는 것이다.
둘째는 순환 반론이다. 어떤 성품이 덕인지 정하려면 이미 무엇이 옳은지를 알아야 하고, 그러면 옳음이 성품보다 먼저 있게 되는 것 아닌가. 덕 윤리 쪽 응답은 덕의 목록을 옳음에서가 아니라 사람이 잘 사는 데 무엇이 필요한가에서 끌어낸다는 것이다. 이 응답은 순환을 피하는 대신 사람의 잘 삶에 대한 실질적 주장을 떠안는다.
셋째는 상황주의(situationism)다. 성격 심리학의 연구를 근거로 삼는 경험적 반론이다. 사람의 행동은 안정된 성품보다 상황의 세부에 훨씬 크게 좌우되며, 덕 윤리가 전제하는 것처럼 두루 일관된 성품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먼과 도리스(John Doris)가 이 논의를 끌었다. 덕 윤리 쪽 응답은 셋으로 나온다. 덕은 흔한 것이 아니라 드문 성취이므로 보통 사람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것이 예측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 실험이 재는 것이 덕 윤리가 말하는 성품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덕 윤리는 사람이 실제로 어떤지가 아니라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말한다는 것이다. 이 논쟁은 결판나지 않았다. 마지막 응답에는 값이 붙는다는 지적도 있다. 실현 가능성을 완전히 놓아 버리면 이론이 실천의 안내라는 자리를 잃는다는 것이다.
셋이 서로에게 던지는 반론
세 이론을 나란히 놓았으니 이제 서로에게 무엇을 던지는지 한자리에 모은다. 여기서 지켜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대칭이어야 한다. 한 이론에는 반론만 적고 다른 이론에는 응답만 적으면, 표가 이미 답을 정한 셈이 된다.
표를 읽는 요령은 대각선부터 보는 것이다. 대각선에는 다른 이론이 던진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 자신이 아직 풀지 못한 문제가 적혀 있다. 결과주의는 부품을 갈아 끼울수록 내용이 옅어지고, 의무론은 준칙 서술과 의무 충돌을 안고 있으며, 덕 윤리는 덕 목록의 문화 의존성과 상황주의를 안고 있다. 세 이론 모두 자기 집안에 미해결 문제가 있다.
그리고 표가 보여 주지 않는 것을 하나 적어 둔다. 실제 판정에서는 셋이 크게 갈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거짓말·약속 위반·잔인함에 대해 세 이론은 대체로 같은 답을 낸다. 갈리는 것은 판정이 아니라 그 판정을 대는 이유이고, 이유가 다르면 어려운 사례에서 갈린다. 19장이 그 어려운 사례들을 모아 놓은 장이다.
여기서 이론 선택에 대해 한 가지만 정리해 둔다. 셋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일은 "어느 이론이 모든 사례를 맞히는가"로 결판나지 않는다. 셋 다 어긋나는 사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3장의 반성적 평형이 여기서 실제로 돌아간다. 이론과 개별 판단이 부딪칠 때 어느 쪽을 고칠지, 그리고 그 선택이 다른 곳에서 무엇을 낳는지를 함께 보는 것 — 그것이 이 논쟁이 실제로 진행되는 방식이다.
계약주의 — 서로에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네 번째 갈래를 한 절로 적어 둔다. 계약주의(contractualism)다. 스캔런(T. M. Scanlon)이 『서로에게 무엇을 빚지는가』(What We Owe to Each Other, 1998)에서 세운 형태가 널리 논의된다.
시험은 이렇다. 어떤 행위가 그른 것은, 그 행위를 허용하는 원칙을 누구도 합당하게 거부할 수 없는 원칙 집합이 금지할 때다. 쓰는 법은 네 걸음이다. 문제의 행위를 허용하는 원칙을 적는다. 그 원칙 아래에서 누가 어떤 부담을 지는지 본다. 그 사람이 그 원칙을 합당하게 거부할 수 있는지 묻는다. 거부할 수 있으면 그 행위는 그르다.
결과주의와 갈리는 자리가 셈법에 있다. 불만을 개인 단위로 센다. 여러 사람의 작은 불만을 더해서 한 사람의 큰 불만을 이기게 만들 수 없다. 견주는 것은 총합끼리가 아니라 가장 무거운 개인의 불만끼리다. 이것이 앞 절에서 본 "총합이 개인을 삼킨다"는 반론에 대한 하나의 대응이다.
이 이론이 무엇을 설명하려고 나왔는지도 분명하다. 도덕의 요구가 왜 나를 구속하는가이다. 남에게 정당화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남을 대하지 않는다는 것 — 그 관계 자체가 이유가 된다. 도덕적 요구의 구속력을 바깥의 사실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찾는 셈이다.
대가가 둘이다. 첫째, ‘합당하게’라는 말이 이미 도덕적 판단을 담고 있다. 무엇이 합당한 거부인지를 정하려면 무엇이 정당한 이해관심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러면 도덕을 도덕으로 설명한 셈이 된다는 순환 우려가 있다. 둘째, 합당한 거부를 할 수 없는 존재를 어떻게 다루는가. 동물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가 그렇다. 19장의 동물 절이 이 자리로 돌아온다.
마지막으로 경계를 그어 둔다. 이 절이 다루는 것은 개인 행위의 옳고 그름이다. 사회계약으로 국가의 정당성을 세우는 논의, 원초적 입장과 무지의 베일, 분배 정의는 다른 물음이고 20장의 일이다. 이름이 비슷해 섞이기 쉬우니 갈라 둔다.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용어부터 모은다.
| 용어 | 뜻 |
|---|---|
| 결과주의(consequentialism) | 행위의 옳고 그름을 그 행위가 낳는 결과가 정한다. 좋음을 먼저 놓는다 |
| 공리주의(utilitarianism) | 결과주의의 한 형태. 최대 행복 원리를 쓴다 |
| 최대 행복 원리 | 행복을 늘리는 만큼 옳고 그 반대를 낳는 만큼 그르다 |
| 행위 공리주의 / 규칙 공리주의 | 낱개 행위의 결과를 본다 / 모두가 따를 규칙의 결과를 보고 규칙을 고른다 |
| 붕괴 반론 | 규칙 공리주의에 예외를 붙여 가면 행위 공리주의로 무너진다는 반론 |
| 쾌락주의 / 선호 만족설 / 객관적 목록설 | 좋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세 후보. 결과주의의 부품 하나다 |
| 경험 기계 | 원하는 경험을 다 주지만 실제 일은 아닌 기계. 쾌락주의를 겨눈 노직의 사고실험 |
| 의무론(deontology) | 옳음이 좋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결과가 좋아져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
| 제약 / 선택지 / 초과 의무(supererogation) | 결과가 좋아도 넘지 말 선 / 안 해도 되는 여지 / 하면 칭찬받고 안 해도 비난받지 않는 행위 |
| 제약의 역설 | 살인이 나쁘다면 살인 다섯을 막는 살인 하나는 왜 금지인가라는 물음 |
| 행위자 상대적 이유 | 내가 무엇을 하는가가 내게 특별한 무게를 갖는다는 것. 제약의 역설에 대한 의무론의 답 |
|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 / 가언명령 | 조건 없이 구속하는 명령 / 목적을 버리면 사라지는 명령 |
| 준칙(maxim) | 행위 · 상황 · 목적이 다 들어간 나의 행위 규칙. 보편화 검사의 입력이다 |
| 보편 법칙의 정식 / 인간성의 정식 | 준칙을 보편화해 무엇이 무너지는지 본다 / 사람을 수단으로만 대하지 마라 |
| 개념에서의 모순 / 의욕에서의 모순 | 보편화하면 준칙 자체가 성립하지 않음 / 상상은 되지만 의욕할 수 없음 |
| 완전한 의무 / 불완전한 의무 | 예외를 두지 않는 의무 / 언제 어떻게 할지가 행위자에게 남는 의무 |
| 조건부 의무(prima facie duty) | 다른 의무와 부딪치지 않는 한 실제로 해야 할 일. 로스의 장치다 |
| 이중효과 원리(doctrine of double effect) | 나쁜 결과를 예견하는 것과 의도하는 것을 가르고 앞엣것만 허용하는 네 조건 |
| 폐쇄 문제 | 무엇을 의도했는지를 다시 적으면 이중효과의 판정이 바뀐다는 반론 |
| 덕 윤리(virtue ethics) | 성품을 먼저 놓는다. 옳은 행위는 유덕한 사람이 그 상황에서 할 행위다 |
|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 사람으로서 잘 살고 있음. 기분이 아니라 삶 전체에 대한 평가다 |
| 중용 | 부족과 과잉 사이의 자리. 산술적 중간이 아니며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르다 |
| 실천지(phronesis) | 이 상황에서 무엇이 알맞은지를 짚어 내는 능력. 규칙을 아는 것과 다르다 |
| 상황주의(situationism) | 두루 일관된 성품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성격 심리학 쪽의 경험적 반론 |
| 계약주의(contractualism) | 누구도 합당하게 거부할 수 없는 원칙이 금지하는 것이 그르다. 스캔런의 시험 |
| 합산 문제 | 계약주의가 불만을 개인 단위로 세면서 수를 어떻게 셈에 들일지의 문제 |
사람은 이렇게 나왔다.
| 이름 | 이 장에서 맡은 자리 |
|---|---|
| 벤담 | 고전 공리주의. 좋음을 쾌락으로, 셈을 총합으로 놓았다 |
| 밀 | 쾌락의 질적 구별. 부품 하나를 손본 첫 수선이다 |
| 시지윅 | 공평성 요구를 우주의 관점이라는 말로 적었다 |
| 노직 | 경험 기계. 쾌락주의를 겨눈다 |
| 칸트 | 정언명령, 보편 법칙의 정식과 인간성의 정식 |
| 로스 | 조건부 의무. 의무 충돌을 정면으로 받는 다원적 의무론 |
| 아퀴나스 | 이중효과 원리의 뿌리로 흔히 지목된다 |
| 톰슨 | 의도가 행위의 허용성을 정하지 않는다는 지적 |
| 앤스컴 | 근대 도덕철학 비판. 덕 윤리를 되살린 출발점 |
| 아리스토텔레스 | 덕 윤리의 뿌리. 에우다이모니아, 중용, 실천지 |
| 허스트하우스 | 덕 이름 자체가 지침이라는 응답 |
| 하먼, 도리스 | 상황주의 — 안정된 성품이 실재하는가라는 경험적 반론 |
| 스캔런 | 계약주의. 합당하게 거부할 수 없는 원칙 |
이 장의 등급을 적어 둔다. 결과주의·의무론·덕 윤리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가는 미결이다. 셋 다 살아 있고, 이 문서는 어느 쪽도 고르지 않았다. 제약의 역설에 대한 의무론의 답이 성공하는가, 규칙 공리주의가 붕괴 반론을 넘어서는가, 이중효과 원리가 성립하는가, 상황주의가 덕 윤리를 무너뜨리는가도 모두 미결이다. 반면 사실상 다툼이 없는 것도 있다. 정언명령의 보편화 검사가 준칙의 서술에 의존한다는 것, 엄격한 행위 공리주의에 초과 의무의 자리가 없다는 것, 그리고 세 이론이 쉬운 사례에서는 대체로 같은 판정을 낸다는 것이다. 마지막 항목이 중요하다. 이론을 고르는 일은 쉬운 사례로 결판나지 않는다.
더 읽을 곳으로는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의 Consequentialism 항목, 같은 백과의 Deontological Ethics 항목, Virtue Ethics 항목, Contractualism 항목이 있다.
다음 장은 이 세 이론을 구체적 사례에 대어 본다. 다만 이론을 사례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장이 아니다. 사례가 이론을 되치는 장이다.
이론을 사례에 대어 보기
18장이 세 이론을 나란히 놓고 끝났다. 이제 사례로 간다. 그런데 이 장이 하는 일을 먼저 정확히 적어 두어야 한다. 이 장은 이론을 사례에 대입해 답을 뽑아내는 장이 아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느 이론이 맞는지가 먼저 정해져 있어야 하는데, 18장이 보였듯 그것은 정해지지 않았다.
이 장이 하는 일은 반대 방향이다. 사례가 이론을 되친다. 어떤 사례에서는 우리 판단이 이론의 예측과 어긋나고, 그 어긋남이 이론을 고치라는 압력이 된다. 다른 사례에서는 판단끼리 서로 부딪치고, 그 부딪침 자체가 자료가 된다. 3장의 반성적 평형이 실제로 도는 것을 이 장에서 보게 된다.
이 장에서 답할 질문은 넷이다.
- 셈이 같은 두 사례를 우리가 다르게 판단한다면, 무엇이 그 둘을 갈라 주는가.
- 멀리 있는 사람을 도울 의무가 나에게 있는가. 있다면 어디까지인가.
- 무엇이 어떤 존재를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만드는가.
- 사람이 통제하지 못하는 시스템이 해를 끼쳤을 때 누가 책임지는가.
앞 장에서 가져오는 것이 많다. 3장의 사고실험 다섯 단계와 반론이 들어올 자리 셋 — 상황이 불가능하다, 판단이 갈린다, 판단이 그 결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 을 계속 쓴다. 3장의 반성적 평형도 쓴다. 4장의 번호 표기와 3장의 반례 두 용법을 쓴다. 18장의 세 이론과 이중효과 원리, 초과 의무, 계약주의를 그대로 쓴다. 마지막 절에서는 12장의 통제 조건과 반응적 태도, 도덕적 운을 가져오고, 14장이 "19장에서 다시 본다"며 넘긴 물음도 여기서 받는다.
경계도 그어 둔다. 분배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20장의 물음이다. 이 장의 기근 구제 절은 개인의 의무 쪽에 머문다.
트롤리 — 직관이 갈린다는 것이 자료다
풋(Philippa Foot, 1920–2010)이 「The Problem of Abortion and the Doctrine of the Double Effect」(1967)에서 사례 하나를 냈다. 이 사례가 만들어진 목적을 먼저 적어 두는 것이 중요하다. 18장의 이중효과 원리를 시험하려고 만든 것이다. 재미있는 수수께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풋의 원형은 전차 기관사가 선로를 바꾸는 경우였다. 아래에 적는 스위치를 쥔 방관자 판본과 육교 사례는 톰슨이 붙인 것이고, 그 짝이 생기면서 논쟁이 지금 모양이 되었다.
갈림길. 전차가 다섯 사람을 향해 달린다. 옆에 스위치가 있다. 당기면 전차가 옆 선로로 가고 거기 있는 한 사람이 죽는다. 당겨도 되는가. 대체로 그렇다고 답한다.
육교. 전차가 다섯 사람을 향해 달린다. 나는 선로 위 육교에 있고 옆에 몸집이 큰 사람이 있다. 그를 밀어 떨어뜨리면 전차가 멈추고 다섯 사람이 산다. 밀어도 되는가. 대체로 안 된다고 답한다.
3장의 다섯 단계로 읽으면 이 장치가 무엇을 하는지 보인다. 상황은 두 사례다. 판단은 "당겨도 된다"와 "밀면 안 된다"다. 그 판단이 지지하는 주장은 결과의 셈만으로는 옳고 그름이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셈이 같은데 판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흔한 오해를 끊어 둔다. 이 사례는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를 묻는 물음이 아니다. 물음은 무엇이 허용되는가이고, 더 정확히는 어떤 원리가 우리 판단을 설명하는가다. 그리고 이 사례가 겨누는 것은 결과주의 하나가 아니다. 결과주의를 곤란하게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두 사례를 갈라 줄 원리를 내놓아야 하는 부담을 의무론 쪽에도 지운다.
무엇이 두 사례를 갈라 주는가
후보가 여럿 나왔다. 각각 두 표준 사례는 맞힌다. 무너지는 자리는 변형이다.
후보 A — 이중효과. 갈림길에서 그 한 사람의 죽음은 예견될 뿐이고, 육교에서는 의도된다. 18장의 셋째 조건으로 적으면, 육교에서는 좋은 결과가 나쁜 결과를 거쳐 나온다.
후보 B — 수단으로 씀. 육교에서는 그의 몸이 있어야 계획이 성립한다. 갈림길에서는 옆 선로에 아무도 없어도 계획이 그대로 성립한다. 18장의 인간성의 정식과 이어지는 후보다.
후보 C — 위협의 방향 전환. 갈림길에서는 이미 있는 위협을 다른 데로 돌릴 뿐이고, 육교에서는 없던 위협을 새로 만든다. 톰슨이 한동안 이 답을 밀었다.
후보 D — 함과 그냥 둠. 곧바로 탈락한다. 갈림길에서도 나는 손을 대어 무언가를 하기 때문이다. 이 후보는 두 사례를 가르지 못한다.
이제 변형을 하나 넣는다. 고리 궤도. 옆 선로가 곧게 뻗은 것이 아니라 크게 돌아 본선으로 다시 이어진다. 스위치를 당겨 전차를 옆 선로로 보내면, 그 선로에 있는 한 사람의 몸이 전차를 멈춘다. 그가 없었다면 전차는 고리를 돌아 다섯 사람을 그대로 친다. 당겨도 되는가. 판단은 대체로 허용 쪽으로 기운다. 갈림길과 비슷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례에서 그의 죽음은 수단이다. 그가 없으면 계획이 성립하지 않는다. 후보 A와 후보 B는 여기서 "안 된다"고 예측하는데 판단은 그렇지 않다.
남은 후보 C도 안전하지 않다. 방향 전환이라는 사실만으로는 허용이 나오지 않는다. 양쪽 선로에 같은 수의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돌려도 된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물음이 남는다 — 왜 방향 전환이 도덕적으로 중요한가. 죽는 사람 입장에서 위협이 원래 있던 것인지 새로 생긴 것인지가 왜 차이를 만드는지 설명되지 않았다. 톰슨 자신이 뒤에 생각을 바꾸어, 갈림길에서도 돌리면 안 된다는 쪽으로 갔다.
후보 A에는 별도의 약점이 하나 더 있다. 18장에서 본 폐쇄 문제다. 고리 궤도에서 내가 의도한 것을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의 몸이 전차를 막는 것"으로 적으면 셋째 조건을 통과해 버린다. 그가 몸이 부딪친 뒤 기적적으로 살아난다면 나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기술을 바꿔 답이 바뀐다면 그것은 원리가 아니다.
여기에 18장에서 쓴 이식 사례를 얹으면 압력이 더 커진다. 건강한 한 사람의 장기를 꺼내 다섯 사람을 살리는 일은 거의 모두가 안 된다고 답한다. 셈은 갈림길과 같다. 어떤 원리든 갈림길은 허용하고 이식은 금지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고리 궤도도 맞혀야 한다.
이 사례들이 남기는 것
표를 다 채우는 원리를 아직 아무도 내놓지 못했다. 이것이 이 절의 결과다. "그래서 답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답은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아니다. 얻은 것을 정확히 적으면 이렇다. 결과의 셈만으로는 우리 판단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겠다고 나온 원리들이 각각 어디서 무너지는지가 밝혀졌다는 것이다.
결과주의 쪽은 다른 길을 간다. 세 사례를 모두 같게 보고, 판단의 차이를 원리로 설명하는 대신 편향으로 설명한다. 손으로 사람을 미는 장면이 강한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고 그 반응이 판단을 굽힌다는 것이다. 그린(Joshua Greene)이 이 방향의 논의를 끌었다. 스위치를 당기는 일은 그런 반응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우리가 두 사례를 다르게 판단한다는 설명이다.
이 설명에 대한 표준적 되받기가 있다. 그 설명이 맞다 해도, 그것만으로 그 판단이 틀렸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어떤 판단이 어디서 왔는지를 밝히는 것과 그 판단이 참인지를 판정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우리 판단은 모두 어딘가에서 왔다. 결과주의 쪽 판단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되받기에 대한 재반박은 "정서적 반응이 도덕적으로 관련 없는 특징 — 손으로 미느냐 아니냐 — 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따로 보여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진다. 그것을 보이려면 어떤 특징이 도덕적으로 관련 있는지를 먼저 정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다투어지는 물음이다. 이 자리는 미결이다.
마지막으로 사고실험 자체에 대한 회의를 적어 둔다. 3장의 반론 자리 가운데 상황을 치는 반론이다. 이런 상황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고, 설정이 지나치게 깔끔해서 — 결과가 확실하고, 다른 선택지가 없고,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고 — 현실의 판단과 다른 것을 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적은 진지하다. 응답은 이렇다. 사고실험은 현실을 흉내 내려는 것이 아니라 변수를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를 고정하려는 것이며, 그 점에서 통제된 실험과 같은 일을 한다. 다만 이 응답에도 한계가 있다. 고정한 것 가운데 실은 도덕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었다면, 실험은 엉뚱한 것을 재고 있는 셈이다.
기근 구제 — 개인의 의무는 어디까지인가
싱어(Peter Singer)가 「Famine, Affluence, and Morality」(1972)에서 낸 논증이다. 이 논증의 특징을 먼저 적어 둔다. 수치를 하나도 쓰지 않는다. 얼마를 주면 몇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식의 계산이 논증의 부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 문서도 여기에 수치를 적지 않는다.
논증의 뼈대는 이렇다.
- (P1) 굶주림과 그로 인한 죽음은 나쁘다.
- (P2) 비슷하게 중요한 것을 희생하지 않고 나쁜 일을 막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 (P3) 눈앞의 연못에 빠진 아이를 건지는 것과 멀리 있는 사람을 돕는 것 사이에 도덕적으로 중요한 차이가 없다.
- (P4) <글에 없음> 우리는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도울 수 있다.
- (C) 그러므로 비슷하게 중요한 것을 희생하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만큼 도와야 한다.
연못 사례가 이 논증의 사고실험이다. 얕은 연못에 아이가 빠져 있고 나 말고 아무도 없다. 들어가면 아이를 건질 수 있지만 옷과 신발을 버리게 된다. 들어가야 하는가. 거의 모두가 그렇다고 답하고, 옷값을 이유로 지나치는 사람을 우리는 비난한다. 3장의 다섯 단계로 읽으면, 이 판단이 지지하는 주장이 (P2)다. 희생이 비교할 수 없이 작다면 나쁜 일을 막아야 한다.
(P3)이 이 논증의 지렛대다. 연못의 아이와 멀리 있는 사람 사이에 무엇이 다른가. 거리는 그 자체로 도덕적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 옆 마을 아이와 옆 나라 아이를 다르게 대할 이유를 거리에서 찾기는 어렵다. 다른 사람들도 돕지 않는다는 것도 면제가 되지 않는다. 연못가에 다른 어른이 여럿 서 있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지나쳐도 되는 것은 아니다.
(P4)는 사실 전제다. 원조가 실제로 그 일을 하는가는 도덕 논증이 아니라 경험적 조사가 답할 물음이고, 이 문서는 그 조사 결과를 여기에 적지 않는다. 다만 논증의 구조를 읽는 데 필요한 것 하나는 적어 둔다. (P4)를 치는 반론은 결론의 적용 범위를 줄일 수는 있어도 (P1)(P2)(P3)을 건드리지 못한다. 원조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때 따라 나오는 것은 "도울 의무가 없다"가 아니라 "잘 작동하는 방법을 찾을 의무가 있다"에 가깝다.
요구 과잉
이 논증에 대한 가장 강한 반론이 요구 과잉(demandingness objection)이다. (P2)를 겨눈다.
가장 강한 형태로 적으면 이렇다. (P2)를 받아들이면 내가 쓰는 거의 모든 돈이 검사 대상이 된다. 나에게 그 돈이 주는 것과 그 돈이 남의 목숨에 하는 일을 견주면 언제나 뒤가 무겁다. 그러면 나는 비슷하게 중요한 것을 희생하기 직전까지 계속 주어야 하고, 내 삶의 계획·관계·직업 선택이 전부 남의 필요에 종속된다. 도덕이 그런 것이라면 도덕적으로 사는 일은 자기 삶을 갖지 않는 일이 된다. 18장의 말로 하면, 이 논증은 선택지와 초과 의무의 칸을 지운다.
응답이 세 갈래로 나온다.
- 요구가 크다는 것 자체는 반론이 아니다. 도덕이 편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과거에도 널리 받아들여지던 편한 도덕이 뒤에 잘못으로 판정된 일이 있다. 그러므로 "너무 많이 요구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논박이 아니라 논박을 시작하겠다는 예고다.
- 약한 판본으로 물러선다. (P2)를 "도덕적으로 중요한 무엇도 희생하지 않고"로 약하게 적으면 요구가 훨씬 작아진다. 싱어 자신이 논증에는 약한 판본으로도 충분하다고 밝혔다. 약한 판본만으로도 우리가 지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많이 요구된다.
- 문턱을 둔다. 일정한 몫까지가 의무이고 그 위는 초과 의무라고 잡는 길이다. 우리 판단의 모양을 가장 잘 담지만, "왜 하필 그 높이인가"에 답해야 한다.
여기서 정확히 적어야 할 것이 있다. 이 반론이 논증을 무너뜨리는지, 아니면 우리 판단 쪽을 고쳐야 하는지가 아직 결판나지 않았다. 반성적 평형의 언어로 적으면 이렇다. 원리 (P2)와 "나는 내 삶을 살아도 된다"는 판단이 부딪친다. 원리를 고칠 수도 있고 판단을 고칠 수도 있으며, 3장이 말한 대로 어느 쪽도 고정점이 아니다. 다만 이 다툼이 어느 쪽으로 가든 어느 판본을 잡아도 우리가 실제로 하는 것보다는 많이 요구한다. 그것이 이 논증이 남기는 것이다.
경계를 다시 그어 둔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전부 개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였다. 사회가 자원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가, 국가에 그런 의무가 있는가는 다른 물음이고 20장의 것이다. 두 물음은 답이 서로를 결정하지 않는다. 개인의 의무가 크다고 보면서 국가의 강제는 반대할 수도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동물의 도덕적 지위
물음을 먼저 정확히 적는다. 무엇이 어떤 존재를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만드는가. 이것은 "동물을 잘 대해야 하는가"보다 앞선 물음이다.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 존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그 존재 자신을 위해 셈에 들어온다는 뜻이다. 남의 화분을 부수면 안 되는 것은 화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오래된 답은 이성·언어·도덕적 행위 능력이었다. 도덕의 자리에 서려면 이유를 주고받고 자기 행동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8장에서 본 계약주의가 구조적으로 이 자리에 가깝고, 칸트의 인간성 정식도 이성적 존재를 대상으로 삼는다.
벤담이 물음을 다른 데로 옮겼다.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의 한 각주에서 그는 물음이 그들이 따져 볼 수 있는가도, 말할 수 있는가도 아니고 괴로워할 수 있는가라고 적었다. 여기서 나온 기준이 쾌고 감수 능력(sentience)이다. 고통과 즐거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
싱어가 이 기준 위에 원칙을 세웠다. 이익 평등 고려다. 어떤 존재가 고통을 겪을 수 있다면 그 고통은 셈에 들어와야 하고, 같은 크기의 고통은 누구의 것이든 같은 무게로 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이 요구하는 것은 같은 대우가 아니라 같은 고려다. 개에게 투표권을 주라는 말이 아니라, 개의 고통을 그것이 개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가볍게 세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 셈을 하는 태도에 종차별주의(speciesism)라는 이름이 붙었다. 싱어가 널리 퍼뜨린 말이다.
이 이름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정확히 적어야 한다. 종이 다르다는 것이 그 자체로는 도덕적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무게가 달라지는 경우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인지 능력이 다르면 겪는 것도 달라지고, 그것은 셈에 들어온다.
가장자리 사례 논증
이성을 기준으로 삼는 답에 대한 가장 강한 반론이 가장자리 사례 논증이다. 구조가 단순하다.
- (P1) 도덕적 지위의 근거는 이성·언어·도덕적 행위 능력이다.
- (P2) 이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갓 태어난 아기, 심한 인지 장애가 있는 사람.
- (C1) 그러므로 (P1)이 참이면 그들에게 도덕적 지위가 없다.
- (P3) 그런데 그들에게 도덕적 지위가 있다.
- (C) 그러므로 (P1)은 거짓이다.
그림이 보여 주는 것이 이 논증의 형태다. 능력의 축 위에서 모든 사람을 안에 두려고 선을 낮추면 많은 동물이 함께 들어오고, 모든 동물을 밖에 두려고 선을 높이면 일부 사람이 함께 나간다. 어느 높이에도 원하는 선이 없다.
응답이 셋 나온다. 종의 구성원임 자체가 근거라는 것 — 개별 능력이 아니라 어느 종에 속하는가를 본다. 정상적인 종의 능력을 본다는 것 — 그 개체가 아니라 그 종에게 전형적인 능력을 기준으로 삼는다. 관계와 소속이 의무를 낳는다는 것 — 우리가 서로에게 지는 의무의 상당 부분이 실제로 관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는다.
셋 다 같은 부담을 진다. 왜 하필 종이 그런 관계인가. 그리고 같은 논법이 다른 집단 경계에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이 이 자리의 위험이다. 다만 세 번째 응답은 다른 데서 힘을 얻는다. 관계가 의무를 낳는다는 것은 앞 절의 (P3) 논의에서도 나왔고 널리 인정되는 자리다.
이 논증의 틀 자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어떤 사람들을 "가장자리"로 놓고 논증의 재료로 쓰는 일이 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으로서 옳으냐는 것이다. 이 지적은 논증의 타당성을 겨누지는 않지만, 논증을 어떻게 적어야 하는가에 대한 요구로는 정당하다.
다른 근거들
리건(Tom Regan, 1938–2017)이 다른 길을 냈다. 기준을 고통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 잡는다. 믿음과 욕구를 갖고, 미래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자기 삶이 자기에게 잘되거나 잘못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존재는 총합으로 상쇄할 수 없는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
싱어와 리건은 결론이 자주 겹치지만 이유가 다르고, 갈리는 자리가 있다. 싱어의 틀은 결과주의이므로 총합이 크게 나아지면 개별 존재의 이익이 밀릴 수 있다. 리건의 틀은 권리에 가까우므로 총합으로도 정당화되지 않는 것이 있다. 18장의 결과주의와 의무론의 갈림이 여기서 그대로 재현된다. 리건 쪽이 지는 부담은 삶의 주체 조건에 미치지 못하는 동물을 어떻게 하는가다.
지위를 아예 묻지 않는 길도 있다. 덕 윤리는 잔인함이라는 악덕에서 시작한다. 동물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 길은 지위 논쟁을 우회하는 대신 반론을 받는다 — 그러면 그것은 동물 자신을 위한 이유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관한 이유가 된다. 18장에서 본 계약주의는 여기서 가장 곤란하다. 합당한 거부를 할 수 없는 존재를 시험 안에 넣지 못하므로 다른 근거를 찾아야 한다.
14장이 넘긴 물음도 여기서 만난다. 어떤 존재가 고통을 겪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신경계가 우리와 많이 다른 동물에 대해 이 물음은 열려 있고, 14장은 그 판정에 쓰이는 근거가 결론을 미리 담기 쉽다는 점을 지적해 두었다.
이 절의 등급을 적어 둔다.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동물의 이익이 도덕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순전히 사람의 이익만 세는 견해를 지금 정면으로 옹호하는 논의는 드물다. 갈리는 것은 무엇이 근거이고, 어디까지이며, 어떤 무게인가다. 이 자리는 미결이다.
인공지능과 자율 시스템의 책임
마지막 절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물음을 다룬다. 지금 답이 났다고 쓸 수 없는 자리다. 이 절이 할 수 있는 일은 물음들을 갈라 놓고, 각 갈래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내놓는지 적는 것까지다.
문제의 모양은 이렇다. 어떤 시스템이 학습으로 행동을 바꾸고, 개별 출력이 만든 사람에게도 예견되지 않으며, 쓰는 사람은 왜 그런 출력이 나왔는지 모른다. 그 시스템이 관여한 자리에서 해가 일어났다. 누가 책임지는가.
책임 공백
12장이 책임의 조건 하나를 통제 조건이라 불렀다. 그 일이 그의 통제 아래 있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둘째 조건을 붙인다. 인식 조건 —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았거나 알 수 있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조건은 12장이 다룬 면제 사유들에 이미 들어 있었다. 강요당한 사람은 앞엣것이 없고, 속은 사람은 뒤엣것이 없다.
책임 공백(responsibility gap)이라 불리는 주장은 이렇다. 설계한 쪽, 배치한 조직, 쓰는 사람 어디에서도 두 조건이 함께 채워지지 않는다. 설계한 쪽은 만들 때는 통제했지만 개별 출력을 예견하지 못한다. 배치한 조직은 쓸지 말지를 정했지만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알지 못한다. 쓰는 사람은 왜 그런 출력이 나왔는지 모르고 개별 결정을 통제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해가 일어났는데 책임질 사람이 없는 자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반론이 셋 온다.
- 공백이 아니라 분산이다. 조건이 부분적으로 채워진 사람이 여럿 있는 것이지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물음은 "누구인가"에서 "어떻게 나누는가"로 바뀐다.
- 예견 불가능성은 면책이 아니다. 예견할 수 없는 것을 세상에 내놓기로 한 결정 자체가 평가 대상이다. 여기서 12장의 결과 운이 되살아난다 — 같은 결정을 한 두 사람 가운데 한쪽만 사고가 났을 때 둘을 다르게 평가해도 되는가.
-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조직과 관료제와 시장도 같은 구조를 만든다. 아무도 전체를 보지 못하는 채로 해가 일어나는 일은 전부터 있었다. 재반론은 정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12장의 반응적 태도로 옮기면 공백의 정서적 핵심이 드러난다. 우리는 기계에 분개할 수 없다. 분개할 대상이 없다는 느낌이 남는데, 그 느낌이 무엇의 증거인지가 다음 물음이다.
갈라야 할 세 물음
이 자리에서 논쟁이 헛도는 가장 흔한 이유는 세 물음을 섞기 때문이다.
물음 ①은 기계에 마음이 있는가다. 경험을 갖는가, 이해하는가. 15장이 다룬 물음이다. 물음 ②는 기계의 행동에 누가 책임지는가다. 앞 소절이 다룬 물음이다. 물음 ③은 책임의 주체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다. 이것이 둘을 잇지만 둘 중 어느 것도 아니다.
물음 ③에 대한 답이 셋으로 갈린다.
- 의식이 필요하다. 반응적 태도의 대상이 되려면 그 태도를 받는 쪽에서 무언가를 겪어야 한다. 원망도 용서도 겪는 상대가 없으면 헛돈다. 이 길을 택하면 물음 ③이 15장의 물음에 매인다.
- 이유 반응성으로 충분하다. 12장의 이유 반응성을 조건으로 잡으면 의식은 따로 요구되지 않는다. 다른 이유가 주어졌을 때 절차가 다르게 움직인다면 그것으로 조건이 채워진다.
- 법인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회사는 의식 없이 책임을 진다. 다만 법적 책임과 도덕적 책임이 같은 것인지가 다시 물음이 된다.
여기서 정확히 적어 둘 것이 있다. 책임은 의식을 요구하는가 — 이것이 이 절의 진짜 물음이고, 15장이 다룬 "기계가 이해하는가"와 다른 물음이다. 15장의 논쟁이 어느 쪽으로 결판나더라도 이 물음은 따로 답해야 한다. 의식이 있어도 책임의 주체가 아닐 수 있고 — 어린아이와 어떤 동물이 그렇다 — 반대 방향이 가능한지가 지금 다투어지는 것이다.
18장의 세 이론이 이 자리에서 하는 말도 서로 다르다. 결과주의는 누구에게 물으면 앞으로 해가 줄어드는가로 귀속을 정한다. 의무론은 누가 실제로 그 해를 저질렀고 누구의 권리가 침해되었는가를 먼저 본다. 덕 윤리는 이런 것을 만들고 내놓는 사람에게 어떤 성품이 요구되는가를 묻는다. 셋이 같은 답을 내지 않고, 어느 답이 맞는지는 18장의 미결과 함께 열려 있다.
이 절 전체가 미결이다. 책임 공백이 정말 생기는지부터 갈리고, 생긴다면 무엇으로 메울지도 갈린다. 지금 답이 있는 것처럼 쓰면 안 된다.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용어부터 모은다.
| 용어 | 뜻 |
|---|---|
| 갈림길 / 육교 | 트롤리의 두 표준 사례. 죽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수가 같다 |
| 고리 궤도 | 옆 선로가 돌아 본선으로 이어지는 변형. 이중효과와 수단으로 씀에 반례가 된다 |
| 이식 사례 | 한 사람의 장기로 다섯을 살리는 사례. 셈은 갈림길과 같은데 판단은 반대다 |
| 위협의 방향 전환 | 이미 있는 위협을 돌리는 것과 새 위협을 만드는 것을 가르는 원리 후보 |
| 연못 사례 | 얕은 연못에 빠진 아이. 싱어 논증의 (P2)를 지지하는 사고실험 |
| 요구 과잉(demandingness objection) | 도덕 이론이 자기 삶을 살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는 반론. 결과주의 일반에도 걸린다 |
| 도덕적 지위 | 그 존재에게 일어나는 일이 그 존재 자신을 위해 셈에 들어온다는 것 |
| 쾌고 감수 능력(sentience) | 고통과 즐거움을 겪을 수 있음. 벤담이 물음을 옮긴 자리다 |
| 이익 평등 고려 | 같은 크기의 이익은 누구의 것이든 같은 무게로 센다. 같은 대우가 아니라 같은 고려다 |
| 종차별주의(speciesism) | 종이 다르다는 것 자체를 도덕적 차이로 삼는 태도 |
| 가장자리 사례 논증 | 능력을 지위의 근거로 삼으면 어느 선을 그어도 한쪽이 어긋난다는 논증 |
| 삶의 주체 | 믿음과 욕구와 미래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자기 삶이 자기에게 잘되거나 잘못될 수 있는 존재. 리건의 기준 |
| 인식 조건 |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았거나 알 수 있었어야 한다는 책임의 조건. 12장의 통제 조건과 짝이다 |
| 책임 공백(responsibility gap) | 자율 시스템의 해에 대해 두 조건을 함께 채우는 사람이 없다는 주장 |
사람은 이렇게 나왔다. 18장에서 이미 나온 벤담과 톰슨은 자리만 적는다.
| 이름 | 이 장에서 맡은 자리 |
|---|---|
| 풋 | 트롤리 사례의 원형(기관사)을 만들었다. 이중효과 원리를 시험하려는 것이었다 |
| 톰슨 | 육교와 고리 궤도. 위협의 방향 전환을 밀었다가 뒤에 생각을 바꾸었다 |
| 그린 | 판단의 차이를 정서적 반응으로 설명하는 방향을 끌었다 |
| 싱어 | 기근 구제 논증, 이익 평등 고려, 종차별주의 |
| 벤담 | 괴로워할 수 있는가로 물음을 옮겼다 |
| 리건 | 삶의 주체. 총합으로 상쇄되지 않는 내재적 가치 |
이 장의 등급을 적어 둔다. 두 트롤리 사례를 갈라 주는 원리가 무엇인가는 미결이다. 후보 셋이 모두 변형에서 걸리고, 표를 다 채우는 원리를 아직 아무도 내놓지 못했다. 요구 과잉 반론이 기근 구제 논증을 무너뜨리는가도 미결이다. 도덕적 지위의 근거가 무엇인가도 미결이며, 책임 공백이 실제로 생기는가와 책임이 의식을 요구하는가도 미결이다.
사실상 다툼이 없는 것도 적는다. 셈이 같은 두 사례에서 대다수의 판단이 갈린다는 것은 자료로 받아들여진다. 거리 자체가 도덕적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도 정면으로 반박되는 일이 드물다. 어떤 형태로든 동물의 이익이 도덕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도 폭넓게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어느 판본을 잡아도 기근 구제 논증은 우리가 지금 하는 것보다 많이 요구한다는 것도 다투어지지 않는다. 다투어지는 것은 얼마나인가다.
이 장이 쓰지 않은 것도 적어 둔다. 어떤 정책이 옳은지, 어떤 제도를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 장은 아무 결론도 내지 않았다. 그것은 개인의 의무에서 곧바로 나오지 않으며,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20장의 물음이다.
더 읽을 곳으로는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의 Doctrine of Double Effect 항목, 같은 백과의 Grounds of Moral Status 항목, The Moral Status of Animals 항목, Ethics of Artificial Intelligence and Robotics 항목이 있다.
다음 장은 다시 층을 옮긴다. 지금까지는 한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물었다. 20장은 우리가 함께 사는 방식과, 그 위에 선 조직이 무엇을 할 권한을 갖는지를 묻는다.
정의와 국가
앞의 열일곱 장은 혼자서도 물을 수 있는 것들을 물었다. 무엇을 아는가, 무엇이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장의 물음은 처음부터 여럿을 전제한다. 우리는 같은 땅에서 함께 살고, 그 위에는 세금을 걷고 사람을 가두고 법을 강제하는 조직이 있다. 그 조직이 하는 일 가운데 어디까지가 정당한가.
이 장에서 답할 질문은 넷이다.
- 왜 국가에 복종해야 하는가. 총을 든 강도에게 지갑을 내주는 것과 세금을 내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 무엇이 정의로운 분배인가. 여기서 롤스와 노직이 정면으로 부딪친다.
- 자유란 무엇이고 평등은 왜 중요한가.
- 다수가 정했다는 것이 왜 따를 이유가 되는가.
3장에서 가져오는 것은 사고실험의 다섯 단계와 반론이 들어올 자리 셋이다. 이 장에는 사고실험이 둘 나오고, 둘 다 그 틀로 읽어야 한다. 4장에서 가져오는 것은 논증 재구성의 번호 표기다. 12장에서 가져오는 것은 도덕적 운이다. 뒤에서 평등을 다룰 때 그 개념이 그대로 쓰인다.
말 하나를 먼저 갈라 둔다. 12장의 자유지상론은 자유의지에 대한 입장이고, 이 장의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는 국가의 권한을 최소한으로 보는 정치철학의 입장이다. 영어는 같은 낱말이지만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 또 이 장의 사회계약(social contract)은 국가의 정당성을 다루는 장치이고, 18장이 다룬 도덕 이론으로서의 계약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장에 결론이 없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분배 정의는 지금도 갈려 있고, 이 문서는 어느 쪽도 고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러 견해가 있다"로 끝내지도 않는다. 각 입장을 그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이 읽고 "내 생각이 맞게 적혔다"고 할 만한 형태로 적는 것이 이 장이 할 일이다.
국가는 무엇으로 복종을 정당화하는가
분배 이야기로 곧장 들어가면 순서를 건너뛰게 된다. 무엇을 어떻게 나눌지 정하려면 먼저 나누는 일을 할 권한을 가진 무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철학의 첫 물음은 정의가 아니라 권위다.
권위와 힘은 다르다
정치적 권위(political authority)는 두 가지가 짝을 이룬 것이다. 명령을 내릴 권리와, 그 명령에 따를 의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뒤엣것이 내용과 따로 성립한다는 점이다. 살인 금지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살인이 나쁘기 때문이지 법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다녀야 하는 이유는 오른쪽에 무슨 미덕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정해졌기 때문이다. 권위가 있다는 말은 이런 이유가 실제로 생긴다는 말이다.
강도도 명령을 내리고 우리도 따른다. 그런데 우리는 강도에게 따를 의무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힘이 있다는 것과 권리가 있다는 것은 다르다. 국가가 강도와 다르다면 무엇이 다른가 — 이것이 물음이다.
표준적인 답의 뼈대가 사회계약이다. 세 걸음으로 되어 있다. 국가가 없는 상태를 그린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무엇에 동의할지를 묻는다. 동의했을 것에서 국가의 권한을 끌어낸다. 이 뼈대의 매력은 분명하다. 권위를 복종하는 사람 자신의 뜻에서 끌어내므로, 위에서 내려온 권위가 아니게 된다.
자연 상태 — 같은 장치, 세 개의 그림
국가가 없는 상태를 자연 상태(state of nature)라 부른다. 이것은 역사 보고가 아니다. 국가가 하는 일을 걷어냈을 때 무엇이 남는지를 보려는 장치다.
| 누가 | 자연 상태를 어떻게 그렸나 | 그래서 정당화되는 것 |
|---|---|---|
| 홉스 | 심판도 집행자도 없어 서로를 먼저 치는 것이 합리적인 상태. 힘이 엇비슷해서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 거스를 수 없는 주권. 판단할 권리를 통째로 넘긴다 |
| 로크 | 자연법과 권리가 이미 있는 상태. 없는 것은 확립된 법·공평한 재판관·집행력 셋뿐이다 | 제한된 정부. 권력은 신탁이고 신탁을 어기면 저항권이 돌아온다 |
| 루소 | 자연 상태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사람을 묶은 것은 사회가 만든 의존과 비교다 | 일반의지에 따르는 공화국. 시민은 스스로 만든 법에 복종한다 |
홉스의 논증은 사람이 악하다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 자원이 모자라고, 힘이 엇비슷하고, 서로를 믿을 근거가 없다는 상황에서 출발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먼저 치는 것이 합리적이고, 상대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상대 역시 먼저 치려 한다. 좋은 사람들만 모아 놓아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로크는 그 그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국가가 없어도 사람에게는 생명·자유·재산에 대한 권리가 있고, 그것을 알아볼 이성이 있다. 문제는 권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다툼이 생겼을 때 자기 사건의 재판관이 자기 자신이라는 데 있다. 그래서 로크의 국가는 권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권리를 더 잘 지켜 주는 도구이고, 도구가 제 일을 못 하면 갈아 치울 수 있다.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그림은 또 다르다. 그가 보기에 문제는 결핍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만들어 낸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견주기 시작하면서 남의 인정에 매이게 되었고, 거기서 지배와 예속이 생겼다. 그러므로 좋은 국가는 사람을 지켜 주는 울타리가 아니라 예속 없이 함께 사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 방식이 일반의지(general will)다. 일반의지는 사람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을 다 더한 것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향한 의지이고, 이 둘이 갈라진다는 점이 뒤에 큰 짐이 된다.
동의는 실제로 있었는가
사회계약의 힘은 전부 동의에서 나온다. 내가 동의했으니 나를 묶는다. 그런데 여기서 정면으로 걸린다. 나는 동의한 적이 없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 보자.
명시적 동의(express consent)는 말이나 서명으로 실제로 동의하는 것이다. 귀화 선서나 공직 취임 선서가 그렇다. 문제는 해당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 가운데 국가에 복종하겠다고 어디에 서명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명시적 동의만으로 권위를 세우면 대다수 사람에게는 복종할 의무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로크가 묵시적 동의(tacit consent)를 끌어들인다. 떠나지 않고 머무르면서 도로를 쓰고 재산을 누리는 것 자체가 동의라는 것이다. 이 쪽은 해당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대신 동의라고 부르기가 어려워진다.
흄이 그 자리를 정확히 짚었다. 머무름이 동의가 되려면 떠나는 선택지가 실제로 열려 있어야 한다. 말도 재산도 없는 사람에게 그 선택지는 열려 있지 않다. 흄은 이것을 잠든 채 배에 실려 온 사람에 견주었다. 그에게 선장을 따르든지 바다로 뛰어들든지 고르라고 해 놓고, 배에 남아 있으니 선장의 지배에 동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비판은 지금도 표준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묵시적 동의로 국가의 권위를 세우려는 시도는 대체로 실패한 것으로 본다.
가설적 동의, 그리고 동의를 아예 버리는 길
다음 계단이 가설적 동의(hypothetical consent)다. 실제로 동의하지 않았어도 합리적이라면 동의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유명한 되받기가 있다. 가설적 계약은 계약이 아니다. 내가 동의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나를 묶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 말에 힘이 있어 보인다면, 힘은 동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의했을 이유 쪽에서 온다. 그러면 동의라는 껍데기는 벗겨도 된다.
그 되받기를 받아들이면 두 길이 남는다. 하나는 동의를 아예 버리고 다른 데서 의무를 찾는 길이다. 정의로운 제도를 지지할 자연적 의무가 있다고 하거나, 협동의 이익을 받았으면 몫을 지라는 공정한 몫의 원리를 쓴다. 이 길에도 부담이 있다. 요청한 적 없는 이익을 받았다고 값을 물릴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의무가 왜 하필 내 나라를 향하는가.
네 길이 다 막힌다고 보는 입장이 철학적 무정부주의(philosophical anarchism)다. 국가를 없애자는 주장이 아니다. 국가에 복종할 일반적인 도덕적 의무가 따로 있지는 않다는 주장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지킬 이유는 여전히 있다. 다만 그 이유는 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살인이 나쁘기 때문이다. 소수설이지만 근거가 약하지 않다. 앞의 네 계단이 실제로 모두 걸리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가 이 장의 뒷부분을 여는 길이다. 계약을 실제로 있었던 일로 읽기를 그만두고 사고실험으로 다시 읽는 것이다. 그러면 물음이 바뀐다. 사람들이 동의했는가가 아니라, 공정하게 놓인 사람들이라면 어떤 원칙에 동의하겠는가. 롤스의 원초적 입장이 정확히 그 자리에 있다.
롤스 — 원초적 입장에서 두 원칙으로
여기서부터 이 장에서 가장 다투어지는 자리로 들어간다. 시작하기 전에 못 박아 둘 것이 있다. 이 절과 다음 절의 이론은 현실의 정당이나 정책 묶음에 하나씩 대응하지 않는다. 차등 원칙을 받아들이면서 시장을 넓게 쓰자고 할 수 있고, 자격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과거의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큰 규모의 이전을 요구할 수도 있다. 어떤 이론이 어떤 정책을 낳는지는 이론만으로 정해지지 않고 그 사회의 역사적·경제적 사실이 함께 있어야 정해진다. 이론의 이름을 진영의 이름으로 읽으면 두 이론 다 잘못 읽게 된다.
롤스가 겨눈 상대는 공리주의다. 그 이론이 무엇인지는 18장이 정의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그 이론이 분배에 대해 말하는 것 하나뿐이다 — 전체의 효용이 가장 커지는 분배가 옳다. 롤스가 보기에 이 답에는 결함이 있다. 그것은 사람이 여럿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한 사람 안에서는 오늘의 고통을 내일의 즐거움으로 상쇄할 수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같은 계산을 하면 누군가의 손해가 다른 누군가의 이익으로 상쇄되어 버린다. 이것을 개인들의 분리성 문제라 부른다.
그리고 롤스는 정의를 물을 대상을 정한다. 낱개의 행위나 거래가 아니라 사회의 기본 구조(basic structure) — 헌법, 재산 제도, 시장의 짜임, 가족과 교육 — 다. 이것이 뒤에 노직과 갈라지는 자리 가운데 하나다.
무지의 베일
원칙을 고르는 자리를 하나 만든다. 그 자리를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이라 하고, 거기 놓인 사람들에게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씌운다. 3장의 다섯 단계로 읽으면 이렇다. 상황을 설정하고, 그 상황에서 무엇을 고를지 묻고, 판단이 나오고, 그 판단을 전제로 삼아, 어떤 원칙이 정의롭다는 결론을 지지한다.
베일은 아무것이나 가리지 않는다. 원칙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기울이는 데 쓸 수 있는 것을 가리고, 원칙을 고르는 데 필요한 일반 지식은 남긴다. 그래서 베일은 정보를 없애는 장치라기보다 협상력을 없애는 장치다.
남겨 두는 것 가운데 하나가 기본 가치(primary goods)다. 무엇을 좋은 삶으로 여기든 그것을 추구하려면 있어야 하는 것들 — 권리와 자유, 기회, 소득과 부, 자존의 사회적 기반 — 을 가리킨다. 당사자는 자기가 무엇을 좋은 삶으로 여길지는 모르지만 기본 가치는 많을수록 낫다는 것은 안다. 이 장치 덕분에 특정한 인생관을 미리 깔지 않고도 무엇을 놓고 고를지가 정해진다.
베일 뒤에서 무엇을 고르는가
여기가 이 절에서 가장 다투어지는 자리다. 롤스는 당사자들이 최소극대화 규칙(maximin rule)을 쓸 것이라고 본다. 각 안의 가장 나쁜 결과만 보고, 그 가운데 가장 나은 것을 고르는 규칙이다.
롤스는 최소극대화가 언제나 합리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가 대는 것은 원초적 입장에 세 조건이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확률을 댈 근거가 없고, 최소한이 보장되면 그 위의 이득은 그렇게까지 절실하지 않으며, 다른 안의 최악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하사니(John Harsanyi, 1920–2000)의 반론이 여기를 정면으로 친다. 확률을 댈 근거가 정말 없는가. 자기가 어느 자리에 놓일지 전혀 모른다면 모든 자리를 같은 확률로 놓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러면 합리적인 선택은 최소극대화가 아니라 평균 기댓값을 최대로 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고르면 나오는 원칙은 평균 공리주의다 — 18장의 공리주의가 행복의 총합을 최대로 하려 한 데 비해, 한 사람당 평균을 최대로 하려는 판본이다. 인구 수가 달라질 수 있는 상황에서 둘은 서로 다른 답을 낸다. 하사니는 최악만 보는 규칙이 일반적으로 얼마나 이상한지도 든다. 그 규칙을 따르면 아주 작은 추락 확률 때문에 어떤 비행기도 타서는 안 된다.
롤스 쪽의 되받기는 이렇다. 모른다는 것과 모든 경우가 같은 확률이라는 것은 다르다. 확률을 모를 때 균등하게 놓는 것은 하나의 추가 가정이지 무지의 귀결이 아니다. 게다가 여기서 걸린 것은 한 번뿐인 선택이고 그 결과가 평생을 정한다. 이런 선택에서 기댓값을 좇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 자리는 정해지지 않았다. 두 말이 다 그럴듯하다는 것이 그대로 사실이고, 무지의 베일을 소개하면서 최소극대화가 따라 나온다고 적으면 그 사실을 감추게 된다.
두 원칙과 축차적 서열
롤스가 얻어 낸 원칙은 둘이다. 그리고 둘 사이에 순서가 있다. 순서를 빼고 요약하면 롤스가 아닌 다른 이론이 된다.
제1원칙 — 각자는 모두에게 같은 체계가 주어지는 것과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체계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여기 드는 것은 양심과 사상의 자유, 언론과 집회의 자유, 정치에 참여할 자유, 인신의 자유, 자의적 체포로부터의 자유 같은 것들이다. 한 가지 짚어 둘 것이 있다. 롤스가 기본적 자유에 넣은 재산권은 개인적 재산을 가질 권리이고,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할 권리는 여기 들어가지 않는다. 그것은 제1원칙이 아니라 제2원칙이 다룰 문제가 된다.
제2원칙 —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두 조건을 갖출 때에만 허용된다. 첫째 조건 — 공정한 기회균등 아래 모두에게 열려 있는 직위와 직책에 결부될 것. (b) 사회에서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될 것. 뒤엣것이 차등 원칙(difference principle)이다.
축차적 서열(lexical order)은 이렇다. 제1원칙이 제2원칙에 앞서고, 제2원칙 안에서는 기회균등이 차등 원칙에 앞선다. 앞선 원칙이 충족되기 전에는 뒤엣것을 따지지 않고, 뒤엣것의 이익으로 앞엣것을 살 수 없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의 몫을 크게 늘려 준다는 대가로 투표권을 거두는 안은 이 서열 아래에서 아예 후보가 되지 못한다. 자유는 자유를 위해서만 제한될 수 있다.
차등 원칙을 읽을 때 자주 어긋나는 것 둘. 이 원칙은 불평등을 없애라고 하지 않는다. 가장 불리한 처지를 실제로 낫게 만드는 불평등이라면 허용한다. 그리고 재는 대상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가장 불리한 처지라는 자리이고, 재는 눈금은 한 시점의 소득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기본 가치의 전망이다.
노직 — 자격 이론과 윌트 체임벌린
노직은 정의를 다른 데서 찾는다. 그가 보기에 "정의로운 분배"를 분배의 모양으로 물으려는 것 자체가 틀린 출발이다. 물어야 할 것은 지금 누가 얼마를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다.
자격 이론(entitlement theory)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취득에서의 정의 — 임자 없던 것을 처음 갖는 일이 어떻게 정당해지는가. 이전에서의 정의 — 정당한 보유자에게서 자발적으로 넘겨받은 것은 정당하다. 교정의 원리 — 앞의 둘이 어겨졌을 때 무엇을 되돌려야 하는가. 판정 규칙은 간단하다. 앞의 둘을 밟아 지금에 이르렀다면 지금의 분배는 정의롭다. 그 모양이 어떻든 상관없다.
이 그림을 세우려면 상대편 그림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 노직은 분배의 모양을 보는 원리를 정형 원리(patterned principle)라 부른다. "각자에게 필요에 따라", "각자에게 기여에 따라", "가장 불리한 처지에 가장 큰 이익이 되게" 같은 것들이다. 차등 원칙도 여기 들어간다. 반대로 자격 이론은 역사적 원리이고, 모양을 정해 두지 않으므로 비정형이다.
윌트 체임벌린 논증
노직이 정형 원리를 겨눠 만든 사고실험이다. 윌트 체임벌린은 당시의 이름난 농구 선수다.
논증을 번호로 세운다.
- (P1) 당신이 정의롭다고 여기는 분배 D1 이 실현되었다. 어떤 정형이든 좋다. 완전한 평등이라고 해도 좋다.
- (P2) D1 에서 각자가 가진 것은 당신의 원리가 인정한 정당한 몫이다.
- (숨은 전제 — 글에 없음) 정당한 몫이라면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 정할 권리가 따라온다.
- (P3) 100만 명이 체임벌린의 경기를 보려고 입장료에서 25센트씩을 그의 몫으로 떼는 데 동의한다. 아무도 속지 않았고 아무도 강요받지 않았다.
- (P4) 정의로운 상태에서 정의로운 단계를 거쳐 나온 것은 정의롭다.
- (중간 결론 C1) 그러므로 이렇게 생긴 분배 D2 는 정의롭다.
- (C2) 그런데 D2 는 원래의 정형을 깨뜨린다. 당신의 원리는 D2 를 부정의하다고 판정한다.
- (C) 그러므로 정형 원리는 자발적 이전과 함께 갈 수 없다. 정형을 지키려면 사람들이 자기 몫으로 하려는 일을 계속 막거나, 하고 난 뒤 계속 되돌려야 한다.
결론이 무엇인지 정확히 보아야 한다. 이 논증의 결론은 "재분배는 나쁘다"가 아니다. 결론은 정형 원리와 자유로운 이전이 양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직이 요약한 말로는, 자유가 정형을 흐트러뜨린다. 재분배가 나쁘다는 결론이 나오려면 "계속되는 간섭은 나쁘다"는 전제가 더 있어야 하고, 그 전제는 이 논증 안에 없다.
반론이 들어오는 세 자리
표준적인 반론이 셋 있다. 셋 다 논증의 서로 다른 곳을 친다.
| 반론 | 어디를 치는가 | 내용 |
|---|---|---|
| 최초 취득 | (P2) 와 이론의 뿌리 | 이론 전체가 취득의 정의에 걸려 있는데 그 부분이 가장 덜 채워져 있다. 실제 역사의 취득 상당 부분이 정당하지 않았다면, 교정의 원리가 요구하는 이전의 규모가 매우 커진다 |
| 자유의 개념 | 숨은 전제와 (C) | 재산권 자체가 남을 막는 강제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어느 쪽이 자유를 더 침해하는지는 자명하지 않고 따로 논증해야 한다 |
| 되풀이와 배경 | (P1) 의 읽기 | 한 번의 이전이 무해해도 같은 이전이 되풀이되면 다음 세대의 출발선이 달라진다. 그래서 롤스는 판정 대상을 낱개 거래가 아니라 기본 구조로 잡는다 |
첫째 반론은 노직에게 특별히 아픈 곳이다. 자격 이론에서 지금의 정의는 과거의 정당함에서 나오는데, 그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정복과 강탈이 나온다. 노직 자신이 이 문제를 알고 있었고, 교정의 원리를 진지하게 적용하면 상당한 규모의 이전이 요구될 수 있다고 적었다. 자격 이론이 현상 유지를 옹호하는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 여기서 드러난다.
둘째 반론은 제럴드 코헨(G. A. Cohen, 1941–2009)이 다듬은 형태가 널리 인용된다. 7장에 나온 스튜어트 코헨과는 다른 사람이므로 이 장에서는 이름을 함께 적는다. 요지는 이렇다. 내 땅에 남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강제다. 재산 제도는 자유의 총량을 늘리는 제도가 아니라 누구의 어떤 자유를 어떻게 배분할지를 정하는 제도다. 그렇다면 "세금은 자유를 침해한다"와 "재산권은 자유를 침해한다"는 같은 종류의 문장이 되고, 어느 쪽 침해가 더 무거운지는 자유 개념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셋째 반론은 롤스 쪽의 응답이다. 롤스는 (P1)의 D1 을 "어느 한 시점의 분배"로 읽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그가 정의를 묻는 대상은 기본 구조이고, 기본 구조는 낱개 거래가 아니라 거래들이 되풀이될 때 무엇이 쌓이는지를 다스리는 규칙이다. 이렇게 읽으면 체임벌린 사례는 반례가 되지 못한다. 배경 제도가 정의롭게 유지되는 한, 그 안에서 일어난 이전과 그것에 매겨진 세금은 둘 다 규칙의 일부이지 사후 개입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직 쪽이 이 응답에 되돌려 줄 말도 있다. 배경 제도를 정의롭게 유지한다는 것이 결국 사람들의 자발적 처분에 계속 손을 대는 일이라면, 이름만 바꾸었을 뿐 논증이 지적한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고받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유의 두 개념
앞의 두 절이 자유라는 말을 계속 썼는데, 두 사람이 그 말로 같은 것을 가리켰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벌린(Isaiah Berlin, 1909–1997)이 1958년 강연에서 그 말을 둘로 갈랐다.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가 묻는 것은 이것이다. 나에게 남겨진, 남이 간섭하지 않는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문이 몇 개나 열려 있는가를 묻는 셈이다. 적극적 자유(positive liberty)가 묻는 것은 다르다. 누가 나를 지배하는가. 내가 나의 주인인가. 노예의 사슬을 푸는 것이 앞엣것이라면, 중독이나 세뇌에서 벗어나 자기 이유로 사는 것, 그리고 시민으로서 자기를 다스리는 데 참여하는 것이 뒤엣것이다.
여기서 오독이 셋 일어난다. 하나씩 막아 둔다.
첫째 오독 — 벌린이 적극적 자유를 부정했다. 아니다. 그는 두 개념 모두 진짜 인간적 가치라고 적었다. 그가 경계한 것은 적극적 자유가 특정한 방향으로 미끄러지는 한 갈래였다. 그 갈래는 이렇게 간다. 자아를 둘로 쪼갠다 — 지금 원하는 낮은 자아와, 진짜로 원해야 할 높은 자아. 높은 자아가 원하는 것을 그 사람의 참된 뜻이라 부른다. 그러면 그가 거부하는 일을 강제하는 것이 그를 자유롭게 하는 일이 된다. 루소의 "자유롭도록 강제된다"는 문구가 정확히 그 자리에 있고, 벌린이 겨눈 것은 그 논법이지 자기 지배라는 이상 자체가 아니다.
둘째 오독 — 소극적 자유를 택하면 국가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벌린 자신이 이 추론을 막았다. 그는 자유와 자유의 조건을 구별하되, 자유를 쓸 수단이 없는 사람에게 열린 문은 값이 거의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가 고집한 것은 하나다. 사람들이 자유를 쓸 수 있게 하려고 다른 것을 해 줄 때 그것을 자유를 늘렸다고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자유는 자유이지 평등이나 정의나 행복이 아니고, 그 말들을 섞으면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았는지 셀 수 없게 된다.
셋째 오독 — 벌린은 자유가 최고의 가치라고 보았다. 아니다. 그는 가치가 여럿이고 서로 충돌하며 하나의 눈금으로 잴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유를 위해 평등을 내주거나 그 반대를 해야 할 때가 있고, 그때 무언가를 정말로 잃는다는 것이 그의 논지다.
벌린의 구분 자체에 대한 되받기도 있다. 매캘럼(Gerald MacCallum)은 자유가 언제나 세 자리를 채운 관계라고 지적했다. 행위자 x 가 제약 y 로부터 자유로워 z 를 한다. 그렇다면 두 개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도식의 자리를 다르게 채운 것뿐이다. 이 지적은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논쟁을 없애지는 못한다. 무엇을 제약 y 로 셀 것인가가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남의 방해만 세는가, 가난과 무지와 내면의 강박까지 세는가. 그 물음이 원래의 논쟁이었다.
셋째 후보도 있다. 비지배로서의 자유는 간섭이 없어도 남의 자의적 뜻에 매여 있으면 자유롭지 않다고 본다. 친절한 주인 밑의 노예는 간섭받지 않지만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페팃(Philip Pettit)이 공화주의 전통에서 되살린 개념이다.
평등은 왜 중요한가
지금까지 평등이라는 말을 여러 번 썼는데 무엇의 평등인지는 정하지 않았다. 그것부터 갈라야 한다.
무엇의 평등인가. 후생으로 재면 값비싼 취향을 가진 사람에게 더 주어야 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자원으로 재면 그 문제는 없어지지만, 같은 자원을 쥐고도 병이 있는 사람은 훨씬 적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센(Amartya Sen)은 역량으로 재자고 한다.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로 재자는 것이다. 드워킨(Ronald Dworkin, 1931–2013)은 자원 쪽을 다듬어, 남의 몫을 부러워하지 않는 상태를 기준으로 삼는 방식을 내놓았다.
어떤 불평등이 부정의한가. 드워킨이 그은 선이 뒤의 논쟁을 정한다. 자기가 선택해 떠안은 위험에서 온 결과와, 선택하지 않은 사정에서 온 결과는 다르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선을 원리로 세운 입장을 운 평등주의(luck egalitarianism)라 부른다. 선택에서 온 불평등은 정당할 수 있고, 운에서 온 불평등은 부정의하다.
여기가 12장과 곧바로 이어진다. 12장의 도덕적 운은 통제 밖의 사정이 도덕적 평가를 좌우한다는 문제였다. 운 평등주의는 그 문제에 대한 한 가지 대응을 분배에 적용한 것이다. 통제 밖의 것으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면, 통제 밖의 것 때문에 생긴 몫의 차이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12장의 네 가지 운 가운데 상황 운과 구성적 운이 여기 그대로 들어온다. 태어난 집안은 상황 운이고, 타고난 재능과 기질은 구성적 운이다.
그리고 12장이 만난 어려움도 그대로 따라온다. 선택 자체가 성격의 산물이고 성격은 선택한 것이 아니라면, ‘선택에서 온 불평등’이라는 칸이 비게 된다. 운 평등주의를 끝까지 밀면 모든 것이 운이 되어 구별이 사라진다. 이것이 이 입장이 받는 가장 깊은 반론이고, 12장의 인과적 운 문제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반론은 둘 더 있다. 가혹함 반론 — 자기 선택으로 망가진 사람은 도울 이유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보험 없이 운전하다 다친 사람을 치료하지 않는 것이 정의인가. 모욕적 판정 반론 — 이 원리를 실행하려면 누가 어쩔 수 없었고 누가 자기 탓인지를 국가가 가려야 한다. 앤더슨(Elizabeth Anderson)은 그 심사 자체가 평등한 시민 대접과 충돌한다고 지적하고, 다른 그림을 내놓는다. 관계적 평등 — 평등의 요점은 몫을 고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지 않는 관계를 세우는 것이다. 물어야 할 것은 누가 얼마나 갖는가가 아니라 누가 누구 앞에 굽실거려야 하는가다.
마지막 물음은 평등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갈린다. 평등 자체가 좋은 것인가. 파핏의 수평화 반론이 여기를 친다. 평등 자체가 가치라면, 잘 사는 쪽을 끌어내려 아무도 나아지지 않았는데도 어떤 면에서는 더 나아졌다고 말해야 한다. 그 결론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우리가 실제로 신경 쓰는 것은 격차가 아닐지도 모른다. 파핏의 대안이 우선주의다. 중요한 것은 절대적 수준이고,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같은 크기 이익이 더 무겁다. 프랭크퍼트는 다른 길을 낸다. 충분주의 — 중요한 것은 모두가 충분히 갖는 것이고, 그 선을 넘은 뒤의 격차는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니다. 12장의 프랭크퍼트 사례를 만든 그 사람이다.
민주주의는 무엇으로 정당화되는가
마지막 물음이다. 다수가 정했다는 것이 왜 따를 이유가 되는가. 정당화의 방식이 크게 둘로 갈린다. 이 절에서도 어느 체제가 옳은지는 정하지 않는다.
도구적 정당화는 민주적 절차가 더 나은 결정을 낳는다고 말한다. 좋은 답을 더 자주 맞히거나, 통치자의 실정을 걸러 내거나, 결정에 필요한 정보 — 무엇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아프고 급한지 — 를 결정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이 정당화를 뒷받침하는 형식적 결과가 하나 있다. 콩도르세 배심 정리다. 콩도르세(Marquis de Condorcet, 1743–1794)가 1785년 저작에서 보인 것으로, 전제는 셋이다. 선택지가 둘이고 그중 하나가 옳다. 각자가 옳은 쪽을 고를 확률
그림이 보여 주는 것이 이 정리를 인용할 때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도구적 정당화에는 다른 부담도 있다. 이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옹호하면 더 나은 결정을 낳는 다른 방식이 있을 경우 민주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결론을 받아들이게 된다. 실제로 그 결론을 밀고 나가는 입장이 있다. 인식정(epistocracy) — 정치적 지식을 갖춘 사람에게 더 큰 결정권을 주자는 주장이다. 브레넌(Jason Brennan)이 그 방향을 밀었고, 근거로 유권자 무지를 든다. 한 표가 결과를 바꿀 확률이 극히 낮으므로 정보를 얻는 데 드는 수고를 들일 이유가 각 개인에게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합리적 무지라 부른다. 그러면 무지는 게으름이 아니라 제도가 만들어 내는 결과가 된다.
인식정에 대한 되받기 가운데 널리 인용되는 것이 에스틀런드(David Estlund)의 것이다. 누가 더 잘 안다는 사실에서 그가 다스릴 권한이 있다는 결론은 따라 나오지 않는다. 의사가 나보다 잘 알아도 그가 내 대신 결정할 권한을 갖지는 않는다. 게다가 누가 전문가인지를 정하는 일 자체가 논쟁거리이고, 그 기준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그 지배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내재적 정당화는 결과를 보지 않는다. 민주적 절차 자체가 사람들을 평등하게 존중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지를 두고 진지하게 갈리고, 그 불일치가 어리석음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결정은 내려야 한다. 이때 각자의 판단에 같은 무게를 주는 방식이 있다면 그것을 쓰는 것이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하는 일이다. 월드론(Jeremy Waldron)이 이 형태의 논증을 다듬었다.
이 쪽에도 곤란이 있다. 가장 큰 것이 다수의 폭정이다. 절차 자체가 정당하다는 논거는 다수가 소수의 기본권을 없애는 결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순수한 내재적 정당화는 드물고, 대부분 헌법적 제약과 결합한다. 그런데 제약을 두면 이번에는 그 제약을 누가 해석하는가라는 물음이 생기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다시 다수결로 정할 수 없다.
다수결 자체의 기술적 문제도 있다. 콩도르세가 발견한 또 다른 것 — 이름이 같아 헷갈리기 쉬운데 배심 정리와는 다른 결과다 — 은 개인의 선호가 모두 앞뒤가 맞아도 다수결로 모은 집단 선호는 순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수가 A를 B보다 낫다고 하고, B를 C보다 낫다고 하면서, 동시에 C를 A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수가 원하는 것"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안건을 어떤 순서로 붙이느냐에 달리게 된다.
두 정당화가 서로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많은 논의가 둘을 섞어 쓴다. 다만 섞을 때 무엇을 근거로 삼고 있는지는 갈라 두어야 한다. 도구적 근거는 결과가 나빠지면 함께 무너지고, 내재적 근거는 결과와 무관하게 버티는 대신 나쁜 결과를 막을 자원을 자기 안에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새로 나온 것
용어부터 모은다.
| 용어 | 뜻 |
|---|---|
| 정치적 권위(political authority) | 명령을 내릴 권리와 그에 따를 의무의 짝. 힘이 있다는 것과 다르다 |
| 사회계약(social contract) | 국가 없는 상태 → 동의 → 권한이라는 세 걸음의 정당화 뼈대 |
| 자연 상태(state of nature) | 국가가 하는 일을 걷어냈을 때 남는 것을 보려는 장치. 역사 보고가 아니다 |
| 일반의지(general will) | 공동의 이익을 향한 의지. 사람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의 총합과 다르다 |
| 명시적 동의 / 묵시적 동의 / 가설적 동의 | 실제로 표한 동의 / 머무름에서 읽어내는 동의 / 합리적이라면 했을 동의 |
| 철학적 무정부주의 | 국가에 복종할 일반적 도덕적 의무는 따로 없다는 입장. 국가 폐지 주장이 아니다 |
| 기본 구조(basic structure) | 헌법·재산 제도·시장의 짜임·가족과 교육. 롤스가 정의를 물을 대상으로 삼은 것 |
|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 | 정의의 원칙을 고르는 공정한 조건을 명세한 사고실험 |
|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 협상력이 될 수 있는 정보를 가리는 장치. 위험 성향까지 가린다 |
| 기본 가치(primary goods) | 무엇을 좋은 삶으로 여기든 있어야 하는 것들. 권리·기회·소득·자존의 기반 |
| 최소극대화 규칙(maximin rule) | 각 안의 최악만 보고 그중 가장 나은 것을 고르는 결정 규칙 |
| 차등 원칙(difference principle) | 가장 불리한 처지에 가장 큰 이익이 될 때에만 불평등이 허용된다 |
| 축차적 서열(lexical order) | 앞선 원칙이 충족되기 전에는 뒤엣것을 따지지 않는다. 자유 → 기회균등 → 차등 원칙 |
| 개인들의 분리성 | 사람이 여럿이므로 한 사람의 손해를 다른 사람의 이익으로 상쇄할 수 없다는 지적 |
|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 국가의 정당한 권한을 최소한으로 보는 입장. 12장의 자유지상론과 다른 말이다 |
| 자격 이론(entitlement theory) | 취득의 정의 · 이전의 정의 · 교정의 원리. 모양이 아니라 경로를 본다 |
| 정형 원리 / 역사적 원리 | 분배의 모양을 정해 두는 원리 / 여기까지 온 경로만 보는 원리 |
| 윌트 체임벌린 논증 | 정형 원리와 자발적 이전이 양립하지 않음을 보이는 사고실험 |
| 소극적 자유 / 적극적 자유 | 간섭받지 않는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 누가 나를 지배하는가 |
| 삼항 도식 | 행위자 x 가 제약 y 로부터 자유로워 z 를 한다. 매캘럼의 되받기 |
| 비지배로서의 자유 | 간섭이 없어도 남의 자의적 뜻에 매여 있으면 자유롭지 않다 |
| 운 평등주의(luck egalitarianism) | 선택에서 온 불평등은 정당할 수 있고 운에서 온 불평등은 부정의하다 |
| 관계적 평등 | 평등의 요점은 몫이 아니라 서로 지배하지 않는 관계다 |
| 수평화 반론 | 평등 자체가 좋다면 아무도 나아지지 않는 하향 평준화도 어떤 면에서 낫다고 해야 한다 |
| 우선주의 / 충분주의 | 못한 처지의 이익이 더 무겁다 / 모두가 충분한 선을 넘는 것이 중요하다 |
| 콩도르세 배심 정리 | 각자의 정답률이 절반을 넘으면 다수결의 정확도가 1 에 수렴한다는 결과 |
| 합리적 무지 | 한 표의 영향이 극히 작아 정보를 얻을 유인이 개인에게 없다는 사정 |
| 인식정(epistocracy) | 정치적 지식을 갖춘 사람에게 더 큰 결정권을 주자는 입장 |
사람은 이렇게 나왔다. 앞 장에서 이미 나온 홉스·로크·흄·롤스·노직·파핏·프랭크퍼트는 자리만 적는다.
| 이름 | 이 장에서 맡은 자리 |
|---|---|
| 홉스 | 자연 상태를 전쟁 상태로 그리고 거스를 수 없는 주권을 끌어낸다 |
| 로크 | 자연법과 권리가 있는 자연 상태, 신탁으로서의 정부, 저항권, 묵시적 동의 |
| 흄 | 묵시적 동의 비판 — 떠날 수 없는 사람의 머무름은 동의가 아니다 |
| 루소 | 일반의지. 자유롭도록 강제된다는 문구가 벌린의 표적이 된다 |
| 롤스 | 원초적 입장, 무지의 베일, 두 원칙과 축차적 서열, 차등 원칙, 기본 구조 |
| 하사니 | 베일 뒤에서 최소극대화가 아니라 평균 기댓값 최대화가 합리적이라는 반론 |
| 샌델 | 무연고적 자아 — 원초적 입장이 특정한 자아관을 깔고 있다는 비판 |
| 노직 | 자격 이론, 정형 원리 비판, 윌트 체임벌린 논증, 최소 국가 |
| 제럴드 코헨 | 재산권 자체가 강제를 포함한다는 자유 개념 비판. 7장의 스튜어트 코헨과 다른 사람이다 |
| 벌린 |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진짜 자아 논법에 대한 경고 |
| 매캘럼 | 자유의 삼항 도식 |
| 페팃 | 비지배로서의 자유 |
| 센 | 무엇의 평등인가 — 역량 |
| 드워킨 | 자원의 평등, 선택과 운의 구별 |
| 앤더슨 | 운 평등주의라는 이름을 붙였고 관계적 평등을 대안으로 냈다 |
| 파핏 | 수평화 반론, 우선주의 |
| 프랭크퍼트 | 충분주의. 12장의 프랭크퍼트 사례를 만든 그 사람이다 |
| 콩도르세 | 배심 정리, 그리고 다수결 선호가 순환할 수 있다는 발견 |
| 월드론 | 합당한 불일치와 평등한 무게 — 민주주의의 내재적 정당화 |
| 에스틀런드 | 더 잘 안다는 것에서 다스릴 권한이 나오지 않는다는 되받기 |
| 브레넌 | 인식정 |
등급을 적어 둔다. 분배 정의는 미결이다. 롤스 쪽도 노직 쪽도 살아 있고, 이 문서는 어느 쪽도 고르지 않았다. 국가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데 성공한 이론이 있는가도 미결이며, 철학적 무정부주의가 진지한 소수설로 남아 있다. 무지의 베일 뒤에서 최소극대화가 합리적인가, 윌트 체임벌린 논증이 성공했는가, 운 평등주의와 관계적 평등 가운데 어느 쪽인가, 민주주의를 무엇이 정당화하는가도 모두 미결이다. 반면 명시적 동의로는 실제 국가의 권위를 세울 수 없다는 것과 묵시적 동의에 대한 흄의 비판이 유효하다는 것은 사실상 다툼이 없다. 벌린이 적극적 자유를 전면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텍스트를 읽으면 확인되는 사항이다.
이 장이 쓰지 않은 것도 적어 둔다. 어떤 정치 체제가 옳은지, 어떤 정책이 정의로운지에 대해 이 장은 아무 결론도 내지 않았다. 앞에서 밝힌 대로 이론과 정책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으며, 어느 이론을 받아들이든 그것만으로 정책이 정해지지는 않는다.
더 읽을 곳으로는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의 Authority 항목, 같은 백과의 Original Position 항목, Libertarianism 항목, Positive and Negative Liberty 항목, Egalitarianism 항목, Democracy 항목이 있다.
더 공부할 것
이 문서는 분석철학의 주요 문제를 한 바퀴 돈 것이다. 여기서 갈라지는 길을 정리해 둔다. 각 분야가 이 문서의 어느 장을 확장한 것인지 함께 적었다.
이 문서가 다루지 않은 분야
빠뜨린 것이 아니라 담지 못한 것이다. 각각이 이 문서만 한 분량을 갖는다.
- 미학과 예술철학 — 무엇이 예술인가, 미적 판단은 취향의 문제인가. 17장의 메타윤리가 던진 물음("그 판단은 무엇을 하는 말인가")이 미적 판단에 대해 거의 그대로 되풀이된다. Rebus 시리즈에 이 분야 한 권이 있다.
- 종교철학 — 신 존재 논증들, 악의 문제, 신앙과 이성. 10장의 존재론적 개입과 8장의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이 여기서 다시 쓰인다.
- 철학사 — 이 문서는 문제별로 배열했고 인물은 그 문제에 필요한 만큼만 등장한다. 시대순으로 읽으면 왜 그 물음이 그때 나왔는지가 보인다. 3장의 시대 지도가 최소한의 뼈대다.
- 동아시아·인도 철학 — 3장에서 밝혔듯 이 문서는 서양 분석철학의 전통 안에 있다. 다른 전통은 같은 물음에 다른 어휘로 답하기도 하고, 아예 다른 물음을 묻기도 한다. OpenStax 판이 이 부분을 비교적 넓게 다룬다.
- 현상학과 대륙철학 — 후설·하이데거·메를로퐁티의 전통. 15장의 의식 논의와 같은 대상을 다루면서 방법이 전혀 다르다.
- 페미니즘 철학과 인식적 부정의 — 6장의 정당화와 20장의 정의가 만나는 자리에서 최근 30년 사이에 자란 분야다.
이 사이트 안에서 이어지는 문서
- 논리학 — 3~4장이 되짚고 지나간 것(타당성·건전성·논증 형식)이 그쪽 3~4장에 자세하다. 11장의 가능세계는 그쪽 18장이 형식 체계로 세우고, 16장의 확정 기술은 그쪽 12장이 기호로 적는다. 이 문서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물었다면 그쪽은 "어떤 규칙으로 다루는가"를 묻는다.
- 확률과 통계학 — 8장의 베이즈 갱신을 제대로 다루려면 여기다. 사전 확률·우도·수렴이 계산으로 무엇인지 보고 오면 8장의 철학적 논점이 훨씬 선명해진다. 뒤쪽의 유의성 검정은 9장이 개념으로 다룬 "증거가 이론을 뒷받침한다"를 절차로 옮긴 것이고, 그 검정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는 9장의 미결정성과 같은 문제의 실무판이다.
- 알고리즘 — 15장의 "계산이 이해에 충분한가"를 묻기 전에 계산이 무엇인지 보고 오는 것이 좋다.
학부·대학원 과정
- 형식 인식론 — 8장의 베이즈 갱신을 본격적으로. 믿음의 정도, 더치북 논변, 조건화 규칙, 증언과 불일치의 인식론.
- 형이상학 — 10·11장의 확장. 시간의 존재론(영원주의와 현재주의), 지속과 부분론, 근거지음(grounding), 사회적 존재론.
- 심리철학과 인지과학 — 14·15장의 확장. 표상 이론, 예측 처리, 확장된 마음, 신경과학의 철학.
- 언어철학과 형식의미론 — 16장의 확장. 몬터규 문법, 맥락 의존성, 이차원 의미론, 화용론.
- 메타윤리 — 17장의 확장. 표현주의의 정교한 판본, 구성주의, 이유의 실재론, 도덕 인식론.
- 정치철학 — 20장의 확장. 세계적 정의, 이주, 민주주의 이론, 재산권, 세대 간 정의.
- 과학철학의 각론 — 9장의 확장. 물리학의 철학(시공간·양자역학의 해석), 생물학의 철학(종·기능·선택의 단위), 사회과학의 철학.
더 나아가는 주제
- 실험철학 — 3장이 소개한 것의 본격 전개. 직관이 정말 안정적인지 조사하고, 그 결과가 철학의 방법에 무엇을 뜻하는지 따진다.
- 인공지능 윤리와 정렬 문제 — 15장과 19장이 만나는 자리. 자율 시스템의 책임, 가치를 어떻게 명세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18장의 세 이론 중 무엇을 전제하는가.
- 응용 인식론 — 6·7장이 실무가 된 자리. 증언, 전문가에 대한 신뢰, 불일치, 온라인 정보 환경.
- 인격 동일성과 신경윤리 — 13장의 확장. 기억 개입, 뇌 자극, 사망 판정 기준.
- 동물윤리와 환경윤리 — 19장의 확장. 도덕적 지위의 경계를 어디까지 넓힐 것인가, 미래 세대에 대한 의무.
공부 방식에 대한 조언
- 논증을 손으로 재구성하라. 4장은 읽어서 늘지 않는다. 어떤 글이든 한 문단을 골라 (P1) 부터 (C) 까지 적어 보는 것을 스무 번쯤 하면 그때부터 남의 글에서 뼈대가 보인다. 이 문서의 각 절이 소재로 쓰기 좋다.
- 반대편을 먼저 써 보라. 어떤 입장이 옳다고 느껴지면, 그것을 가장 잘 반박하는 문단을 써 보는 편이 빠르다. 반박이 잘 안 써지면 아직 그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너무 잘 써지면 상대를 약하게 그린 것이다.
- 세 등급을 늘 물어라. 어떤 책에서 단정적인 문장을 만나거든 이것이 정설인지 저자의 입장인지 물어라. 좋은 책은 그 구분을 스스로 밝히고, 그렇지 않은 책은 밝히지 않는다. 이 문서에서 가장 오래 남았으면 하는 습관이 이것이다.
- 사고실험에 성급히 답하지 마라. 답이 곧장 떠오르거든 그 답이 무엇에 기대고 있는지 먼저 적어라. 트롤리에서 사람들의 답이 갈리는 것은 누가 틀려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원리에 기대고 있어서다.
- 원전을 한 편은 읽어라. 개론서는 논증을 요약하지만 요약은 늘 무언가를 잃는다. 게티어의 세 쪽짜리 논문이나 톰슨의 트롤리 논문처럼 짧고 결정적인 글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런 글이 왜 그렇게 짧은지가 그 자체로 배울 점이다.
- 용어의 번역을 의심하라. 이 문서는 표기를 하나로 고정했지만 한국어 철학 용어는 책마다 갈린다. 다른 책에서 '신빙론'을 '신뢰성주의'로, '수반'을 '부수'로 적는 것을 만나거든 같은 것인지 확인하라. 영어 용어를 함께 외워 두면 이 문제가 대부분 사라진다.